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1 귀향 (3)
엘릭의 이해를 벗어난 일이었다·
당연 떠오르는 생각들은 지난 10년간 그녀가 어찌 지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혼인이 무효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은 지난 10년간 이 여인이 자신의 부인으로써 포트먼의 저택에 살았다는 뜻이다·
남편 없이 그 긴 세월을 기약도 없는 기다림을 이어왔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도 의문이건만 당장은 그런 의문을 덮어버릴 정도의 더 큰 의문이 있었다·
“일단 들어가지요·”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오?
신혼 첫날 밤 도망간 남편을 본 첫 마디가 겨우 그것이오?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어지진 않았다·
도망쳤다 돌아온 주제에 묻기엔 너무 실례되는 말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 질문은 무슨 이유로든 자신을 기다려야 했던 여인을 조롱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엘릭은 흘금 티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평온한 상태로 보였으며 몸을 돌려 옮기는 걸음걸이는 너무 곧았다·
순간 차오르는 것은 10년 전 느꼈던 수치심이었다·
이런 감정을 이제와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건만 몸도 마음도 휘청거리는 꼴이 그녀와 극명히 대비됨에 자연히 부끄러운 맘이 샘솟는 것이었다·
“안 가십니까?”
“···아 가겠소·”
애써 웃음을 지어봤으나 필시 자연스러운 꼴은 아닐 터였다·
툭 지팡이를 짚어 절뚝거리는 걸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함에도 불편한 몸이 되어 있으니 걸음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는 직전보다 확연히 느려진 걸음으로 속도를 맞춰주기 시작했다·
두어 걸음 앞서 걷는 탓에 그녀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리감이 어색함을 불러일으켰다·
엘릭은 스스로의 박동에 집중했다·
‘날뛰지는··· 않는구나·’
그때처럼 어떤 면에서는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진 부인을 보고서도 소년일 적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지지는 않았다·
성장인지 마모인지 모를 일이었다·
뭐가 되었든 바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 일말의 평온은 곧 어색함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밀밭엔 어찌 들어가 계셨소·”
그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마찬가지로 평온을 가장했다·
“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지요· 곧 수확철이지 않던가요·”
“아 직접 말이오?”
“예·”
그것이 끝이었다·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직전보다 더욱 침묵이 무거워짐에 엘릭은 스스로의 만용을 질책했다·
‘이런····’
차라리 입이라도 꾹 다물고 있었다면 이만큼 어색하진 않았을 텐데·
노을에 타오르는 밀밭을 걷는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엘릭은 차라리 전장에서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면 잡다한 걱정이 들진 않으니 말이다·
그런 불편함이 한참이나 이어지던 중이었다·
기차에서의 일주일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부지런히 일을 해줬다·
그때보다 더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엘릭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계시지요· 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티리아는 그리 말하고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크게 호흡을 가다듬은 엘릭은 뒤늦게 저택을 올려다봤다·
마당의 분수대가 자랑거리인 3층짜리 벽돌 건물이 그전까지의 걱정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아····”
그대로구나·
티리아와 관련된 불편함이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역시 추억이었다·
10년이나 이곳을 떠나있었음에도 이 저택의 계단이 몇 개고 방은 어떤 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어떤 자리에 어떤 얼룩이 있는지까지 모든 것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엘릭의 입가에 지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으음? 누구시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엘릭은 그곳을 돌아보곤 눈을 크게 떴다·
까만 턱시도를 잘 차려입은 희끄무레한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세월에 따라 주름이 깊어졌지만 그럼에도 엘릭은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길이 엇갈렸나 보구나·’
아무래도 티리아와 방향이 엇갈려 이리 마주하게 된 듯하다·
집사였다· 집사 알디오 싸늘하기 그지없었던 부친 대신 그 역할을 해준 엘릭의 가장 든든했던 우군이 눈앞에 있었다·
엘릭은 재회에 가슴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그런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날 못 알아보겠나?”
알디오의 눈이 좁아졌다·
직후 천천히 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경계한 듯 주름을 진하게 만들다 이내 멍하게 입을 벌렸고 그 끝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도 도련님!”
알디오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엘릭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련님! 도련님이 맞으십니까!”
