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 – #10 연회 (1)
양장점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내도록 엘릭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놈의 마음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이었다·
떠올리는 것은 아만 님루드와의 일 그리고 이후 티리아의 설명 그 순간 스스로가 보였던 반응 때문이었다·
‘싫다·’
아만 님루드가 티리아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게 싫었다·
아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를 그녀 옆에 붙여놔도 끔찍하리만큼 싫은 기분이 온통 속에 가득 차올랐다·
불쾌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이 목을 꽉 틀어쥐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엘릭으로 하여금 참으로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기적인 것·’
그리 스스로를 질책했다·
애초에 그녀를 내버려 둔 주제에 뭐 잘났다고 상대를 따지는가·
그녀가 누군가를 원한다면 축복해 주어야 할 입장이다·
그리고 그녀의 지난 세월에 대해 사과해야 할 입장이다·
한데도 그게 싫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이냔 말이다·
“가주 속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라고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니 부정적인 감정이 이루 말할 데 없이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니 봄의 이삭을 닮은 초록 눈동자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상념이 떠오른다·
누군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줘야만 한다면
‘그게 나는····’
안 되는 걸까·
떠올린 순간 흠칫 엘릭은 몸을 떨었다·
“가주?”
“아 아무것도 아니오·”
열이 확 오르는 기분에 엘릭은 황급히 답했다·
화제를 돌릴 게 필요했다·
이 생각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연신 치솟았다·
“한데 다른 일정은 없는 것이오?”
그래 이게 좋겠다·
“아직 연회가 이틀은 남지 않았소· 수도까지 왔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라거나··· 뭐 그런 게 있나 싶어서 말이오·”
그리 말하니 다행히 티리아가 응대를 해주었다·
“큰일은 없습니다·”
“그렇소?”
“예 보통은 다른 귀족들과 교분을 나눈 것이 일반적이나 포트먼가는 귀족 사회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가문이라 교분을 나눌 끈이 없습니다·”
티리아는 저 멀리 보이는 왕성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걱정입니다· 이번 연회에는 조금 인연을 만들어 두어야 할 텐데·”
그 말에 엘릭은 뜨끔 속이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가보시오· 뭐든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이 모욕을 갚아줄 방법을 떠올려 보시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
양장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인연이라 아군은 모르지만 적군은 확실히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엘릭의 입가에 삐죽삐죽 어색한 미소가 떠오르자 티리아가 물어왔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괜찮소· 정말 괜찮소·”
섣부른 선택으로 적을 만든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그 님루드 영식이라는 작자가 너무 무도했다·
성병에나 걸려 다니는 짐승 같은 놈이 티리아를 눈독 들이는 게 얼마나 꼴 보기가 싫던가·
그 자리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해 참는다니 엘릭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애써 불안함을 다독이며 저택에 도착하니 아침 일찍 나섰던 알디오가 돌아와 있었다·
“아 외출은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알디오가 싱긋 웃으며 반겨왔다·
한데 그 기색에 곤란함이 있었다·
엘릭은 의아해하며 응대했다·
“옷은 내일 중으로 배송될 것이라 하더군· 한데 자네 표정이 왜 그러나·”
“그 그게····”
알디오가 엘릭과 티리아의 눈치를 봤다·
“···침대가 오늘은 배송이 힘들다 하더군요·”
엘릭은 쿵 심장이 내려앉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작은 것이라도 구해보려 했는데 시기가 시기잖습니까· 지방 귀족들이 수도로 올라오며 새 가구를 찾는 일이 많았다더군요· 그 탓에····”
알디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엘릭은 멍하니 티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가만 알디오를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도 같은 침대를 써야겠군요·”
위험했다·
오늘은 정말 위험했다·
무엇이 위험한지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오늘은 전날보다 더 잠에 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연신 속에 차오르고 있었다·
엘릭은 구조의 의미를 담아 알디오를 바라봤으나 그는 엘릭을 외면할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식사들 하세요!”
하녀가 분위기를 깼다·
알디오는 그림자처럼 스르륵 도망가버렸다·
엘릭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
페르딘 왕국에서 가장 부강한 가문을 고르라면 나오는 이름은 다름 아닌 백작가의 이름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보통 왕국의 실권을 부여잡은 것은 왕실 혹은 공작가나 후작가에 속하는 대 귀족인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하나 그런 기이한 일도 아주 없는 일이 될 수는 없었다·
그걸 증명한 것이 달튼 님루드 백작이었다·
공작가에 버금가는 대영지를 운영하는 부 왕국 내외부적으로 수많은 인맥을 쌓아 움직이는 권력 그리고 그 본인이 가지고 있는 야망까지·
달튼 님루드는 페르딘의 국왕도 넘볼 강대한 힘을 가진 백작이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약점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 모두가 아는 약점이 그에게 있었다·
“···포트먼 남작?”
