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 #9 수도 (4)
치수를 재는 마담의 손이 덜덜 떨렸다·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역시 씁쓸했다·
아직 칼질에 서툴던 시기에 전신에 새겨진 상처다·
비단 칼자국만 있는 것도 아니다·
화상과 총상 따위로 피부 위가 짓물러 원래 형상을 잃은 곳도 더러 존재했으니 전신의 흉은 엘릭이 봐도 꽤 끔찍한 면이 있었다·
자연히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부인에겐 보여줄 게 못 되겠군·’
하고 그녀의 놀란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엘릭은 흠칫했다·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애초에 보여줄 일이 무에 있겠나·
괜히 상스러운 잡념에 빠진 듯하여 엘릭은 금방 생각을 털어낼 수 있었다·
“다 다 됐어요!”
마담이 애써 호호 웃으며 치수 표기를 마쳤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엘릭은 싱긋 웃으며 셔츠를 갖춰 입었다·
“고맙소· 이제 또 무엇을 해야 하오?”
“원단과 디자인을 보러 가시죠! 역시 옷이란 것은 입는 사람의 취향이 가장 중요한 법 아니겠어요?”
“그것도 그렇지· 어서 가봅시다·”
그리 작업실을 나서니 티리아가 소파에 앉아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끝나셨는지요·”
“그렇소· 이제 원단과 디자인을 볼 것이오·”
“예 미리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상의도 없이 말이오?
말이 나올 뻔했으나 이윽고 엘릭은 지난날의 일을 떠올리고 수긍을 마쳤다·
엘릭의 연미복은 온전히 티리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마담이 흘긋거리는 것에 엘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옷 보는 눈은 부인이 훨씬 좋소· 저쪽이랑 얘기하면 될 듯하오·”
“어머 애처가시네요!”
짝!
손뼉을 치며 곧장 맞장구를 쳐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티리아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지만 엘릭이 그 속내를 확인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 부인 어떤 게 마음에 드셨나요?”
“···일단 이쪽부터·”
티리아와 마담은 금방 대화에 빠져들었다·
주로 티리아가 옷감을 고르면 어떤 원단이 어떤 색과 잘 맞고 자신의 덩치와 골격에는 어떤 형식의 수트가 어울리는지를 마담이 첨언하는 식이었는데 엘릭에겐 그저 머리 아픈 대화일 뿐이었다·
하여 티 테이블 위에 자리한 다과를 우악스럽게 집어먹고 홍차를 벌컥벌컥 마셔대며 시간을 죽여봤으나 대화가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려나·
엘릭의 속에 지루함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딸랑―
양장점의 문이 열렸다·
새로운 손님 마담은 고개를 번쩍 들어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하려 했고
“어서오세····”
바짝 굳었다·
마담뿐만 아니었다·
티리아도 미간을 슬쩍 좁히고 있었다·
어지간해선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진대 대체 누굴 봤기에 저러는 것인가·
엘릭은 호기심에 입구를 바라봤다·
“···이런 위빈 영애 아니신가·”
느글느글하게 생긴 금발의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꼭 주먹으로 한 대 맞은 듯 턱이 삐뚜름한 사내였는데 입고 있는 옷이 고급스러운 것이 꽤나 유력한 가문의 자제인 듯했다·
“부인 아는 분이시오?”
묻자 사내의 시선이 엘릭을 향했다·
엘릭은 그 속에서 미약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 이윽고 사라졌다·
“아 포트먼 남작? 내 소식은 들었는데····”
그의 시선이 엘릭을 한차례 훑더니 이윽고 그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를 향했다·
돌아간 턱처럼 삐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방랑 기간에 변고가 있으셨던 듯하군?”
엘릭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경험했던 몇 가지 감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른 눈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시비로군·’
적의 경계심 그리고 우월감과 안도·
그것들이 지저분하게 얽혀 어조의 비아냥으로 화하고 있었다·
내리깔아보는 눈초리가 꽤나 질척하다·
짜증도 얼핏 보였다·
‘이건 뭐····’
초면에 다짜고짜 저런 얼굴을 들이미니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화라도 내야 하나?
아니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보잘것없었다·
‘딱밤 한 대면 머리가 터져버릴 수도 있겠어·’
귀족이니 고된 마나 수련을 안 한 것 정도는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너무 운동 부족이지 않나 싶나·
슬쩍 훑어보니 근육량이 처참하다· 겉으로 보이는 체격은 적당해 보이나 내장에 지방이 너무 많이 껴 있었고 신체 대사는 삐걱거리고 있었다·
‘식단 문제? 아니 생활 습관 자체가 나쁜 사람이군·’
총체적 난국이다·
개중 유독 도드라지는 것은 성병의 흔적·
성생활이 꽤 문란한 사람인 듯하다·
저대로 뒀다간 요절할 게 뻔히 보였다·
“···가주 이분은 님루드 백작가의 후계이신 아만 님루드 영식이십니다·”
티리아가 나서 그를 소개했다·
엘릭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이곳에 오기 전 그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는 까닭이었다·
-이번 연회에서 님루드 백작과 면을 터야 한다· 그분 취향을 조사해왔겠지?