늙은 목소리에 온갖가지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반가움 안타까움 슬픔과 희열·
그리 격렬한 반응이 또 감정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엘릭은 자유로운 한쪽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오랜만일세· 내가 돌아왔네·”
노인의 떨림에 엘릭은 포근함을 느꼈다·
*
알디오가 진정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가슴을 쿵쿵 치며 숨을 되찾던 그는 이제 완전히 맑아진 얼굴로 말했다·
“하마터면 못 알아뵐 뻔했습니다· 이리 달라지셨다니요!”
엘릭은 쿡쿡 웃었다·
하기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사내 티도 제대로 내지 못했던 소년 시절이다·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지·
단순히 큰 거면 말도 안 한다·
엘릭이 살아온 지난 10년이 얼마나 험악했던가·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를 악 물고 마나를 수련해야 했었다·
반동으로 골격이 커졌다· 몸은 말라깽이던 과거와 달리 다부져졌고 무엇보다 눈동자가 마나의 영향을 받아 검붉게 눌어붙어버렸다·
10년 전의 모습만 아는 사람들로선 단번에 그를 알아보는 게 쉽진 않으리란 말이다·
“꽤 많이 바뀌긴 했지· 자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는····”
순간
멈칫―
엘릭의 말이 멎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알디오의 물음에도 엘릭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스스로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닫게 된 기이한 점이 있는 까닭이다·
엘릭의 시선이 저택을 향했다·
정확히는 직전 티리아가 들어갔던 저택 입구를 향했다·
‘···한 번에 알아보지 않았나?’
그녀는 별달리 정체에 관한 티를 낸 일은 없음에도 자신을 단번에 알아봤었다·
실제로 얼굴을 본 것은 혼인식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음에도 말이다·
대체 어떻게 살아생전 한 번 본 소년을 이리 달라진 모습임에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점이 엘릭의 속에 의구심을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저 눈썰미가 좋은 걸 수도 있겠지·
엘릭은 목을 쓸며 생각을 털어냈다·
*
티리아는 창문 너머로 집사와 대화하는 엘릭을 바라봤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평생을 기약한 사내의 얼굴인데·
갈색 머리칼이나 나른한 인상 오똑하게 솟은 콧대나 귓불 옆의 상처는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형태였다·
아직도 티리아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밀밭을 살피다 나오니 갑작스레 그가 서 있기에 깜짝 놀란 게 아니겠나·
부디 당황한 것이 티 나지 않길 바라며 평온을 가장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색한 면이 있던 듯했다·
제발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조금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어 티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하며 실수한 것은 없는지 재회의 순간을 되새기던 중이었다·
-어째서····
흠칫 그의 말이 떠오른 순간 티리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술 또한 꾹 다물렸고 시선은 창밖에서 환히 웃는 엘릭을 향했다·
자신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다·
그는 함께 걷던 내도록 불편한 침묵만을 자아냈었다·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라 재회하기 전··· 떠나는 날도 그랬다·
혼인식 내도록 그의 입꼬리는 노골적으로 아래를 향해 있었다·
마침내 반지를 끼우는 순간에는 인상을 가득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것이 슬퍼 홀로 울었다· 하나 정말 그녀를 슬프게 하는 일은 뒤이어 일어났다·
그날 밤 엘릭은 저택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 속이 답답해진다·
손으로 가슴 위를 꾹꾹 눌러봤으나 나아지는 일 따윈 없었다·
반가움은 잠시였다· 이어 드리워지는 것은 현실이다·
10년이 지나 돌아온 그의 기색은 역시 티리아의 바람과는 다른 형태였다·
마치 이곳에 자신이 없기를 바란 듯한 의문·
절대 보여주지 않던 밝은 미소와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던 태도·
티리아의 입가에 씁쓸함이 가득 담긴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이리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에게 자신은 흡족하지 않은 혼인 상대인 듯하다고·
그 사실이 아팠다·
그리고 그런 사실보다 더 아픈 것은 그를 놓지 못하는 미래일 것이었다·
지난 10년을 그랬듯 티리아는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는 날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갈 터였다·
어쩌면 지금까지보다 더 힘든 시간이 펼쳐질지도 모르지·
이젠 그가 웃으며 돌아와 안아주리란 믿음조차 깨져버렸으니 말이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