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 #4 손님 (5)
엘릭이 자신과 인간으로서의 결이 다른 상대를 만나본 경험은 이제까지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부친 호벤 포트먼 두 번째는 친우 엘버스 그레이엄·
부친은 실리를 위해 나머지 모든 요소를 희생하는 냉혈한이었다·
엘버스 그레이엄은 그와 반대로 신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별종이었다·
그들을 마주하며 느꼈던 이질감과 일말의 동경이 있었다·
엘릭은 오늘 그런 감정을 한 번 더 느꼈다·
-제가 느끼는 모욕감을 이유로 영지에 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끄는 자는 그리해선 안 됩니다·
티리아 위빈은 세 번째였다·
그녀는 부친이 본으로 아는 실리와 친우가 사랑했던 신념을 절반씩 섞은 그렇기에 익숙하고도 더욱 이해되지 않는 여인이었다·
절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본능의 단계에서 깨닫게 하는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경의를 품었다·
진흙탕을 굴러온 자신과 다르게 너무나도 고결했기에 동굴 속에서 빛을 쫓듯 그녀를 쫓게 되는 것이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그녀는 유리 세공품과 같았다·
참 아름다움에도 혹 꺾이게 되진 않을지 풍파가 깎아내진 않을지 따위를 걱정하게 만드는 점에서 그보다 나은 비유가 없었다·
드득―
고민이 떠오르니 언제나처럼 날이 죽은 단도로 책상을 긁게 된다·
엘릭은 책상 위에 파이는 홈을 멍하니 응시하며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그럴수록 짙어지는 마음이 있었다·
돕고 싶다·
그 감정의 기저에 깔린 것을 홀로 견뎌 내온 그녀에 대한 동정이라고도 그녀를 그리 만든 스스로에 대한 혐오라 해도 좋을 것이다·
뭐가 됐든 엘릭의 속엔 마냥 떠나가려 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엘릭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감정이 생겨난 원인의 파악보다 이미 생겨난 감정을 해소하는 법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여 떠올린 상념은 ‘어떻게 도울 것인가·’였다·
엘릭은 큰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내였다·
그는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철저히 짓밟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일만 알았다·
그녀처럼 될 수 없으니 엘릭이 할 일은 자명했다·
이번 역시 앞선 위빈 가의 일과 같이 그는 법보다 가까운 폭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폴로 경 내 들어가도 되겠소?”
“으헉!”
쿠당탕탕!
그에게 배정된 방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문이 열린 것은 직후였다·
“드드드들어오시오···!”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의 이유를 엘릭은 알았다·
문을 여니 의자에 앉아있는 살집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는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대화를 하고 싶어 찾아왔소·”
그리 말하며 엘릭은 문을 닫았다·
“아니면 우리가 구면이니 인사를 나누는 게 먼저겠소?”
그가 자신을 알아봤을 것을 확신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식당에 앉아있던 내도록 그가 눈치를 본 것은 자신이었고 그가 나서는 타이밍은 언제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자리를 뒤엎으려던 순간이었던 까닭이다·
이후의 일을 알고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그리도 노골적으로 보였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폴로는 예상처럼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그리고
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날의 일은 내가 죄송하오! 오늘 일은 다 우연이오! 나는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몰랐고 당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생각도 없었소! 우 우연히 사고가···!”
“쉿·”
엘릭이 입가에 검지를 대자 폴로가 히끅 딸꾹질했다·
“소란은 곤란하지 않겠소· 서로에게·”
딱 딱·
엘릭은 지팡이를 짚으며 직전까지 폴로가 앉아있던 자리로 향해 엉덩이를 붙였다·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그가 엘릭을 올려다봤다·
의도된 구도였다·
위압감은 눈높이에서부터 오는 것이니·
이다지도 겁먹은 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엘릭은 그에게 학습된 공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
폴로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구나·
내려다보는 시선이 따갑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꼭 5년전의 연회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당신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어 이리 자리를 청한 것이 아니오· 솔직히 말해서 그날의 일은 나의 무도함에도 책임이 있음을 아오·”
“그 그건····”
“물론 사과할 생각은 없소· 날 욕보인 당신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내겐 없으니까·”
폴로가 바짝 굳었다·
하나 이어지는 말은 의외였다·
“그러니 우리 각자의 원한은 털어두고 지금을 생각합시다· 오늘 일이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폴로의 고개가 슬그머니 들렸다·
그는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을 더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참을성이 좋지 않소· 나를 향한 모욕을 잘 참지 못하는 편이며 나에게 포함된 것을 향한 모욕도 잘 참지 못하오· 오늘 일이 그렇소·”
“예 예에····”
“아르민의 보급관이 보인 행태가 영 보기 좋지 않았단 말이오· 한데 직접 나서기는 곤란하오· 내가 정체를 밝혔다간 이곳 땅의 평온이 무너지지 않겠소?”
