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 #9 수도 (1)
기차에서 내렸을 땐 이미 밤 그늘이 하늘을 다 뒤덮고 있었다·
하나 위빈과 다른 점이라면 가로등이었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두컴컴한 탓에 누구도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게 위빈의 일이었는데 이곳은 간격을 두고 불을 밝히는 가로등 덕에 아직 밖을 나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엘릭으로선 참 반가운 풍경이었다·
그가 주 무대로 삼던 서부는 이런 가로등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았으니 새삼스러움과 동시에 익숙함이 몸에 자리한 것이다·
“바로 마차를 수배했습니다· 가시지요·”
뒤늦게 내린 알디오가 엘릭과 티리아를 안내했다·
역을 빠져나가니 과연 역 앞으로 마차들이 열을 맞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릭은 개중 알디오가 소개한 마차에 올라타며 티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맨땅을 밟으니 이제야 엘릭이 알던 모습이 나왔다·
“괜찮소?”
“조금 피곤하군요·”
기차 안에서의 일이 떠오른 걸까·
티리아의 목소리에서 머쓱함이 느껴졌다·
쿡쿡 웃으며 응대하길 잠시 마차가 출발했고 왕도를 달렸다·
“부인께선 이곳을 해마다 찾으신 것이오?”
“예 전 가주님과 신년 연회가 있을 때마다 왔습니다·”
“그럼 그렇게까지 낯설지는 않겠구려·”
“어느 정도 지리를 익힐 정도는 되었습니다· 하나 역시 위빈과는 너무 다른 곳이라 어색함이 일긴 합니다·”
그런 잡담이나 하며 20분 정도를 달리니 예의 저택이었다·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딱 그 인간 취향이군·’
저택은 작았다·
화려함보단 단정함을 추구하는 2층짜리 벽돌집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엔 귀족의 저택이라기보단 부유한 평민의 가정집 같은 생김새였다·
막상 들어간 내부도 그랬다·
1층엔 넓직한 거실과 옆으로 식당과 부엌 2층으로 올라가니 침실 두 개와 드레스룸 두 개 그리고 서재 하나가 끝이었다·
“일단 짐부터 풀도록 하지· 부인 저녁 식사 때 봅시다·”
“예·”
시간이 애매하여 기차에선 저녁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간단한 식사를 저택에서 하게 됐고 엘릭은 그 사실을 되새기며 방에 들어갔다·
달칵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침실이었나 보군·”
“예 아무래도 빈 방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집인지라·”
알디오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엘릭은 쓰게 웃었다·
이젠 그에 관한 감정을 다 털어낸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 부친의 흔적을 보는 순간 마음이 잔잔하게 찰랑였다·
“딱 봐도 알겠어· 아 아버지 방이구나· 하는 걸 말일세·”
침대 하나 작은 책장과 옷걸이·
그리 작지 않은 방임에도 들어차 있는 물건은 그게 끝이었다·
심지어 인테리어 마저도 단촐했다·
검은색 원목을 이용한 물건이었다·
부친은 이런 정갈한 물품을 좋아하여 그의 방에 들어갈 때면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겨오곤 했다·
“미리 연락을 넣어 청소는 끝마친 상태입니다· 바로 쓰셔도 아무 문제가 없을 테지요·”
“알겠네·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싶으니 잠시 나가주겠나?”
“···예 식당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디오가 방을 나섰다·
엘릭은 잠시 방을 둘러보다 창문을 열고 방을 환기시켰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대충 걸었다·
이후 넥타이까지 푸니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나무 냄새가 좀 빠졌으면 좋겠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좀처럼 기껍지 않았다·
-나가라· 놀아줄 시간은 없다·
그런 말이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방 구조 이러한 냄새와 살풍경한 구조가 괜한 감상을 떠오르게 했다·
엘릭은 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은 그대로인가·’
그가 좋아하던 여러 고전이 엘릭이 기억하는 순서대로 꼽혀 있었다·
별안간 묘한 강박이 있던 사람이라 이런 점에 꽤나 빡빡하게 굴던 것이 떠올랐다·
엘릭은 책장을 뒤적이다 이내 그 일을 그만뒀다·
‘일기 같은 건 없군·’
궁금증이 있었다·
부친이 왜 그의 모든 사업체를 정리한 유산을 자신에게 주었던 것인지·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지 않으셨습니까·”
중얼거리며 엘릭은 원망스레 책장을 바라봤다·
혼자만의 망상이라고 하기엔 이 집의 구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돌아올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큰 집을 구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위한 방을 빼두었을 것이다·
참으로 미웠지만 그럼에도 피붙이기에 아는 게 있었다·
엘릭 본인이 고집불통이었던 것처럼 부친 또한 그랬다는 것이다·
그는 엘릭이 돌아올 것이란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괜히 사람 속이나 심란해지게·”
곁에서 고생한 티리아에게 유산을 다 물려줬어도 그만인 일 아닌가·
엘릭은 품속의 날 죽은 단도를 매만졌다·
그러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마침 잘 됐어·’
수도까지 온 김에 유산의 처리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왕국의 법도상 유산의 상속은 지정된 상속인에게 온전히 귀속되는 면이 있어 그 상속인을 바꾸기 위해선 여러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하는 게 좋았다·
알디오나 다른 하인들에게 맡기기엔 그들에게 또 떠나겠다는 의중을 전하기가 미안하지 않던가·
엘릭은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는 순간 마침 방을 나서던 티리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얇은 드레스 위로 숄을 두르고 있었다·
평소보다 여린 몸이 더 잘 드러나는 꼴이라 엘릭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조금 곤란해졌다·
처음 이런 꼴을 보는 것도 아닌데 공간이 공간이라 그런지 낯설기만 했다·
“···오셨구려· 어서 가지·”
“예·”
식당으로 향하니 빵과 스프 계란 그리고 물이 놓여 있었다·
지극히 간단하여 빨리 해치우기 좋은 것들이었다·
빵을 한 입 뜯어먹은 엘릭은 티리아에게 물었다·
“내일 일정이 어찌 되오?”
