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아무렴 위빈을 찾아온 제국의 보급관 폴로를 통해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지난 가을이 아니었나·
물론 그가 이런 식으로 찾아올 것만큼은 엘릭도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이곳이 페르딘의 왕실 연회로군요· 타국의 연회에 초청되는 일이 잘 없어 새롭습니다· 뭐··· 아무쪼록 다들 평안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금방 엘릭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곤 좌중을 향해 말한 후 연회장 중심으로 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 그를 둘러쌌다·
“엘버스 그레이엄··· 유명인이 오셨군요·”
티리아가 작게 말했다·
꼭 엘릭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국의 낭중지추라 불리시는 분입니다·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전쟁의 주역으로 활동하셨다가 부상으로 퇴역하신 분인데 저분의 업적이 아직도 전설처럼 곳곳에 남아있어 이 동부에도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적지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엘릭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도 아오· 대륙을 일주하며····”
아차 괜한 말은 삼가야겠지·
말을 삼키자 다행히 티리아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쉬이 납득의 뜻을 내비쳤다·
“···네 여러모로 유명한 분이시니·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아니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다면 설명을 부탁하오· 나는 귀족 사회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
무심코 손이 뻗어나가 그녀의 손등 위를 덮었다·
티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엘버스는 소란을 능숙하게 흘려넘기고 있었다·
엘릭은 생각에 빠졌다·
‘월영의 최초 목표가 엘버스였다라····’
생각해볼 점이 있었다·
이미 그를 암살하려다 자신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는 월영이다·
이제와서 다시금 그들이 엘버스를 노리는 저의가 뭘까·
두 가지 중 하나일 터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그럴 가치가 있다·’
혹은 그의 등장이 예견되지 못한 사고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는 않았다·
엘릭은 불쾌함을 느꼈다·
‘자네는 왜 이곳까지 온 겐가·’
시선이 엘버스를 바로 향했다·
엘릭이 예상한 그림은 그가 유람차 동부로 떠나와 몰래 위빈으로 오는 것 정도가 끝이었다·
자신의 성정을 모르지 않는 그가 이리 공개적인 자리에서 곤란을 주려고 하진 않았으리란 판단인 것이다·
한데 예상외의 등장이다·
그저 그의 변덕으로 흘려넘길 수는 없었다·
그가 엘릭을 아는 만큼 엘릭도 그를 알기 때문이다·
저 귀족적인 언행 뒷면에 그는 언제나 많은 계산을 깔아두고 행동한다·
오늘의 등장 역시 그런 계산의 일환일 것이다·
순간 엘버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있다 얘기하도록 하지·
그런 말이었다·
엘릭은 눈짓으로 긍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렇게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됐다·
빠바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왕이 입장했다·
“한 해의 시작을 맞아 경들의 얼굴을 보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게다가 올해는 중한 손님까지 모시게 되었으니 더욱 그 의미가 각별하구려·”
중년의 사내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고·
“···하여 올 한해도 페르딘에 안녕이 가득하길 바라며 끝내겠소· 즐기다 가시오·”
그가 손을 휘젓자 오케스트라의 곡조가 바뀌었다·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가주 이제 슬슬····”
“아니·”
“···예?”
엘릭은 티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도회인데 조금만 즐기다 가는 것 어떻겠소? 물론 무릎이 이러해 춤을 함께 못 춰드리겠지만 말이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불편함일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릭은 작은 미안함을 느끼다 이내 감정을 애써 추스른 후 말했다·
“괜찮겠소?”
“···예·”
“좋구려· 그럼 나는 잠시 볼 일만 좀 보고 와도 되겠소?”
머쓱함을 느끼며 말하자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엘릭은 “금방 다녀오지·”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버스는 이미 연회장을 빠져나간 상태·
그를 찾느라 수고를 들일 일은 없었다·
우우웅―
마나 파장·
그가 암호로 자신의 위치를 알려오고 있었다·
*
엘릭이 도착한 곳은 왕실 어딘가의 정원이었다·
미리 장소를 알아본 것인지 근방은 연회장의 소란과는 다르게 짙은 정적이 내리깔려 있었다·
한겨울에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은 마법이 허락한 기적이다·
엘버스 그레이엄은 그 꽃밭을 지그시 웃는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엘릭은 그만 웃음을 흘려버렸다·
나오는 말은 조금 장난스러웠다·
“자네는 참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 같네·”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나?”
