Chapter 20 – #4 손님 (3)
누구나 철없는 시절은 있는 법이고 그런 시기의 치기로 곤욕을 치르는 일이 있었다·
폴로 또한 그랬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그리고 다시 떠올리기도 두려운 과거가 그에게도 있는 것이다·
5년 전의 일이었다·
때는 전장의 양상이 고착되고 대륙의 6강이 7강으로 늘어났던 변화의 시기였고 그런 외부적인 상황과 별개로 폴로가 제도라는 작은 세계를 이 땅의 전부로 알던 시기였다·
그는 연회장에 있었다·
“노템 영식!”
“아 볼드 영식! 올해도 뵙는구려·”
“1년에 겨우 한 번 있는 연회이니 말이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실컷 놀아보겠소?”
“그건 그렇군!”
제국에서도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자제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모임이 있었다·
1년에 한 번 연초가 되면 영식과 영애들이 모여 교분을 나누고 은밀한 만남을 가지던··· 돌이켜보면 꽤 방탕한 그런 모임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그리 방탕하게 논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엄의 낭중지추나 황실의 역린 따위의 별종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과 자신은 달랐기에 그리고 당시엔 자신이 옳을 줄로만 알았기에 폴로는 그날도 함께 밤을 지샐 영애를 찾기에 혈안이었다·
검귀 카샤는 그런 날에 만났다·
“납셨군· 그레이엄의 낭중지추·”
“곁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혹 저자를 아는 자가 있소?”
“알아보니 그레이엄 영식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데려온 상대라 하더구려· 외국인이라고 들었소만·”
엘버스 그레이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전장에 나가 전공을 올린 영웅 그리고 그 전쟁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반병신·
‘그레이엄의 낭중지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리고 연회에 참석하는 목적조차 참 의뭉스러운 그 사내가 손님을 데려온 것이다·
“재수 없게 생겼군·”
휠체어를 탄 그의 곁에 멀끔한 인상의 미남자가 있었다·
분위기는 독특했다· 분명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음에도 냉막한 표정과 옷 위로 도드라지는 근육 탓에 꼭 전장에 나온 기사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면 설명이 되겠는가·
당시의 폴로는 그를 그리 평했다·
“사춘기에서 못 빠져나온 친구구려· 내 저런 인간을 알지· 세상에 나만 힘들고 괴로운 줄 알고 그게 멋인 줄 아는 철딱서니 없는 부류· 저거 분위기 잡는 것 좀 보시오· 본인한테 취해 있는 것 같지 않소?”
“크흐흐! 노템 영식도 참 너무하시구려·”
“뭐 어떻소? 사실인 것을·”
“그렇긴 하오·”
다시 생각해보면 질투였을지도 몰랐다·
또한 경계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등장한 순간부터 점찍어뒀던 영애들의 시선을 죄다 빼앗아 가버리는 낯선 이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비단 폴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엘버스 그레이엄과 친해지고 싶어 했던 다른 영식들도 또 영애의 관심을 뺏긴 다른 영식들도 모두 그를 경계했다·
성욕에 미쳐있는 한창때의 청년들에게 그들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은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종류였다·
날 선 경계의 분위기 속 그 사내와 엘버스 그레이엄만이 여유로웠다·
그 여유로움에 어느덧 두 사내의 근처로 영애들이 원형으로 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런 순간이었다·
“···이보시오· 노템 영식 내 놀라운 소식을 하나 가져왔소·”
그날 함께 했던 볼드 백작가의 차남이 말하는 게 아닌가·
“저 사내 용병이라는 듯하오· 그레이엄 영식이 전쟁터에 있을 적 교분을 나눈·”
“···귀족이 아니란 말이오?”
“듣기로는 무국적자라고 하오·”
“허어···!”
청년의 질투는 일차원적이고 공격적인 면이 있었다·
그날의 폴로가 그랬다·
무엇으로도 상대되지 않을 것 같던 낯선 이의 약점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어린 마음은 드러난 약점을 보며 욕심에 사로잡혔다·
저 사내의 흠결을 끄집어내어 무릎 꿇리고 싶다·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하여 마땅한 보상을 취하고 싶다·
행동은 빨랐다·
폴로는 무리를 이끌고 영애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사내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려!”
환한 미소와 함께 양팔을 벌리며 호의를 가장했다·
“오 노템 영식 반갑군·”
“그레이엄의 혈족을 뵙소· 내 옆의 분을 소개받아도 되겠소?”
