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과 별개로 엘릭이 내뱉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호의에 감사드리오·”
시선이 너무 많았다· 한미한 국가의 남작가가 제국 핵심 가문의 3남에게 섣불리 말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엘릭으로선 그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중 엘버스가 엘릭의 손을 맞잡아왔다·
“에이 뭘 그리 딱딱하게 말하나? 편히 말하시게· 내 어제도 말했지만 나는 생명의 은인을 대충 대할 정도로 얄팍한 이가 아니네·”
엘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형제는 좀 그렇고 연인은 더더욱이 소름끼치니 절충안으로 친구· 자네는 오늘부터 내 절친한 친우라네·”
생글생글 웃는 낯짝에 주먹이라도 꼽고 싶은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이 사람아 친우끼리 그리 딱딱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하하····”
“자 어서 자네도 나를 편히 엘버스라고 부르시게·”
엘버스가 눈을 빛냈다·
저것도 충분히 소름이 끼치건만 그것보다 더 소름이 돋는 것은 주변 귀족들의 질시 어린 시선이었다·
고작 엘버스가 호의를 보내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무시하던 시선이 한순간에 뒤바뀌어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헛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하나 같이 모질이들이군·’
귀족 사회의 생리는 역시 엘릭의 몸에 안 맞았다·
그와 별개로 엘버스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비호 해주는 것이겠지·’
제국의 그레이엄이 포트먼을 비호 해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엘릭이 멍청하진 않았다·
아마 티리아가 걱정했던 다른 귀족과의 교류가 지금보단 훨씬 원활해질 터였다·
실제로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니 못마땅함 한가운데 작은 기꺼움 따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게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끼리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러 갑세· 내 어제 자네에게 얼핏 들었던 대륙의 지방별 문화 차이에 관한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롭더군·”
변명을 만드는 솜씨 하나는 또 끝내주는 인간이지·
엘릭은 슬금슬금 티리아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영원히 안 할 수는 없는 것이오?
무심코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 뻔했다·
엘릭은 말을 참은 스스로의 인내심을 칭찬했다·
“그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오겠소·”
“예·”
그리 엘릭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엘버스와 함께 복도를 걸어 그에게 배정된 개인 휴게실로 들어선 직후였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건가?”
엘릭은 곧장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물론 비호 해주겠다는 의도는 고마우나 공연히 타인의 시선을 끌게 된 게 기꺼울 리가 없다·
이런 일을 할 것이라면 최소한의 상의라도 필요했단 말이다·
본래 엘릭의 성격대로라면 당장 멱살이라도 틀어쥐었을 상황·
지금까지 참아주는 것도 그가 엘버스 그레이엄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친우에게 조금 더 너른 기준을 적용해준 것이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정하시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뭐?”
“그 님루드라는 작자가 헛소리를 하려 드는 게 아닌가· 심문 과정에 자네 이름을 발설했더군·”
흠칫 엘릭의 몸이 떨렸다·
불안감이 차올랐고 그것은 직후 엘버스의 말에 종식되었다·
“걱정마시게· 더 큰 변을 일으키기 전에 죽여버렸네·”
웃으며 할 이야기는 아니었음에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엘버스 그레이엄은 본래 이런 남자였다·
엘버스는 그 특유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런 접점이 생겨버려서 급히 만든 변명이라네· 그리고 자네는 내 비호를 너무 얕잡아 생각하는군?”
“···그게 무슨 말인가·”
비호면 비호지 뭘 얕잡아 생각한다는 건지 원·
공연히 화를 낸 것이 머쓱해 기세를 죽이며 묻자 엘버스가 쿡쿡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레이엄이네· 제국 황실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 중의 명문·”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내 비호를 받는 타국의 귀족이라는 것은 제국과의 모든 교류를 허락받은 귀족이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네·”
엘버스가 검지와 엄지로 원을 만들었다·
“자네가 돈방석에 앉을 사람이 되었단 말이지· 그리고 페르딘의 귀족에겐 누구보다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제야 엘릭은 그의 말을 조금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슬쩍 커졌다·
“이제야 표정이 보기 좋아졌구만·”
엘버스는 말했다·
“뒷조사···라고 하기도 뭣하지· 어제 있던 연회 중 들은 이야기가 몇 있었네· 자네와 부인의 입지가 그리 좋지 않더군?”