“이 사람아 어찌 이게 칭찬이 되겠나· 그리고 그리 들어오자마자 그리 시선을 주면 어떡하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미안해라·”
쿡쿡 웃은 엘버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야 꿈에도 몰랐지· 자네가 기혼자일 줄은·”
엘릭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왜인지 홧홧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건····”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그리 추파를 던지는 여인이 많았음에도 한 번 눈길을 안 주지 않았나·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다 거짓이었어·”
“그게····”
“애처가였군· 그리 전장을 전전하면서도 부인을 잊지 못해····”
“···그런 게 아니니 그만둬주면 안 되겠나?”
엘릭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시절에야 정말 여인에게 눈 돌릴 틈이 없어 그랬던 것이고 애처가라 부르기엔 엘릭 스스로가 생각해도 티리아에게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여러 복합적인 인과가 얽힌 일이건만 엘버스는 이 모든 걸 변명으로 아는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부인께서 참 고우시더군·”
“자네 부인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어·”
“괜찮네· 일리아는 이런 쪽으로 관대하거든·”
어련하시겠지·
엘릭은 드세기 그지없던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끼리끼리 노시는군요·
그의 소개로 만난 첫 만남부터 당찬 소리나 해대던 여인·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에 관한 걸 그녀에게도 숨기겠다는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배려는 거기까지라는 걸까·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손까지 맞잡고 무슨 대화를 하나 궁금해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네·”
“그만하자니까·”
“첫사랑에 빠진 남녀를 보는 듯했어· 둘이 뽀뽀는 했나?”
엘릭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엘버스는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얄미운 인간·
빠져나가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다·
엘릭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런 얘기나 하자고 따로 보는 것은 아니지 않나·”
엘릭은 본론이 급했다·
그가 추론한 바에 의하면 지금 그와 월영 사이에 얽힌 일은 범상한 종류가 아니었기에·
“대충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자네가 섣부르게 움직이는 이는 아니니·”
“아 암살자? 당연히 있겠지· 내가 적이 좀 많던가·”
“웃으며 넘어갈 얘기가 아니네· 자네를 노리는 이들은····”
“정확히 말하면 날 노린 건 아니지·”
“···무슨 말인가?”
엘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엘버스는 여상스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닌 제국의 사절을 노리는 암살일 것이네· 원래 이 자리도 내 것이 아니었던 걸 저번 주에나 자리를 받아온 것이거든·”
“···아·”
그랬던 것인가·
엘릭은 그제야 월영이 이번 암살행을 맡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던 셋의 암살자가 엘릭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치들도 참 기구하게 사는군·’
하필 바뀐 담당자가 엘버스라니 그 겁많은 성정으로 미뤄보면 꽤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헛웃음이 슬쩍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네·”
엘버스가 손을 뻗어 꽃 한송이를 꺾었다·
붉은 꽃이었다·
“서부 전장의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으리라 믿네· 그곳 상황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되려 하는 차야· 그리고 전쟁이란 것이 그렇지 않던가·”
엘릭은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누군가에겐 절망·”
“또 누군가에겐 기회· 기억하고 있군·”
“워낙 많이 들어서 말일세·”
“그랬나?”
엘버스가 쿡쿡 웃었다·
이윽고 그의 표정이 굳어져 미소가 씁쓸함을 담기 시작했다·
“예컨대 기회를 잡으려는 이들이 있단 것이지·”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었다·
동부로 온 제국의 귀족·
그 귀족을 노리는 암살자 세력·
만약을 가정해 본다·
이곳에 자신이 없었고 엘버스가 아닌 원래 사절로 오기로 한 자가 당도했었더라면·
월영이 그를 암살했다면·
“동부의 땅에서 암살당한 제국의 귀족·”
그것은 즉
“좋은 전쟁 명분이지·”
또 다른 피바다가 생겨난다는 말이었다·
“전쟁이 동부로 확장되길 원하는 세력이 있네· 제국 내부에 어쩌면 외부와 합심한 것일 수도·”
엘버스의 말에 엘릭의 심장이 차게 식었다·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어디까지 이어 나가려는 것인지·
“이보게 카샤··· 아니 엘릭·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엘버스의 시선이 엘릭을 향했다·
“전장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가? 자네가 필요하네·”
진중한 얼굴·
그는 꾸미지 않은 답을 원하고 있었다·
우스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순간 엘릭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전장의 참혹함도 끔찍했던 순간들의 기억도 아닌 어떤 밀밭의 풍경·
어떤 여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망설임 속에서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두 분이 아는 사이셨소?”
3자가 난입했다·
엘릭과 엘버스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곳엔 풍채가 거대한 금발의 중년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실제론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사내·
하지만 엘릭은 그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었다·
“···님루드 백작·”
암살을 사주한 페르딘 왕국의 실세·
명백한 적이었다·
“기막힌 우연이구려·”
그가 삐뚜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