“으음····”
엘버스 그레이엄이 곤란하다는 듯 짓는 미소에 폴로는 자신감이 더해짐을 느꼈다·
그땐 그것을 위축으로 알았으나 돌이켜보는 지금 생각기로 그의 곤란함은 카샤의 불같은 성격을 걱정한 것이었다·
알 턱이 있겠는가·
그저 섣불리 답하지 못하는 것을 약점을 물린 것이라 판단해 물어뜯기 바빴거늘·
“어느 가문에서 오셨소?”
“···없소·”
“음? 무엇이?”
“가문이 없소· 그저 전장을 굴러다니는 용병일 뿐이오·”
답하는 그의 심기는 불편해보였다·
폴로는 찌릿한 쾌감을 느꼈다·
“허어··· 이 연회에 참석한 이가 가문이 없다라? 이건 참····”
동조하듯 나서는 무리의 영식들이 참으로 든든함에 폴로는 자신감을 얻었다·
말실수를 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다들 진정하시오· 부모가 없을 수도 있지· 용병이라 하지 않소? 아 그것도 아니면····”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못난 부모에게 도망쳐 부모가 없어진 걸 수도 있지·”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폴로가 선명하게 떠올리는 것은 하나였다·
쩌어어어억―!
하고 나무가 세로로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고 목 위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통증이 일었다는 것·
“꺄아아아악!”
영애의 비명이 울렸다·
함께 있던 영식들이 히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중 폴로만 어안이 벙벙했다·
“끕 끄어어···!”
언제 바닥에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허우적허우적 팔을 뻗었으나 닿는 것은 없었다·
뺨을 맞은 것은 연회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손바닥으로 뺨을 쳐서 ‘쩍!’ 소리가 나는 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않던가·
여하튼 폴로의 머릿속에 아직도 맴도는 말이 있었다·
“당신은 주둥이가 참 가볍구려· 아쉽소· 전장에서 만났으면 목을 비틀어 뽑아버렸을 텐데·”
그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사내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다·
그 싸늘하고 끈적한 목소리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이 카샤고 그가 바로 새로이 대륙의 강자에 이름올린 괴물이란 걸 안 것은 1주일 뒤의 일이었다·
그가 몰래 찾아와 해코지할까 싶어 한 달간 방을 나서지 못한 것은 또 다른 일·
결론만 말해서 폴로는 그날의 일을 잊고 살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두려워 또한 다시는 그와 만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하지만 그의 영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는 못했다·
군인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보급관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것도 다 끝인 줄 알았는데···!’
회상을 마친 폴로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마차 앞칸에 앉아있는 카샤··· 엘릭 포트먼의 등을 흘끔거렸다·
장교만 되면 전선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럼 평생 전장에서 구른 그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로 알았다·
한데 이게 뭔가·
왜 그가 이런 한미한 시골 남작가의 돌아온 철부지 도련님으로 등장하냔 말이다!
“어휴 비료 냄새·”
“시골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이 미친놈들!’
아르민과 디샤의 보급관이 주제 모르고 거만하게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폴로는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그들을 말려야 한다는 것·
그들이 적진의 군인임도 오늘 거래의 경쟁자들인 것도 이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인류애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폴로는 그들을 저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에서 빼내야 한다는 영웅적 결론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물론
“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폴로의 마음은 우드득 꺾여버렸다·
폴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몸엔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폴로 경 괜찮소?”
아르민의 보급관이 물어옴에 폴로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괘괘괘괜찮소!”
안 괜찮으면 안 된다·
아직 그가 아는 척을 해오지 않으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제발 그래야 했다·
‘제발····’
폴로는 하늘에 기도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랬다·
하늘에 빈다고 소원이 다 이뤄진다면 이 땅에 전쟁은 왜 있겠고 갈등은 왜 있겠나·
엘릭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그가 5년 전처럼 날 선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확히는 그 반대라는 것 정도였다·
*
‘염병할 신님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오?’
마차의 가장 앞칸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던 엘릭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그 많은 대륙 사람 중 하필 원수를 뽑아 이곳에 보내는 게 참 야속하지 않나·
위기감 그리고 조급함이 속에 자리했다·
그가 혹시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면 어떡하나 제도로 돌아가 검귀 카샤의 행적을 보고해버리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 것이다·
엘릭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칼을 어디다 뒀더라·’
이렇게 된 이상 협박밖에 답이 없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글쎄····
‘···증거인멸을 해야겠지·’
사람을 묻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은데·
엘릭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