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 #10 연회 (2)
이틀이 지나 연회 날이 밝았다·
그간 엘릭과 티리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라면··· 별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하루 늦게 도착한 침대 탓에 엘릭이 불편한 잠자리를 감내한 게 끝이었다·
그녀의 숨소리 하나에도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감각을 내내 견뎌왔다면 설명이 될까·
그런 중에도 참 잘만 자던 티리아가 원망스러운 것은 또 다른 일·
여하튼 그런 고난도 끝이었다·
결국 침대는 도착했고 엘릭은 오늘 하루만큼은 그녀의 숨소리탓에 잠을 설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전장의 악몽을 꾸긴 했지만 말이다·
“도련님 슬슬 채비를 시작하시지요·”
이제 막 점심이 되는 시간이다·
한데 벌써부터 채비를 말하는 알디오 탓에 엘릭의 고개가 기울었다·
“연회는 저녁이 아닌가? 뭣 하러 지금부터····”
라고 말하고 나서야 엘릭은 제국 연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놈의 단장이군·”
연회라는 것이 그랬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기 위해 새 옷을 차려입고 화장에 머리 손질까지 몇 시간에 걸쳐 해내야 겨우 그 홀에 서는 지난한 일이었다·
과거 참석했던 연회에서도 이 과정이 얼마나 귀찮았던가·
‘그걸 한 번 더 해야 한다라····’
벌써부터 몸서리가 쳐지는 기분이었으나 어쩌겠나·
달리 막을 도리도 없는 일이다·
와중 알디오가 말했다·
“마침 수배한 이들이 도착했습니다·”
“음? 수배라니?”
“도련님 단장을 책임지실 분들 말입니다·”
“하녀들에게 맡기는 게 아닌가?”
“아휴! 큰일 날 말씀을! 무려 왕실 연회 아닙니까!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지요! 우리 하녀들이라고 해봤자 마님 단장도 벅차지 않겠습니까!”
알디오는 크게 기함하며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이 연회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에 엘릭은 웃음을 흘렸다·
엘릭의 입장에선 위빈의 수확제와 연회가 결국 사람이 모여 웅성댄다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디오에겐 다른 의미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귀족적인 생활에 익숙케 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옴을 엘릭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여 엘릭은 말했다·
“직접 사람까지 수배하고 고생이 많군· 그럼 그들을 만나봐도 되겠나?”
“예! 마침 시간도 되었군요·”
“좋군· 가도록 하지·”
엘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도착한 1층·
그곳엔 여인치곤 키가 꽤 큰 이들이 두꺼운 화장을 한 채 미소짓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엘릭을 향했다·
“안녕하십니····”
그리고
“···까?”
그들이 덜컥였다·
*
서부의 사신이라 불리는 암살자 집단 월영·
제국의 후작조차 소리소문없이 죽인다는 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들의 역사에 딱 세 번 실패한 임무가 있었다·
첫 번째가 외유를 나가는 디샤의 남작을 암살하는 일·
둘째가 전장에 나섰던 어떤 지휘관을 암살하는 일·
셋째가 결혼을 앞둔 어떤 영식을 암살하는 일·
그들의 위상에 비해 참 보잘것없는 실패였으나 이들의 입장에서 그 사건들은 역린과 같았다·
다르게 말해 공포였고 또 다르게 말하면 악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임무 실패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일 부로 월영이 맡는 모든 의뢰에 한 가지 제한을 건다·
그들이 실패한 세 가지 임무엔 모두 한 사내가 있었다·
-검귀 카샤 그와 관련된 끈이 조금이라도 있는 임무는 모두 철저히 배제하도록·
검귀 카샤·
대륙의 7강이자 현존하는 모든 생물 중 가장 강한 개인·
서부 전장에 그 악명이 하늘을 뚫고 올라간 악귀가 바로 그 사내였다·
첫 번째 남작의 암살 하필 그 동네에 우연히 들른 카샤가 당시 임무에 나섰던 모든 월영을 참살했다·
두 번째 지휘관 암살 하필 그 지휘관이 운용하는 부대에 카샤가 용병으로 있었고 그 탓에 월영의 일개 대대가 몰살 당했다·
그리고 마지막 더 어이없는 죽음이 월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결혼한다는 영식이 하필 카샤의 친우였던 것이 아닌가· 절대 전장을 떠나는 일이 없다던 카샤가 고작 결혼식 때문에 후방에 왔을 줄을 대체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여하튼 그런 일이 있는 이후에야 월영은 카샤를 피하기 시작했다·
신입 교육 때부터 그의 용모파기를 눈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외우게 했고 그와 관련된 전장이라면 일대의 월영 부대를 모두 피난시켰고 또 혹시 그의 눈 밖에 날 것을 고려해 언젠가는 카샤에게 제발 우리 좀 그만 괴롭히라는 의미에서 검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그날 돌아온 답이 얼마나 우습던가·
-그럼 눈앞에 알짱거리질 말았어야지· 왜 자네들이 죽은 걸 내 탓을 하는가?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끔찍한 사람이었다·
물론 암살자의 입장에서 저 말을 부정하는 게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알지만 그날의 월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피해자였다·
아무렴 그날 카샤를 만나러 갔던 월영의 간부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업계를 떠나가기까지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여하튼 그런 일까지 있으니 월영에 있어 검귀 카샤라는 이름은 역린처럼 여겨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전장에서 실종되었다고 했을 땐 모든 지부가 하루의 영업 중지를 내걸고 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는 승승장구였다·
카샤가 없으니 월영의 판이다·
전쟁이 격해지니 암살 임무는 더없이 많이 들어온다·
서부 전체에 그 영향력을 끝도 없이 펼쳤고 이제 동부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시기·
꽤 괜찮은 스폰서를 물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는데····
‘···네가 왜 거기 있는데?’