맞는 말이다·
검귀 카샤의 이름값이란 게 그랬다·
카샤는 현 서부 전쟁의 양상을 바꿀 이름이다·
그 존재만으로 국가의 멸망이 제지되고 전장의 우열이 바뀌는 사실상의 전략 병기였다·
그런 그가 이곳에 있음이 알려지면 어떻겠는가·
그를 영입하려는 세력이 있을 것이고 그에게 원한을 품고 오는 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고압적이며 후자는 포악하다·
영입하려는 세력은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위빈을 압박할 터다·
복수를 원하는 것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등한시한 채 달려들어 그의 것들 해하려 들 터다·
그리고 폴로가 아는 카샤는 그런 것들을 참는 사내가 아니었다·
카샤의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 이곳은 피바다가 될 것이 뻔하다·
내년에 태어날 밀들은 피를 양분으로 자라게 될 터였다·
“휴양을 방해받고 싶지 않단 말이오·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데 그걸 힘들게 해·”
와중 확신하게 되는 것은 역시 그가 전장을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
지금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보아 부상 문제로 인한 휴양일 터였다·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합시다·”
엘릭은 상체를 기울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폴로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데구르르 눈을 굴려 올려다보니 폴로의 눈에 그의 시린 미소가 비쳤다·
“당신이 나를 도와줘야겠소· 물론 공짜는 아니지· 적법한 거래를 하자는 것이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이곳에 밀을 사러 온 게 아니오? 내 적당한 값을 쳐드리리다· 그러니 내 부탁을 좀 들어주시오·”
움찔 폴로의 몸이 떨렸다·
이어진 이야기는 그에겐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
포트먼의 저택엔 외부의 손님을 응대하는 접견실이 있었다·
엘릭의 기준에선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공간이었고 티리아에겐 적당히 귀족으로서의 위엄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 오늘 다섯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포트먼 부부와 서부의 세 보급관이었다·
“그럼 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티리아가 말했다·
“판매하는 밀의 양은 미리 고지 드린 대로입니다· 올해 수확량이 유독 많은 편이지요· 저희 쪽에서 원하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일괄적 구매가 가능한가·”
티리아로선 가장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방향이 일괄 판매였다·
서로 다른 곳으로 분할하여 판매하기엔 밀의 유통과정이 꽤 번거로운 까닭이다·
세상이 이리 발전했다곤 하나 이 시골 위빈에서 서부까지 밀을 운반하려면 아직 마차가 필요했다·
즉 업체를 고용해야 하는데 그만큼 유통에 요구되는 자금이 많았다·
그것은 서로 다른 장소로 분할하여 판매할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금이었다·
“그리 부유하지 않은 영지라 이런 선택이 불가피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적당히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말을 마치고 티리아는 보급관들의 기색을 살폈다·
‘디샤는 탈락이구나·’
벌써부터 얼굴 위로 곤혹이 드러난다·
앞선 영지들에서 꽤 큰 지출을 감내해온 것이겠지·
볼 필요도 없다·
혹여 저쪽에서 거래를 추진하려고 무리한다 한들 과정이 삐걱거리게 될 터다·
다음으로 아르민·
“거 너무 섭섭하게 구시는구려·”
그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티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핥듯이 보는 시선이 불쾌함을 자아낸다· 느글거리는 말투에 짜증이 인다·
드물지 않게 보이는 유형이었다·
티리아는 감정을 더 깊숙이 숨겨냈다·
‘어차피 다신 보지 않을 인간이다·’
사사로이 그의 시선에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거래를 해야 하는 순간이니까·
더군다나 엘릭에게 참아야 함을 일러 놓고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면 그만큼 면목이 없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는 참이다·
티리아는 용기 내 이만큼 좁힌 거리를 다시 벌리고 싶진 않았다·
곧장 시선을 돌렸다·
‘제국은····’
잘 모르겠다·
처음 등장한 이후로 계속 어딘가 불편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더했다·
아니 달라진 점이 있긴 했다·
최초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꼭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체 뭘 노리는 걸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저 전량 구매가 가능하오· 거기에 조건을 덧붙이겠소·”
제국의 보급관 폴로가 손을 들었다·
“유통 자금은 제국에서 직접 해결하도록 하지·”
“이보시오!”
쾅!
아르민의 보급관이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쳤다·
제국 보급관이 ‘흥!’하고 코웃음 쳤다·
“문제라도 있소? 제값에 사겠다는 건데·”
“있지! 그런 일을 했다간 밀의 물가가···!”
이게 무슨 일인가·
티리아의 속에 당황이 자리했다·
제국이 내거는 조건은 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던 까닭이다·
애초에 전시다·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전쟁에 필요한 자금은 그 밖에도 천문학적인 숫자를 자랑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 끝의 위빈부터 서부에 있는 제국까지 유통 자금을 모두 대겠다니 저것은 절대 일개 보급관의 결정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거짓이라 하기엔 제국의 보급관이 보인 기색이 사뭇 당당하다·
‘애초에 저 조건을 약속하고 왔다?’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전량 구매자에게 팔겠다는 결정을 오늘 아침에 내린 참이다·
제국 지휘부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다·
정보가 모자랐다·
저것이 경쟁자를 물리치려는 거짓이라면 향후의 거래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만일 진실이라면 그것도 문제였다·
고작 밀을 사겠다고 그만한 지출을 감내하겠다니 그건 행정을 처음 배운 뜨내기들도 안 할 실수였다·
밀 외에 위빈에 다른 속셈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야 할 수준이란 말이다·
‘대체····’
속셈이 있다면 그게 대체 뭘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제국에 팔아야겠구려· 그렇지 않소· 부인?”
엘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