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 #4 손님 (6)
“그 그게 무슨····”
아르민의 보급관이 말했다·
그에 관한 엘릭의 답은 이전과 같았다·
그는 정말 당연한 일을 말하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을 한 채였다·
“문제가 있소? 우리 입장에서야 가장 합리적인 판매처가 제국이 아니오· 아니면 아르민에서 같은 조건을 맞춰줄 수 있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아르민은 제국만큼 예산이 많지 않았다·
제국이 왜 제국이겠는가· 그 큼지막한 땅덩어리를 떠나고서라도 힘과 재력 따위의 모든 것이 다른 국가보다 곱절은 우위에 서 있기에 제국인 것이다·
결국 아르민의 보급관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그 그건 시장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오! 안 좋은 선례를 만드는 일이란 말이오! 구매 측이 유통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일이 장기적으로 위빈에도 손해가 될 것을 왜 모르시오!”
분명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허점투성이임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나선 것은 폴로였다·
“흥! 고작 이곳의 거래 하나로 시장 전체가 무너짐을 걱정하는 것도 우습구려· 애초에 밀 수입 경쟁은 이곳에서 끝나오· 게다가 지금은 전시 상황이지· 이런 특수성이 있기에 제국이 결단을 내린 것이오· 어디 한번 내년에도 이래보라지! 누가 그 영지의 밀을 사겠소?”
“내년에도 전쟁 중일 것은 감안하지 못하오?!”
“내년에도 지금처럼 전장이 고착 상태이리라 장담할 수 있소?”
“그건···!”
없었다·
전장의 상황은 체보르의 멸망과 동시에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장을 볼 줄 아는 이들의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길어봐야 반년 지금 전쟁 중인 국가는 그때즘 절반 이상이 소멸해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다 끝났소?”
엘릭의 물음에 아르민의 보급관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생각이 치미는 순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티리아였다·
“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이런 거래가 맞다 보오?!”
분명 저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이 제 입으로 말했다·
부인이 이 영지의 실권자라고·
그렇다면 매달려볼 곳은 그녀밖에 없다는 판단이었으나····
“···가주의 결정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따라야지요·”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리 답하고 있었다·
아르민의 보급관은 벌개진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그의 감정이 격해지고 있음은 흰자위로 올라온 핏대가 보여주고 있었다·
“흠 도착하자마자 일이 다 끝나버렸구료· 내 시골의 정취에 조금은 취하고 싶었는데·”
폴로의 말은 분명한 이죽거림이었다·
그에 답하는 엘릭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열차도 곧 끊길 시간입니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호의에 감사하오· 하나 전쟁 중인 나라의 군인으로서 개인의 안락을 위하는 것은 안 될 일이지· 막차를 타고 떠날 것이오·”
주거니 받거니 잘도 말이 오간다·
이대로 끝내선 안 되건만 상황을 바꿀 카드가 무엇도 없었다·
심지어 디샤의 보급관까지 체념의 기색을 띄워내며 동조하고 있었다·
“으음 정보가 부족했군· 이번은 우리의 패배요· 식사는 맛있었소· 우리도 오늘 중으로 떠나지·”
“이보시오!”
“아르민 거기까지 하지·”
덜컥―
아르민의 보급관은 몸을 떨었다·
디샤의 보급관이 보인 기색이 그리도 험악했다·
“길길이 날뛰는 것은 적당히 하시오· 디샤는 기사의 나라요· 우리는 명예를 중시하며 승패에 승복하는 것을 참된 군인의 자세로 배우고 있소·”
“나 나는····”
“기억하시오· 우리가 이리 마주보고도 칼을 뽑지 않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의 말은 실로 옳았다·
서로 전선이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전쟁이 심화되면 아르민과 디샤는 결국 칼을 맞대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도 두 사람이 서로의 목을 취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이곳은 타국이고 나라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타국에 와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정리된 것 같구려·”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감에도 아르민의 보급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 비명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
잘못되었다·
이리 일방적인 거래는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을진대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다·
‘대체···!’
짜고 친 듯 오늘 당장 떠나려는 두 보급관 사이에서 홀로 남아 매달리면 그 얼마나 추한 일이겠나·
추함을 넘어서 실례가 되어버린다·
외교관계를 생각하면 아르민의 대표가 되어 그런 일을 할 수 없음은 이미 자명하니 아르민의 보급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완패였다·
*
떠나는 세 보급관의 뒷모습을 보며 엘릭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목을 치고 싶은데·’
허수아비처럼 비쩍 마른 사내의 뒤통수가 참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앞서 나섰다간 티리아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하여 생각해낸 방책이 선동이었다·
폴로를 이용해 거래의 방향성을 뒤틀고 디샤의 보급관을 이용해 그 의견을 흐름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폴로가 수행했다·
아무튼 그런 이중작업을 위해 밀의 1할을 디샤 쪽으로 보내게 됐지만··· 포트먼의 영지 차원에서 그 부담이 있을 수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유통비의 부담은 제국이 지게 될 것이니 말이다·
“가주·”
티리아가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하신 일입니까?”
