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 #6 간병 (3)
엘릭이 서류를 보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티리아는 가만 그 모습을 지켜봤다·
흘긋 보기론 올해 연말 결산과 관련된 서류다·
결산인 만큼 전체적으로 추려져 있는 서류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 중요성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티리아는 문득 불안해졌다·
엘릭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일에 서투른 그가 숫자 하나를 실수하면 그 수습은 몇 배로 힘들어지지 않겠나·
한 번 할 일을 여러 번에 걸쳐서 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차오르는 불안에 티리아의 몸은 점점 엘릭이 있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어허! 내가 알아서 하겠소!”
엘릭이 팔로 서류를 가렸다·
꼭 식탁에서 반찬을 숨기려는 아이 같았다·
커다란 덩치에 성인 남성의 굵은 선이 확실한 외모임에도 그렇게만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결산은 아직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간 배운 게 있는데 요령껏 해보겠소!”
“자신이 있으신지요?”
긁는 듯한 말투는 교육에 임할 때면 티리아가 자주 보이는 종류였다·
그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성향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묘한 아우라가 가득했다·
엘릭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티리아는 눈을 좁혔다·
“일을 미뤄두어도 괜찮습니다· 속도가 느린 것도 괜찮습니다· 하나 실수는 곤란합니다· 중요한 서류이니·”
“그 그것은····”
“자신 있느냐 물었습니다·”
엘릭은 차마 그렇다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나 완전한 포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안 되오· 일단 내가 해보고 모르는 부분만 묻는 방향으로 하지· 부인께선 안정이 필요하오·”
티리아가 우뚝 멎었다·
‘또····’
부인이라 불러주는구나·
이런 것 하나하나에 감동받아 마음이 약해지니 더 엘릭을 다그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티리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꼭 물어보셔야 합니다·”
“알겠소!”
엘릭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서류로 시선을 향했고
“···그럼 일단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곧장 질문을 시작했다·
티리아는 참 많은 말이 하고 싶으나 엘릭의 기를 세워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 질문은 참았다·
하나 답을 준 지 오 분 만에 또 다른 질문을 이어가는 행태가 한 시간 동안 이어지니 그 일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티리아는 결국 물었다·
“이럴 거면 그냥 제가····”
“어허!”
“····”
저놈의 똥고집을 어찌해야 할까·
티리아는 생각이 많아졌다·
*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엘릭은 차츰 홀로 일하는데 익숙해져 갔다·
그 며칠간 티리아가 한 일이라곤 점점 빈도가 줄어드는 질문에 답해주거나 창밖을 보는 척하며 엘릭을 흘금댄 것이 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릭이 다른 일은 다 금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일화 몇 개를 끌어오면 그랬다·
“책이라도 읽고 싶····”
“안 되오· 글자를 보면 머리가 아파지지 않겠소·”
취미가 독서라 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럼 자수는····”
“집중력을 소모하면 머리가 아파질 것이오·”
심심풀이로 하던 자수도 금지당했다·
“잠시 바깥 바람이라도····”
“감기가 심해지길 바라는 것이오?”
대체 바람 몇 분 쐰다고 감기가 심해진다는 건 무슨 발상인지 그조차 금지당했다·
티리아가 이제야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엘릭이 자신을 툭 건들면 깨질 유리 세공품 따위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걱정해주는 것은 좋지만 마냥 돌봐야할 사람으로 여겨지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보다 본인부터가 애처럼 구는 면이 있으면서 누굴 애로 보는 건가 싶어진다·
엘릭의 행태에 참 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결론만 말하면 티리아는 그 어느 것도 내뱉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나쁜 것만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상황이 그랬다·
“이제 슬슬 열이 떨어지고 있구려·”
그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자신을 위한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젠가는 꿈같은 일로 여겼고 또 언젠가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남에 행복이 잔잔하게 몸을 감싸온다·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담고 있는 것을 확인할 때면 찌릿함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그럴 때면 티리아는 풀려버리려는 표정을 다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손이 붙어있는 동안은 그런 곤욕을 내내 참아야 했는데 그러면서도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이중성을 보이니 스스로의 우둔함에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짐은 그리도 만족스러웠다·
“몸 상태는 어떻소?”
“이제 일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되오·”
“저는····”
“쉬시오·”
엘릭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윽고 그가 내뱉는 말은 참으로 달콤했다·
“부인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요즘만큼 깨닫는 순간이 없소· 내 죄스러운 마음도 있소· 그래서 이러는 것이오· 내 나름의 사죄로 봐주시오·”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 죄스러운 마음뿐입니까·
그 외에 저를 향한 다른 감정은 없으십니까·
왜 제게 그리 따뜻하게 웃어주십니까·
하나하나 지어보고 이내 지워낸다·
부끄러운 말 대신 내뱉은 것은 조금은 딱딱한 말이었다·
“그럼 이제 책 정도는 읽게 해주시지요·”
“으음··· 어려운 것만 아니라면 좋소· 뭘 읽고 싶으시오?”
