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엘릭의 일생에 처음 있었던 마차 여행이었다·
꽤나 지루한 길이리라· 그리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왕도에서 위빈까지 이어지는 일주일의 여정은 의외의 즐거움이 더러 존재했다·
가령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따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한창 겨울을 맞아 삭막한 풍경이긴 했으나 그 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기색은 따스했다·
다음 해를 준비해 몸을 웅크리는 초목은 어딘가 소담한 면모가 보였고 청아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과정은 엘버스가 좋아하던 낭만을 담고 있었다·
하나 같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면모가 있었다·
엘릭은 생각했다·
‘역시 조용한 게 좋군·’
언제나 웅웅 울리던 병장기 소리와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점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며 마침내 위빈·
포트먼의 저택에 도달했을 땐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오· 고생이야 알디오가 다 했지· 내가 한 것이라곤 마차에 가만 앉아있던 것뿐이지 않소·”
“저 때문에 마차에 오르신 것 아닙니까·”
티리아가 겸연쩍다는 듯 말함에 엘릭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소· 가만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게 꽤 즐거웠거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티리아의 기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엘릭은 이제 스스로가 그런 점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신했다·
일주일간 지근거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덕분이겠지·
어떤 상황에서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녀였으나 자세히 바라보고 있자면 어조의 고저나 순간적인 안면 근육의 변화 따위가 있었던 것이다·
엘릭은 기뻤다·
티리아가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련님! 마님! 일단 짐부터 내리겠습니다! 식사는 하고 주무셔야지요!”
알디오가 외치는 것에 엘릭은 티리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일단 들어갑시다·”
“예·”
날이 한창 쌀쌀한 위빈이다·
엘릭은 옷깃을 여미는 티리아와 함께 헐벗은 밀밭 사이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사용인들 익숙한 분위기와 익숙한 냄새·
거기에 익숙해지려는 사람까지·
한층 반가운 기분 속에서 그리 엘릭은 그간의 여정을 끝마쳤고
-카샤!!!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
“흐읍!”
벌떡 엘릭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더듬더듬 뻗어나간 손이 침대 옆 선반에 있던 날 죽은 단도를 향했다·
서늘하게 식은 쇳덩이를 품에 안자 그제야 호흡이 천천히 되돌아온다·
엘릭은 식은땀을 훔쳐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직 꿈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오랜만이군·’
언제의 일이었더라·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 속을 벌렁거리게 하고 있었다·
‘···3년 전? 아니 4년 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그려질 뿐이었다·
체보르의 전선 방어선에 서서 칼바란의 군사들을 틀어막던 날이었다·
보병부대가 자신을 덮쳤고 그 어딘가에 소년병이 있었다·
-카샤!!!
원독에 찬 외침 어설픈 검술 그리고 스러져가는 숨·
소년병의 얼굴 위로 걸려있던 것은 원망이었다·
유독 그 소년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소년이 들고 있던 검 때문이었다·
소년의 검에 새겨져 있는 상흔은 자신이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날 만든 것이 아니라 꽤 오래전 다른 전장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묵은 상흔이었다·
전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란 것이 있다·
그 소년이 앞서 자신이 죽인 누군가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었다·
전쟁이 다 그런 것 아니냐며 흘려 넘길 수도 있었다·
한데도 아직 엘릭은 그러지 못했다·
소년이 죽어가며 토해낸 원망은 이따금씩 이런 악몽이 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도련님 기침하셨는지요·
엘릭은 눈을 꾹 감은 채 마음을 다스렸다·
대답은 그 이후에나 나왔다·
“···씻고 싶군· 준비를 좀 해주시게·”
근래엔 악몽을 잘 꾸지 않아 다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결국 아니란 말일 테다·
하긴
-예 마님께도 전달하겠습니다·
최근엔 티리아와 떨어져 있을 틈이 없지 않았나·
그녀와 지낼 때는 여타 기이한 감정이 들어서 그리고 그녀와 지근거리에서 잠들 땐 그녀의 잠버릇을 신경 쓰느라 악몽을 꾸지 않았다·
티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더욱 마음이 편해진다·
엘릭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인지 빨리 그녀를 마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포트먼가의 아침 식사는 아직 빵과 베이컨 그리고 계란이었다·
그것을 식탁 위로 두고 마주 앉는 일이 왜이리 오랜만으로 느껴지는 걸까·
“좋은 아침이오·”
하고 말하니 티리아가 답했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홀로 잠든 것이 오랜만이라 악몽을 꾸었소·
그리 말하긴 또 뭣해 엘릭은 거짓을 지어냈다·
“역시 집이 최고인 듯하오· 하마터면 늦잠을 잘 뻔했지 뭐요·”
“예 저도 그랬습니다·”
“진심이오?”
