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 #8 수도행 (1)
그날은 엘릭이 지독한 악몽 속에서 헤맸던 날이었다·
다르게는 티리아의 열이 완전히 내려앉아 그녀가 집무실로 복귀한 날이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서부 전장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고 그것들을 아울러 한 해의 끝이 성큼 다가온 날이었다·
“3개의 왕국이 더 멸망했군요·”
서부 월간지를 읽던 티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 짧은 날 중 벌써 3개의 왕국이 더 멸망의 길을 걸었다·
하나 같이 7강을 보유하지 못했던 왕국이었고 이제 전장은 다섯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만이 남아 씨름하는 구도가 되었다·
“슬슬 구도가 고착화하지 않을는지요·”
라는 티리아의 질문에 엘릭은 날카롭게 답했다·
“더 격렬해지겠지·”
“예?”
“아····”
뒤늦게 엘릭은 정신을 일깨웠다·
꿈자리가 사나웠던 게 문제인지 기분이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다·
근래 들어 잦아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정신을 헤집어 생활을 주니 원·
엘릭은 머쓱하게 웃으며 부연 설명을 더 했다·
“미안하오· 이제 쉬운 전쟁은 갔으니 앞으로의 전쟁은 더욱 격렬하게 서로를 물어뜯는 양상이 될 것이란 말이었소·”
“쉬운··· 말입니까?”
“그렇소· 이제껏 멸망한 왕국들은 강자를 보유하지 않은 왕국이 아니오? 그것들이 끝났으니 남은 것은 강자들의 싸움 그러니 전장은 더 격렬해질 것 아니겠소·”
“개인이 전쟁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준단 말입니까?”
“염화 이그렛의 기사만 봐도 알지 않소· 전장은 결국 소수의 강자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법이오·”
우습지만 사실이었다·
화약과 증기가 발명되고 연구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더 이상 개인의 무력이 전장을 움직일 수 없을 것임을 말했다·
하나 막상 일어난 서부 전쟁은 어땠는가·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지팡이에 새긴 주문 하나와 초인이 휘두른 검 한 번이다·
그러니 이제까지가 ‘쉬운 전쟁’인 것이다·
강자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와의 전투는 차라리 일방적 학살이라 말하는 게 더욱 편했다·
엘릭의 말에 티리아는 영 못 미더운 눈치를 보였다·
나오는 말 또한 그런 기색을 담고 있었다·
“설령 그 말이 맞다 한들 강자들끼리 전투라면 더 신중해지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지금보다 급박해지는 그림은 잘 상상되지 않습니다·”
그럴싸한 의문이었다·
물론 정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강자들의 상성 때문이오·”
이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엘릭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렴 본인부터가 그 7강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던가·
“염화는 천익을 뚫을 수 없소· 천익은 마왕을 뚫을 수 없소· 마왕은 성자를 뚫을 수 없고 성자는 금공을 뚫을 수 없소·”
금공을 말하는 순간 엘릭은 손으로 무릎을 쓸었다·
씁쓸한 미소가 함께였다·
“결국 도미노 같은 것이오· 지금의 상황에서 누구 하나가 균형을 깨버리면 전장은 삽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겠지·”
가령 강자들 중 둘이 일시적 동맹을 맺고 하나의 목을 쳐버리면 그 순간 전쟁이 끝이다·
남은 전쟁은 계절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어느 한쪽의 승기를 들어주게 될 것이란 말이다·
휴전은 있을 수 없었다·
전장은 서부 땅에 하나의 나라만이 남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년 간 패여 온 국가 간의 골은 합의의 선에서 멈출 수 있는 지경을 넘어있었다·
설명을 끝마친 엘릭은 목을 쓸었다·
‘음 너무 아는 척을 했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어 엘릭은 티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더니 이내 그런 질문을 건네왔다·
“그럼 검귀 카샤는 어떻습니까?”
흠칫 엘릭의 손끝이 떨렸다·
“거 검귀 말이오?”
“예 가주의 말씀대로라면 검귀도 상성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하····”
어떻게 말해도 본인 얼굴에 금칠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엘릭은 머쓱함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없소·”
“예?”
“검귀는 상성이 없소· 상성보단 상황을 따지오· 양 군대의 전력 차 당시의 날씨와 지형과 그 외의 여러 요소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면 이해하겠소?”
무릎이 다친 것도 결국 그런 일의 연장이었다·
지독하리만치 큰 병력의 열세·
홀로 천 단위의 군대를 막아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들이 두른 무장은 금공의 손아귀에서 태어난 것들이었다·
하필 언덕 위에서 돌격해오는 적들이었고 그날 바람 또한 그들의 편을 들어줬으니 어찌 멀쩡히 그곳을 나올 수 있었겠는가·
사실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엘릭은 그날보다 더 완벽하게 수성할 자신이 없었다·
“여하튼 필요치 않은 이야기지· 검귀는 더 이상 전장에 나타나지 않으니 말이오·”
화제를 돌리려는 순간 엘릭은 티리아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은 듯 강렬하게 쏘아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엘릭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혹시 의심의 건덕지를 준 것인가?