“사흘 뒤가 연회이니 전까지는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옷부터 사야겠지요·”
“옷이라?”
“예 가주께선 연회에 입을 옷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구나·
엘릭의 옷장에 있는 것은 근처를 나돌아다닐 때나 입는 기성복 정장이 끝이었다·
연회엔 어울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한 번 참여해본 제국 연회 때는 그 엘버스 그레이엄조차 옷차림에 예민하게 굴었었다·
-뭐 하나 트집 잡지 못해 안달 난 인종들이 모인 게 귀족들의 연회네· 괜한 가십거리는 던져주지 않는 게 좋다네·
확실히 티리아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면 복장 정도는 신경 쓰는 게 좋을 듯했다·
“좋구려· 내 연회복 쪽은 좀 식견이 있소· 남부끄럽지 않은 꼴로 나가 보이겠소·”
“제가 골라드리겠습니다·”
“음?”
“제가 고르겠습니다·”
그녀가 갑작스레 완고함을 내비쳤다·
시선은 음식을 향한 채였다· 협상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강경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왜 저러나 싶던 엘릭은 그제야 지난 일을 떠올렸다·
위빈으로 돌아와 그녀와 첫 외출을 하던 날 입었던 의상· 그때 그녀와 알디오의 반응·
‘···이제는 안 그럴 텐데·’
엘릭도 이제는 그 복장이 광대나 할 법하다는 걸 알았다·
하나 이런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단 변명하는 일부터가 추해보였다·
엘릭은 얌전히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부탁하겠소·”
말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식사는 빠르게 끝이 났고 엘릭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 잘 준비를 마쳤다·
내일부턴 또 바삐 움직여야겠구나·
엘릭은 영 성미에 안 맞는 일을 하려니 좀이 쑤시는 기분을 느꼈다·
연회만 끝나면 곧장 위빈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며 풀썩 침대에 몸을 뉘이는 순간이었다·
쿠당탕!
“윽!”
침대가 무너졌다·
굴러 떨어진 엘릭은 황망한 얼굴로 침대를 바라봤다·
그 순간 다급하게 달려온 알디오가 방문을 열었다·
“도 도련님! 이게 대체 무슨···!”
“···침대 다리가 부러져 있었군·”
엘릭은 손가락으로 침대 다리를 가리켰다·
이불에 가려져 있던 게 바로 드러나 있었다·
똑 부러져 있는 다리를 끈으로 동여매 지탱해둔 흔적이 있었다·
알디오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이 이것들이 진짜···!”
외부의 업체에 청소를 맡겼다고 했던가·
“제가 내일 당장 그놈들에게 따지러 가겠습니다! 이리 허투루 청소를 해두고 그 비싼 돈을 다 받아 처먹다니!”
엘릭은 어색하게 웃었다·
알디오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것은 또 오랜만에 보는 일이었다·
“그래 일단 이것부터 좀 치워주겠나? 쓰러진 침대에서 잘 수는 없으니 말일세·”
말하는 순간 문 뒤로 티리아가 나타났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침대가 부러졌군요·”
“아 신경 쓰지 마시오· 이렇게 된 거 내일 새 침대도 하나 사야겠소·”
“그럼 오늘은 어찌 주무시려고 합니까?”
“어찌하긴 바닥에서 자야지·”
“바닥에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엘릭을 바라봤다·
그제야 엘릭도 아차 싶었다·
태생이 귀족인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보일 만한 반응이었다·
“그 방랑 생활동안 여러 번 해본 일이 있소· 그러니까 크게 걱정은····”
“그건 방랑 간의 일이지요·”
티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
“집사 업체에 가기 전 내게 들렀다 가시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낼 터이니·”
“···예 마님·”
알디오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엘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그 기색이 사뭇 위압감 넘쳤다·
“그리고 가주·”
“마 말하시오·”
티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이 잠시 달싹였다·
머뭇거림이 찰나 이후로 천천히·
“···오늘은 제 방에서 함께 주무시지요·”
“···?”
엘릭은 들려온 말에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티리아가 돌아섰다·
“어서 오십시오·”
엘릭은 알디오를 바라봤다·
알디오도 엘릭을 바라봤다·
“?”
“?”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기울었다·
하나같이 멍청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