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의 여러 건물 중 대연회장은 당연 도드라지는 거대하고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다·
그 웅장함이 왕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전과 국왕이 기거하는 태양궁 다음으로 쳐줘도 될 정도라 하면 설명이 될까·
연회를 맞아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원래 이런 형상인지 대연회장은 입구부터 레드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고 그 근처로는 온갖 화려한 치장이 더해진 마차가 도열 해 있었다·
엘릭은 그 속에서 이질적인 복장을 한 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기자로군·’
묵직한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종하며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이 있었다·
귀족들은 그들을 의식해 더욱 작위적이고 화려한 걸음걸이를 해 보였다·
모든 것이 촌극으로 보였다·
속에 자리한 심려가 있어 그리한 것이었지만 길게 이어가진 않았다·
“가주 기자들이 보이니 허리를 펴주실 수 있겠습니까?”
티리아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연회는 그녀를 홀로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있어 참석한 것이지 않던가·
다른 생각에 빠져 본분을 잊는다니 그것이야말로 안 될 말이다·
“알겠소·”
답하며 엘릭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물론 지팡이를 짚는 꼴이라 조금 불성 사나울 수는 있으나 엘릭에겐 최선의 걸음걸이였다·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들의 말이 맞는지는 연회에 가보면 알 수 있을 테니·’
벌써 끙끙대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빠바밤~
연회장에 들어서니 오케스트라가 잔잔한 곡조를 연주하고 있었다·
곳곳에는 먼저 도착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왕실의 시종들이 이곳저곳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자리였다·
특히 입장한 순간 흘긋흘긋 옮겨오는 귀족들의 눈초리가 그랬다·
예민한 청력은 그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담아내고 있었다·
-어머 저 남자가 그 소문의 포트먼 남작인가 보네요·
-10년간 집을 나갔다더니 딱 이 시점에 돌아오는 게 참····
-어쩌겠나요· 태생이 미천하니 생각이 짧은 거 아니겠어요? 귀족 작위만 얻으면 세상이 다 제 것인 줄로 아는 거겠죠·
예상한 반응이지만 역시다·
남 얘기 좋아하는 그들에게 이런 소소한 뒷담화 거리가 그저 넘어갔을 리가 없다·
새삼 화를 낼 이유도 자격도 없음에 엘릭은 무던히 그 반응을 넘겼다·
티리아는 그 순간 엘릭을 이끌고 연회장 구석진 곳의 좌석으로 향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계단을 오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 계단 정도로 저택에서도 언제나 오르지 않소·”
“낯선 계단이니까요·”
그녀는 이런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 치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였다·
분명 눈초리가 느껴질 텐데·
-부인은 참 안 됐어요· 저 남자만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가문이 다 자기 것이었을 텐데·
움찔 지팡이를 쥔 손끝이 떨렸다·
엘릭의 시선은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속닥거리던 이들을 향했다·
얼굴에 주름이 지긋한 중년의 여인들이다·
바라보는 순간 모두가 시선을 돌려버리는 게 꼭 바퀴벌레 같았다·
그리고
‘저자는····’
엘릭은 그 틈새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저희 영지에서····
황급히 말을 돌리며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이는 위빈 남작 부인이다·
티리아의 어머니이자 일전 엘릭이 직접 찾아가 으름장을 놓았던 상대 중 하나·
그간 조용히 지내기에 포트먼을 포기한 줄로 알았건만 저런 식으로 뒷공작을 하고 있던 건가?
‘어찌해야 할까····’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더 정리해야 하나?
아니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실책이지·
고민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던 중 티리아가 말했다·
“가주 혹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아 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테라스가 가까운 자리였다·
슬슬 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티리아의 얼굴 위로 묻어났는데 그 탓인지 왜인지 무표정 위로 어떠한 기색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염려일까·
엘릭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니오· 내 이런 자리가 어색해서 그러오·”
“귀족의 연회엔 참석한 일이 없으실 테니 당연합니다· 오래 있진 않을 것이니 조금만 참아주시지요·”
“알겠소·”
“폐하가 입장하시고 난 후엔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쯤엔 빠져도 문제가 없겠지요·”
티리아도 금방 퇴장할 마음을 먹고 있는 듯했다·
문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저리 꾸미고 온 모습을 보는 것도 곧 끝이겠구나 하는 묘한 감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처음 이 모습을 마주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월영의 일로 고민이 막 샘솟는 중에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는 일이 참 힘들어 곤욕스러웠다·
이제 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익숙은 무슨·’
그녀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다과를 야금야금 먹는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걱정이 멀어지는 듯하여 엘릭은 낮은 웃음을 흘려댔다·
웃음소리에 티리아가 의아한 듯 엘릭을 보며 물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아니오· 입가심 거리를 먹는 것은 처음 보는 듯하여서·”
“왕실 파티시에는 동부 전체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자입니다· 가주께서도 한 번 드셔보시지요·”
“음 그럼 나도 어디····”
하며 한입에 들어오는 비스킷을 먹었는데 과연 언젠가 제국 연회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느껴졌다·
“맛있구려·”
“그렇지요?”