아니 카샤의 실종을 말했다고 곧장 의심해온다면 그건 추측하는 쪽이 과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리고 엘릭이 보기엔 티리아는 그런 과대 망상증 환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왜 왜 그러시오···?”
조심스레 물으니 티리아가 답했다·
“상황에 관한 것은 영 언급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도 7강인데·”
“아 아하!”
엘릭은 안도를 띄워 올리며 말했다·
“상황의 상성은 모를 수밖에! 그는 20년 전 전쟁을 일으킨 후 그대로 침묵하지 않았소? 다른 7강과 싸운 전례가 없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전대 제국의 황제·
그는 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전선을 물러나 지금까지도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엘릭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건 10년 전 그리고 강자로서 이름을 날린 건 5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아 아무튼!”
엘릭은 말을 줄였다·
“강자들의 상성 얘기가 우리랑 무에 상관이 있겠소· 거긴 대륙 반대편이 아니오?”
“···하기야 그렇습니다· 거래 철도 다 지났으니·”
티리아는 금방 수긍의 뜻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그제야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어휴 이놈의 입 좀 조심해야 할 텐데·’
아는 내용이 나왔다고 그새 아는 척이나 해버리다니 자칫 잘못하면 의심의 싹을 심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조심하고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엘릭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
그렇게 평화로운 한 때를 지낼 때였다·
전장의 소식에 언쟁을 펼치는 일이 아니면 고작 누구 집의 소가 송아지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는 게 가장 큰 기삿거리가 될 정도로 위빈은 평화로웠다·
엘릭과 티리아의 관계도 그랬다·
여타 일을 처리할 때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으나 이따금씩 침묵이 감돌면 간질간질한 기색이 맺혀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불편한데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묘한 침묵이었고 그런 것이 오늘도 두 사람이 있는 집무실을 가득 메우던 중이었다·
“왕성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정적을 깬 것은 알디오가 가져온 편지였다·
백색의 봉투에는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것을 내미는 알디오의 태도는 극진하기 그지없었다·
엘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성에서?”
“아 신년 연회와 관련된 편지일 것입니다·”
티리아의 답에 엘릭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연회?”
“곧 새해가 밝지 않습니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연회인 만큼 모든 귀족의 참석을 권하는 것이지요·”
엘릭은 그제야 어느정도 납득의 뜻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문은 있었다·
“꼭 가야 하는 것이오?”
영 내키지 않았다·
페르딘이 서부 전장과는 한창 떨어진 한미한 왕국인 만큼 당장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의 모든 귀족이 모인다 하면 사사로운 시비에 휘말릴 수 있고 거기서 까딱 성질을 참지 못했다간 주변의 이목을 끌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누군가가 자신의 행적을 조사하다 카샤의 이름에까지 닿을 수 있단 말이다·
할 수 있다면 빠지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으나
“불가합니다· 권고라곤 했으나 사실상 명령에 가까우니·”
티리아는 완고했다·
“연회의 탈을 쓰고 있다곤 하나 이는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아주 기본적인 출석 행사에 가깝습니다· 괜히 빠졌다간 왕실의 눈밖에 나기 십상이지요·”
“으음····”
“영 싫으시다면 저 홀로라도 다녀올 수밖에요·”
엘릭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작년엔 어찌하셨소?”
“저 홀로 다녀왔습니다· 전 가주께서 타계하신 이후 첫 연회였던 만큼 이목이 끌렸지요·”
압박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아니 엘릭은 답은 알고 있었다·
그보다 그녀가 홀로 수도에 간다는 말을 들으니 왜인지 거부감이 들었다·
미안함을 떼어놓고 생각해도 그저 그녀에게 쏠릴 이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엘릭 스스로도 잘 몰랐다·
“···가도록 하지·”
욱하는 기분에 답했다·
티리아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럼 마차를 준비시켜야겠군요· 짐도 챙겨야 할 테고·”
“음? 기차를 타지 않고?”
“예?”
두 사람의 의문에 찬 시선이 교차했다·
엘릭이 고개를 갸웃하니 티리아가 말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태도에 엘릭은 탄식을 흘렸다·
언젠가 엘버스 그레이엄에게 그녀와 같은 인종에 관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혹시 자네는 문명 공포증을 앓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은 모든 요소에 불안감을 띠는 사람 말일세· 내 얼마 전에 꼭 그런 사람을 본 일이 있던 게 아닌가· 뭐라더라 기차는 속도가 너무 빨라 비상시에 뛰어내릴 수 없어 불안하다던가?
‘아 진짜 있었구나·’
아날로그만이 유일하고 안전한 진리라 여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 엘릭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차로 하지요· 혹여 기차에 탔다가 변을 당한다면 미처 대처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또한 기차에는 호위를 많이 대동할 수 없습니다· 몸을 지키는데 용이하지 않지요·”
과연 시골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조곤조곤 말하고 있으나 왜인지 그게 잔뜩 겁을 먹은 것으로 보였다·
어딜 봐도 구시대적인 위빈에 사니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마침내 엘릭에게 드리워진 것이다·
영 새로운 면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