“책장 위에서 두 번째 줄에 갈색 커버로 된 책이 있습니다· 꺼내주십시오·”
엘릭이 책을 꺼내왔다·
“식물 백과구려·”
“예·”
티리아는 책을 받아 커버를 쓸었다·
18년이 넘게 보고 있는 책이라 곳곳이 손때로 가득했다·
“으음 너무 오래 보진 마시오· 슬슬 잘 시간이니·”
그의 말대로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티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들어가 주무시지요· 저는 조금만 보다 자겠습니다·”
“그리하지· 내일 봅시다·”
엘릭이 방을 나선 후에야 티리아는 책을 펼쳤다·
어딜 펴도 아는 내용이라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아는 내용을 왜 또 보는 것이냐 묻는다면 티리아가 할 답은 하나였다·
내용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처음 읽은 순간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모르면 공부해!
그녀는 차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삶이었다·
지금까지도 대체로 싫은 일만 가득한 삶이지만 8살의 티리아는 정말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불행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작은 세계인 위빈이 너무나도 날 선 곳이었던 까닭이다·
그 시절의 위빈을 되새겨보라면 티리아가 떠올리는 것은 하나였다·
짜악!
“이것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체벌·
“분명 오늘까지 숙지해오라 일렀습니다· 위빈 영애 정말 열심히 한 것이 맞습니까?!”
티리아는 그 시절 위빈을 체벌로 기억했다·
“종아리를 대세요!”
“···네·”
티리아는 홀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예절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이 방면으로 유명한 백작부인이었으며 부모는 그녀를 부르기 위해 아주 많은 돈을 지불한 만큼 티리아가 그 값을 해내길 바랐다·
티리아가 아직도 기억하는 부친의 말이 있었다·
“귀족으로서 품위를 갖추거라·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 위해선 절대 책을 잡혀선 안 되는 법이란다·”
티리아는 왜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야 하는지 몰랐다·
왜 밥을 먹을 때 입을 크게 벌리면 안 되는지 몰랐고 왜 걸음걸이를 신경 써야 하는지 몰랐고 왜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되는지 몰랐다·
그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말을 들었기에 그게 당연한 줄로 알았다·
그 나날이 학대였다는 걸 깨달은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으니 당시의 티리아가 어찌했는지는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죄송해요····”
티리아는 언제나 사과해야 했다·
입술에 음식을 묻힌 걸로 사과해야 했고 뛰어다닌 일로 사과해야 했고 아침에 꾸벅꾸벅 존 것으로 밤에 바로 잠들지 않은 것으로 사과해야 했다·
그날도 그랬다·
티리아는 백작 부인의 예절 교육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고 종아리를 맞는 체벌을 받았다·
평소와 달랐던 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영애의 진도가 느리군요·”
백작 부인은 부모에게 수업 진도가 또래보다 더디다며 불만을 토로했고 그것이 부모의 자존심을 긁었다·
하필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와중에도 백작 부인에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얄팍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건은 백작부인이 돌아간 이후에 일어났다·
“겨우 그것도 못해! 우리가 이렇게까지 투자하는데!!!”
짜악!
티리아는 8살에 처음으로 얼굴을 맞았다·
한두 대도 아니었다·
기억하는 것만 적어도 열 대 이상이었다·
“왜! 왜 우리 마음을 모르느냐!”
뺨을 올려붙이는 손길은 우악스러웠고 목소리는 사나웠으며 커다란 덩치는 위압적이었다·
티리아는 언제나처럼 사과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울며 매달려봐도 포악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티리아의 얼굴은 찐빵처럼 부풀어 올라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그날 밤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지새웠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택 외부로의 출입은 절대 안 된다는 엄명을 깨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간 것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어서였겠지·
“흐으으····”
티리아는 회초리에 부어오른 종아리로 절뚝거리며 저택을 나섰다·
푸르게 멍들어 찐빵이 된 얼굴로 울며 거리로 나갔다·
엘릭은 딱 그날 만난 사내아이였다·
“뭐야 이 못생긴 애는?”
지금에야 그를 향한 연심 속에 매일을 끙끙대며 살지만
“와··· 사람이 이렇게도 생길 수가 있구나?”
돌이켜 보면 엘릭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