“····”
“부인께서 농담도 다 하시는구려·”
티리아가 머쓱해하고 있었다·
눈썹이 조금 늘어지는 것이나 시선이 사선 아래로 떨어지는 반응을 보아하니 그랬다·
“···재미없으셨는지요·”
이건 부끄러움일까·
티리아의 손이 괜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엘릭은 그 모습이 왜인지 아기자기하게만 느껴져 미소를 짙게 만들며 답했다·
“조금은 재밌었소·”
답하며 엘릭은 식사를 시작했다·
와중 나누는 대화는 오늘부터 해야 할 일 그리고 한 해의 시작에 맞춰 영지민들에게 풀어낼 식량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덧붙여졌다·
“기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응?”
“가주께서 필요할 것이라 하지 않으셨는지요?”
“아··· 그리 말하긴 했소만·”
“올해 수확량이 많았고 거래도 무사히 끝난 터라 자금이 꽤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한두 명 정도는 영입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저 흘리는 말로 한 것을 다 기억하고 있던 것인가·
엘릭은 그녀의 호의에 문득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작은 열의가 속에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 일 내가 도맡아 해도 되겠소?”
“예?”
“기사단에 관한 것이라면 내가 아는 게 조금 있소· 아 그··· 어릴 때 기사가 꿈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소?”
“···예·”
“조사도 확실히 해놨었소·”
물론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기사단의 창설은 그녀보다 자신이 능통한 게 당연했다·
아무렴 서부 전쟁지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유력기사단을 다 마주한 일이 있지 않던가·
영지 일에는 좀처럼 능하지 못한 엘릭으로선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도 되겠소?”
거듭 묻자 티리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하시지요·”
“고맙소!”
엘릭의 속에 기쁜 마음이 차올랐다·
그대로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벌떡 일어난 엘릭은 티리아를 향해 대충 인사를 건네곤 곧장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티리아는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어린 날의 엘릭이 겹쳐 보였다는 생각 탓이었다·
*
기사단·
비단 영지의 수호를 도맡는 인원이 아닌 영지의 힘과 품위를 드러내는 얼굴 중 하나·
그런 만큼 실력이 출중해야 함은 물론이오 그 풍채와 군기 또한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을 미뤄봤을 때 당장 위빈 안에서 인재를 구하기는 마땅찮은 면이 있었다·
외부에서 영입을 해오자니 그 과정이 지난할 것 또한 당연했다·
암만 총기가 발전했다곤 하나 기사는 기사가 아니던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은 귀하게 여겨지는 만큼 그 몸값도 아주 높단 말이다·
그런 중 다행인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엘릭에게만 다행인 일이 있었다·
“다 모인 건가? 다섯이라··· 지부 하나 치곤 꽤 작은 인원이군·”
“허허··· 어르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합니다·”
“뭐 아닐세· 사람이 너무 많아도 부인의 의심을 살 테니·”
서부의 사신 월영·
그중 페르딘 지부의 지부장이었던 남자 다날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본단에서 팽 당하고 지부는 풍비박산이 난 차에 카샤에게 의탁한 것이 바로 몇 주 전의 일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볼 것이라곤 없는 이 촌동네 위빈으로 온 건 또 닷새 전의 일·
마침내 카샤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 다날은 속으로 눈물을 흘려냈다·
‘그냥 잡일이나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기사를 하라니·
그것도 이미 있는 기사단이 아닌 영지의 새로운 기사단이 되어 줘야겠다니·
거기까지는 괜찮다·
한데····
‘왜 이렇게 박봉인데!’
막 서임 받은 기사들이나 받을 법한 작은 돈이 월봉이란다·
영지의 주머니 사정이 그렇다는데 그럼 기사를 받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왜 굳이 다섯을 다 기사로 들이겠다고 하는 건가·
정말 이 선택이 맞았던 걸까·
다날의 속에 울분이 한껏 차오르는 와중이었다·
“혹시 이견이 있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날은 생존본능에 떠밀려 외쳤다·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카샤가 흡족하게 웃었다·
“잘 부탁하네· 그럼 우리 기사단 이름부터 지어볼까?”
“예이!!!”
다날은 카샤가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