“그건····”
“이보게 엘릭 귀족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일신의 무력을 너무 과신하지 마시게·”
엘릭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과신한 적 없네· 도리어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지 않으려 꽤 고심하는 중이고·”
“아니 자네는 과신하고 있어·”
엘버스가 탁 위에 올라와 있던 다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네는 그들이 얼마나 교활한지를 모르네· 얼마나 치졸하게 굴 수 있는지를 모르지· 자네야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자네 부인과 영지는? 자네 홀로 그들을 다 지켜낼 수 있나? 언제까지나 그리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있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네· 그게 가능하다 생각한다면 손바닥 안에 하늘이 있다 착각하는 것일 뿐이고·”
엘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들이미는 것은 현실이었다·
“자네가 당장 전장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음을 아네· 자네 선택이 그렇다면 나는 말리지 않아· 그렇기에 말하는 것일세·”
그가 다과를 한입에 삼켰다·
“고향에 남겠다면 지켜야 할 것들을 생각하시게· 대부분의 인간은 결국 사회를 필요로 해· 그 사회에서의 안정을 끊임없이 갈구하지· 자네와는 달라·”
“부인은····”
“귀족이지·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교육받은 여인이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더군· 하나 결국 귀족이야·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에 영지의 안녕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네·”
실로 옳은 말이었다·
티리아의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은 영지의 운영과 관리를 위한 시간이었고 그녀는 그 일을 스스로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도리어 존중해줘야 마땅할 일이다·
그녀가 바라는 행복이 그런 형태라면 자신도 그를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엘릭은 엘버스를 바라봤다·
그는 다과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손을 놀려 비스킷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여하튼 이상한 순간 맹점을 찔러오는 인간·
“고맙네·”
“뭘 이 정도로· 한데 다과가 정말 맛있군·”
“유명한 파티시에라더군·”
“그래? 가기 전에 잠시 만나볼까·”
“영입은 곤란하네· 부인이 그 다과를 좋아해· 내년에 왔을 때 먹지 못한다면 꽤 슬퍼할 것이네·”
“애처가시군·”
“애처하지 못 한 걸 후회하는 쪽이라도 해두지·”
“뭘 후회까지야· 앞으로 잘하면 될 걸·”
그의 얼굴 위로 장난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원래 아홉 번 잘해주고 한 번 못하는 사람보다 그 반대가 상대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는 법이네·”
엘릭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맨날 외도나 하고 다니나?”
“낭만을 좇는 것이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의문이군·”
“아일리가 관대한 덕이네· 음 아직도 기억나· 다리를 분질러봐야 의미도 없는 인간이니 포기하겠다던가·”
“자네는 정말 끔찍한 남편이네·”
“칭찬 고맙네·”
그제야 분위기가 풀렸다·
엘릭은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와중 들은 소식도 몇 존재했다·
“아참 자네가 보낸 편지는 잘 받았네· 그 건은 편지에 적힌 대로 처리했네·”
“그랬나?”
“자네가 내게 맡겨둔 돈 어느새 너무 불어나 버려서 교역비를 대는 정도로는 실금도 안 생기더군·”
용병짓을 하며 모은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돈을 굴리는 재주가 없었던 엘릭은 벌어둔 돈 모두를 그에게 맡겨 곳곳으로 투자해둔 상태였다·
그 실물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적은 돈은 아니리라·
문득 엘릭은 생각했다·
‘혹시 모를 상황이라면····’
마침 그가 왔으니 대비를 해두는 것도 좋겠지·
“이보게 엘버스·”
“음?”
“그 재산 말일세· 상속인을 바꿔주게·”
순간 엘버스의 몸이 덜컥였다·
얼굴 위론 인상이 떠올랐는데 꼭 께름칙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형태였다·
“···자네 혹시 약점이라도 잡혔나? 아니면 흑마법?”
“왜 그러나?”
“간이고 쓸개고 다 주려고 하는 게 의심스럽네만·”
대체 뭐라는 건지 원·
엘릭은 그의 헛소리를 일축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자네한테 갈 돈 아닌가? 자네보단 그래도 부인한테 주는 게 맞지·”
“자네가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부인이 까무러치겠군·”
“음?”
“아무 것도 아닐세·”
라고 답하며 엘버스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엘릭이 그 스스로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게 너무 우스웠던 까닭이다·
‘자네 금고의 돈으로 나라 하나를 살 수 있는 건 언제쯤 알게 될까?’
검귀 카샤로 살아오며 네 왕국의 국고를 털어 모은 재산은 그간 해온 투자가 성공해 재산이 배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영 물어봐 주질 않으니 먼저 얼마라고 말해주기도 얄밉고·’
일단은 입다물고 있어 볼까·
엘버스는 그가 스스로의 재산을 확인하게 되는 날이 사뭇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