엘릭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으 음?”
왜 갑자기 화살이 이쪽으로 돌아오나 싶어 절로 당황이 떠오른다·
와중 티리아는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그러시군요·”
알만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엘릭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무 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잘····”
“제국과 연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폴로와의 대화를 엿들은 건가?
위기감이 몸을 휘감는 순간이었다·
“방랑 생활 중 제국의 인사와 교분을 나누시지 않으셨는지요? 저들의 호의를 설명할 길이 그것밖에 없어서·”
“아···!”
“아르민의 보급관께서는 당황한 탓에 눈치채지 못하신 듯하지만 제 눈에는 두 분께서 작당모의를 하는 듯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착각이라면 죄송합····”
“마 맞소! 내 사실 제국에 들렀을 적 그곳의 귀족분과 교분을 나눈 일이 있었소!”
엘릭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걸 이렇게 알아서 생각해줄 줄이야 변명을 떠올리기 위해 고생할 일이 없어져 다행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엘버스 그레이엄의 말이다·
-스스로의 유능함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추측에 매몰되는 때가 있다네· 갑작스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그것을 이해가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드러난 단서로 인과를 엮는 걸세· 그 경우 대체로 추측은 틀린다네· 나 역시 같은 경험이 있었지·
티리아의 유능함이 그녀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뭐가 됐든 엘릭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다음에 소개할 일이 있으면 좋겠구려·”
“으음 예· 일단은 들어가실까요·”
“알겠소·”
티리아가 먼저 저택으로 몸을 돌림에 엘릭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끝이군·’
정체를 들킬 위기는 무사히 넘어갔다·
이제 한동안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없으리라·
긴장이 풀리니 몸에 힘이 빠진다·
엘릭은 오늘따라 유독 쑤시는 무릎을 통통 두드리곤 그녀를 뒤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
폴로는 마히르 제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강철과 증기의 도시이자 이 대륙의 심장이라 불러 마땅한 거대한 땅·
그 거대한 성채의 위용에 위빈의 풍경이 한층 목가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길 잠시 이윽고 폴로는 품에서 쪽지를 꺼냈다·
‘이게 진짜 통할까?’
폴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쪽지는 카샤가 찢은 종이에 대충 휘갈긴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배달할 곳은 다름 아닌 그레이엄가의 저택·
수취인은 엘버스 그레이엄이었다·
폴로는 미심쩍음을 품은 채로 그레이엄가의 저택에 당도했다·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노템 백작가의 삼남 폴로라 하오· 엘버스 공을 만나고 싶어 왔소·”
“선약은 있으십니까?”
“없긴 한데 이게 참··· 급한 일이라·”
역시 안 되는 건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으음 따라오시지요· 오늘 일정이 없으시니 일단 여쭤는 보겠습니다·”
폴로는 이리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작게 경악했다·
사생아라곤 하나 제도의 유망주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인 중의 기인이 엘버스 그레이엄이 아니던가·
그런 그를 만나는 일이 무작정 찾아와서 요청하는 게 끝이라니·
혹시 이 모든 게 카샤와 엘버스 그레이엄이 짜고 친 농담 따위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직후였다·
“손님이라? 그것도 노템가에서?”
닫힌 응접실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음··· 뭐 좋네· 마침 무료했던 참이니 잘 되었어· 들여보내시게·”
5년 전과 변함없이 고운 미성이었다·
폴로는 문득 5년 전 연회에서의 일이 떠오름에 몸을 움츠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노템 영시··· 아니 보급관·”
문 너머에는 휠체어를 탄 사내가 있었다·
창에서부터 내리쬐는 역광 탓에 이목구비가 확실히 보이진 않았다·
그저 눈부신 백금발과 황금을 녹여 박은 듯한 금안·
그리고 중성적인 실루엣만이 폴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소?”
폴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랜만이오· 내 다름이 아니라··· 편지를 부탁받아서 말이오·”
그렇게 카샤의 편지가 엘버스 그레이엄에게 전해졌다·
빨리 용건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던 폴로는 많은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초조함 속에서 그가 들은 것은 하나였다·
“크핫···!”
웃음소리였다·
“이 친구가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이리 구석진 데서 휴양을 즐기고 있었군·”
고개를 든 폴로는 볼 수 있었다·
신비로운 미남자의 입가 위로 꼭 어린 소년들의 것과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