왜 카샤가 여기 있는 걸까·
월영의 페르딘 지부장 다날은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여장을 하느라 가면 수준의 화장을 하고 나온 게 차라리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황이 다 드러났을 것 아닌가·
‘왜? 어째서?’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본단에서 내려온 임무를 하기 위해 내려온 페르딘이었고 그 와중 소일거리 차 암살을 나온 것이었는데 왜 하필 여기서 다른 사람도 아닌 검귀 카샤가·
‘착각?’
일 리가 있겠나·
그의 용모파기는 월영의 신입 교육 첫 단계에서부터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그 교육을 맡았던 적이 있는 다날은 카샤의 용모파기를 눈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다날은 카샤를 직접 본 일이 있었다·
-후배야 나는 이 일 그만하련다·
카샤와 협상하러 갔던 날 회의감에 암살자를 그만둔 간부의 후임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음 전문가들이라 들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겠네만 과한 단장은 피해주시게· 눈길을 끌고 싶지 않은지라·”
카샤가 자리에 앉아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다날은 등에 소름이 쫙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어서 시작하지· 저녁까진 시간이 팍팍하지 않나?”
함께 암살을 나온 부관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다날을 바라봤다·
다날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 속에서도 암살자로서 받았던 교육을 되새기며 이성을 어느정도 되찾았다·
여인의 목소리를 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일단 저희 도구들부터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해서····”
“음 천천히 하시게·”
그가 생글생글 웃는 것에 다날을 곧장 몸을 홱 돌려 부관들과 옹기종기 모였다·
찰칵찰칵 펼쳐지는 화장 도구들 위로 수화를 건넸다·
-독 모두 중화해버려·
여기 있는 화장품 모두가 독극물이다·
그리고 카샤는 애초에 독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에게 괜한 짓을 했다가 암살 시도를 들키기라도 하면 모두 끝장이다·
생존본능이 무섭긴 무서운 건지 부관들은 그 모든 독의 중화에 3초를 채 쓰지 않았다·
다날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모르는 거야· 그냥 화장만 해주고 떠나자고· 오늘 저 인간 본 적 없는 거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페르딘 지부 철수해· 저 염병할 개새끼가 여기 출신이란 걸 아는 새끼가 왜 하나도 없었던 거야!
오늘부로 월영 페르딘 지부는 영업 정지다·
아니 가기 전에 백작 놈은 꼭 죽이고 갈 것이다·
그만 아니었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부관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에야 다날은 몸을 홱 돌려 웃는 얼굴로 카샤를 응대하기 시작했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
“많이 긴장한 듯한데·”
“귀족분을 맡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 푸시게· 잡아먹진 않을 테니·”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다날은 호호 웃으며 부관들과 함께 그의 단장이 시작했다·
그 과정은 침묵 그 자체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알디오가 ‘꼭 세기의 명검을 다루는 명장들의 진중함이구나!’라며 탄성을 흘렸을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는가·
살고 싶다는 일념 하에 월영의 세 암살자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분장 기술을 다 동원해 카샤를 꾸미는 데 열중했다·
그렇게 어느덧 몇 시간 다날은 진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손을 떼어냈다·
‘끄 끝났다···!’
이런 감상이 어울리는 순간은 아니지만 카샤의 화장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화장이라는 분야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점의 결과물이 그들의 앞에 드리워졌다·
다날과 부관들은 눈짓을 나눴다·
뿌듯함을 나눴고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을 나눴다·
‘얘들아 은퇴하면 화장이나 하러 다니자·’
이름 붙여 생존 화장·
이 조합이라면 업계의 정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끝난 것인가?”
“네! 남작님 본판이 너~무 멋있으셔서 저희가 손 볼 게 많이 없었네요!”
빈말 반 진심 반·
다날은 그리 말하며 화장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알디오· 내 잠시 이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주겠나?”
“예!”
달칵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세 암살자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애써 부정했으나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것인지·
“요즘 암살자들은 화장 기술이 참 좋군· 자네들도 먹고 사느라 고생이 많아·”
카샤가 흡족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그리 말했다·
부관들이 덜덜 떨었다·
떨림이 다날에게도 전염됐다·
‘언제?’
어디서부터 들킨 걸까·
생각하는 중 카샤가 거울 너머로 다날과 눈을 맞췄다·
싱긋 그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월영 자네들 마나 연공법은 꽤 인상 깊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그 옅은 숨소리가 참 오랜만이라 판단에 꽤 시간이 걸렸어· 미안하네· 못 알아봐서 섭섭했겠군·”
끝이구나·
“하하····”
다날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젠 여인의 목소리도 집어치운 상태다·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는가·
쿵!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부관들도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살기 위해서 뭔들 못할까·
도망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일단 목숨 구걸이라도 하는 게 상책이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다날은 주인님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