“예 예에····”
왕도에 위치한 님루드가의 저택 집무실·
화려한 장식이 온통 빛을 뿜어내는 공간 한가운데 달튼은 고개 숙여 무릎 꿇은 사내를 바라봤다·
아만 님루드 그의 아들이었다·
“남작도 아니군· 승계 과정도 제대로 못 끝낸 사실상 영식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얼핏 맺히기 시작했다·
“고작 그런 놈한테 처맞고 빌빌 거리기나 하는 게냐?”
달튼의 눈빛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그에 아만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못난 놈·”
하고 혀를 차며 달튼은 포트먼에 관해 떠올렸다·
‘이렇게 또 엮이는군·’
달튼의 주름이 깊게 패였다·
떠올리는 것은 몇 년 전 아직 포트먼의 전대 가주가 살아있을 적의 일이었다·
‘호벤 포트먼 그놈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
나름 지역을 백년 이상 지켜온 위빈을 몰아내고 영지를 꿰찬 신흥 귀족이라기에 흥미가 돋아 접근한 일이 있었다·
능력 있는 가신이라면 언제든 영입해야 한다는 생각 탓이었다·
하나 호벤 포트먼은 그런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단칼에 달튼을 거절했었다·
-호의에 감사하나 과분하게만 느껴집니다· 고작 시골의 작은 영지와 상단을 운영하는 촌부일 뿐입니다·
정중하게 스스로를 낮췄으나 누군가의 발밑에 들어가는 상황이 싫었을 뿐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태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감히 페르딘에서 님루드를 거절한다·
그것이 참 마음에 안 드는 사내였다·
떠올리자 달튼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아들이나 애비나····”
“아 아버지?”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히익 숨을 삼킨 아만이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고 빠르게 떠나갔다·
달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것도 자식새끼라고·”
도대체 쓸모가 없었다·
은밀한 장소도 아니고 귀족들의 유동이 제일 많은 1번 대로의 양장점·
아만이 엘릭 포트먼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그림이었다·
가문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놈이 고작 남작도 안 된 무지렁이에게 당한 일이니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뒤처리를 해야 했다·
달튼은 곧장 저택을 벗어났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하나 그런 일이 남들에게 쉬이 보여선 안 됐다·
무례는 저지를 수 있지만 그 책임은 온전히 스스로가 져야 함을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왕도에서도 외진 어느 골목 한구석이었다·
허름한 나무 문 앞으로 검을 로브를 두른 이가 서 있었다·
달튼을 알아본 것인지 그새 문에서 비켜섰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리 자주 찾아오는 건 곤란한데·”
음울하게 깔린 목소리가 울렸다·
달튼은 긴장을 띄워 올렸다·
권력의 힘으로는 어디가서 밀리지 않는 그였으나 이 상대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이 조금 바뀌었소·”
“바뀌었다면 어느쪽? 당신 아들 놈이 처맞고 다닌 일?”
이미 알고 있던 것인가·
달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끅끅 웃으며 손사래 쳤다·
“뭐 이만큼 도와주고 있으니까 이해해줄게· 당신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는 거 나도 알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튼은 짧게 심호흡하곤 그에게 말했다·
“···처리할 수 있겠소?”
“일단 확실히 하고 가자·”
“무엇을?”
“우리는 죽이는 것 외의 방법을 몰라· 당신 아들을 쥐어박았다는 그놈 죽여도 되는 놈이야?”
살인을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 어조가 참 께름칙했다·
속에 긴장이 차올랐으나 달튼은 그걸 티낼 정도로 허투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살행이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만 없으면 되오·”
“뒷처리 깔끔하게 해달란 거네· 머리도 좋아· 그래 놓고 당신 아들을 괴롭힌 놈이 객사했다! 라고 소문만 퍼뜨리면 될 테니까?”
비아냥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은 그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나름의 긍정이었다·
“잘 부탁드리지·”
라고 말한 달튼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부의 사신이라 불리는 당신들이라면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 말에 사내가 빙긋 웃었다·
“오늘도 월영을 이용해줘서 고마워· 귀족 나리·”
월영 그것은 서부 전쟁지대에서 가장 많은 유력자를 암살한 암살자 집단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