이런 맛이 취향이었구나·
그녀에 대해 또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왜인지 속이 간질거렸다·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일이 아주 중요한 과업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제야 말문이 조금 트였다·
엘릭은 티리아와 연회장 구석에 앉아 사사로운 담소나 나누었다·
그리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어느새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잔잔한 소란이 곳곳에 깔리기 시작했다·
유력 가문들의 주인들이 온 것이다·
-보른 공작님이 오셨나 봐요·
-몸이 안 좋으시다 들었는데····
-야란 후작님을 경계하시는 거겠죠· 그뿐인가요? 님루드 백작님도····
가만있으니 곳곳에서 여러 인물에 관한 정보가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개중엔 불쾌한 이름도 있었다·
님루드 백작·
상기하는 순간 곧장 사고는 곧장 미뤄뒀던 월영에까지 뻗쳐나갔다·
엘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그것이 본단에서 특명이 내려왔습죠· 동부 쪽으로 움직여 노릴 이가 있다고··· 그 그게 한 달 전이었습니다! 예! 저희가 동부로 온지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진짜입니다!
어떤 임무를 위해 내려온 월영이 접촉한 이가 바로 님루드 백작이다·
그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고 또한 본단과 연결을 이어줬다던가·
님루드 백작이 월영의 본단 그러니까 ‘그 인물’과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회에 가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목표물이 그 연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받고 움직이던 중에 잠시 소일거리로 여기 온 것뿐··· 아! 무 물론! 어르신이 소일거리는 아니지요! 예! 암요!
-그건 되었으니 그 목표물이 누구인지나 말해보게·
-모 모릅니다· 외국의 인물에 암살 난이도가 D로 책정되어있다는 것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암살을 한단 말인가?
-본단의 명령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대체 서부에서나 활동해야 할 월영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뭔지 저 님루드 백작이란 자가 그 남자와 공조하여 벌이려는 일이 뭔지·
그런 생각이 또 뻗치고 뻗쳐 크게 팽창하던 중이었다·
-아 그 소식은 들으셨나요?
-소식이라면?
-오늘 연회에 제국의 귀족분이 참석하신대요· 듣기로는 엄청 중요하신 분이라고····
정보다·
엘릭은 그 순간 감각을 크게 확장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 마님! 제국 귀족분께서 도착하셨답니다·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고····
-그래?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 빨리 근처로 가서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는데····
입장·
그 말에 엘릭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를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빠바바밤!
오케스트라가 곡조를 바꾸었다·
이것은 유력 가문의 주인들이 입장할 때나 이는 현상이었다·
이미 유력가는 다 도착한 상태·
그에 의아함을 내비치는 이들이 있었으나 이윽고 그 이유가 밝혀지며 그들의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제국의 사절께서 입장하십니다!”
라는 목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보이는 인영에 엘릭의 숨이 멎었다·
‘···아·’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고 있었다·
월영이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을 사내가 목적하는 바도 님루드 백작이 무엇을 노리는 지 따위의 모든 인과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내를 중심으로 맞물려 완성됐다·
휠체어 백금발 그리고 의뭉스러운 개구쟁이의 미소까지·
모든 게 엘릭의 기억 속에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레이엄 공작가의 삼남 엘버스 그레이엄 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빠바바밤!
엘버스 그레이엄·
엘릭의 오랜 친우이자 제국의 낭중지추라 불리는 괴인·
절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내가 침묵에 빠진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누군가는 경악을 또 누군가는 경탄을 또 다른 누군가는 경외를·
그의 타고난 아름다움만으로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공간을 이루는 모든 공기가 철저히 그를 중심으로 다시 짜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사내·
그렇기에 낭중지추·
공간을 압도하며 등장한 그는 여유롭게 좌중을 훑더니
“오·”
엘릭을 발견하곤 싱긋 웃었다·
개구진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