정확히는 성씨 영식이라 했으니 그의 아버지와 면을 트려는 귀족의 말이 직전 거리에서 들렸었다·
예상대로 유력한 가문인 듯했다·
콧대 높은 것도 이해가 된다· 굳이 척 질 필요도 없고 하니 엘릭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제대로 그에게 인사했다·
“포트먼의 엘릭이오· 남작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소· 승계 과정을 마치지 않아서·”
사람 좋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티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영애께선 그새 더 아름다워지셨군·”
뭔가 엘릭의 속에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과찬이십니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가· 마지막 소식이 남작이 돌아온 것이었던지라 걱정이 많았다오· 10년이나 집을 떠나있다가 이제야 온··· 아차차 내가 실례를·”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은 잠시 고민했다·
‘죽일까?’
아니 진정하자· 그래선 안 되겠지·
여긴 서부가 아닌 동부 페르딘이고 이자는 그래도 유력해 보이는 백작가의 후계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쳐버렸다간 뒷감당이 좀 귀찮겠는가·
더군다나 여긴 뒤치다꺼리를 해줄 엘버스 그레이엄도 없었다·
새삼 그의 존재가 간절해지는 기분이었으나 이런 곳에서까지 도움을 바랄 수는 없으니 엘릭은 하하 웃었다·
“나는 괜찮····”
“한데 영애께선 어찌 양장점에? 아 남작의 연미복을 맞추려는 것인가?”
“···예·”
“흐음 사이가 그리 나쁘진 않나 보군·”
엘릭의 미소가 금새 사그라들었다·
님루드라는 자의 시선이 짜증 났다·
정확히는 티리아를 훑는 눈깔이 참 역겨워 후벼파버리고 싶었다·
그 외에도 굳이 티리아를 영애라고 부르는 순간마다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엘릭은 그런 생각을 띄워 올리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스무 살 이후론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화날 수가 있을까·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감정이 이르는 목적지는 명확했다·
엘릭은 저자가 티리아의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영식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주와의 일을 먼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음?”
“원단을 고르고 있었던지라·”
티리아가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며 말했음에도 아만 님루드는 미동도 없었다·
지팡이를 쥔 엘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아만 님루드가 끌끌 웃으며 그리 말했다·
“사내의 옷은 사내가 아는 법이 아니겠나? 남작과는 교분을 나눠보고 싶었네· 내 직접 남작을 돕도록 하지·”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에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만 님루드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마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보게 마담 잠시 근처 디저트 카페라도 가 있으시게· 내 남작과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단둘만 있고 싶어 하는 저의가 뭘까·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의도가 꽤 선연하다·
“그 그게····”
마담이 엘릭의 눈치를 봤다·
엘릭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랬듯 가슴이 뜨거워질수록 머리가 차게 식었다·
“내 다행인 일이오· 왕도의 귀족과는 면이 없어 연회 때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좀 컸거든·”
티리아의 얼굴 위로 걱정이 얼핏 보였다·
아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미친 건가?’
사실 평소랑 그리 큰 차이가 없는 표정인데도 걱정으로 느껴지고 거기에 혼자 기분이 좋아져 화가 누그러지니 가만 보면 미친 게 맞는 듯하다·
“부인 잠시 다녀오시오·”
“가주····”
“괜찮소·”
엘릭은 싱긋 웃었다·
티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나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마담과 함께 문을 나섰다·
양장점에 아만 님루드와 둘만 남게 된 순간이었다·
엘릭은 미소를 진하게 만들며 아만 님루드를 바라봤다·
‘웃는 얼굴을 해야지·’
그런 가르침이 있지 않았나·
미소가 곧 평정심을 불러오는 법이라고·
이 무도한 사내를 사지 멀쩡히 내보내려면 평정을····
“영애께선 참 여전····”
“남작 부인·”
···평정은 개뿔이·
엘릭은 아만 님루드의 말을 가로채며 그에게 한발 다가갔다·
둘 사이엔 머리 하나 정도의 키 차이가 있었다·
아만 님루드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엘릭은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남작 부인이오· 포트먼 남작 부인·”
아만 님루드의 얼굴 위로 당혹 그리고 수치심 따위가 번지기 시작했다·
물론 엘릭이 알 바는 아니었다·
머리에 피가 확 도는 기분이 참 오묘하여 그를 진정시키는 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이보시오· 영식·”
아쉬웠다·
여기가 서부였다면 사지를 뽑아 부모 앞에 던져줬을 텐데·
하지만 괜찮았다·
언제나 그랬듯 방법은 다 존재하는 법이었다·
“혼인한 영애는 부인으로 불리오· 티리아 포트먼은 내 부인이고·”
아만 님루드의 기색이 사뭇 험악해졌다·
엘릭은 꽤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떠올리는 것은 언젠가 엘버스 그레이엄에게 들었던 귀족의 생리였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게 귀족이네· 하여 귀족의 분쟁에선 먼저 상대를 죽이려 들어도 명분이 충분하다면 수긍해주는 경향이 있지· 고상하게 말하면 그렇고 그걸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면····
-말하면?
-···쌈박질을 하고 싶을 때 상대를 살살 긁어서 터뜨리는 수법을 쓴다는 말일세· 귀족은 생각보다 좀스러운 인종일세·
엘릭은 간절히 바랐다·
“내가 남작위를 받을 사람이니 부인은 남작 부인으로 부르는 게 맞소· 그런 쪽으론 교육이 모자라신 듯하오·”
제발 조금만 더 짖어대라고·
그 잘난 명분 좀 만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