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영감의 대장간에 다녀온 뒤로 1주일 정도가 흘렀다·
그날 느꼈던 거부감과 께름칙한 기억은 어느덧 또 무뎌져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갔다·
역시 시간이 답이라고·
안도하고 있던 엘릭이 사실은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갑옷 배달 왔어요!”
베론이 저택에 찾아왔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왜 또 속이 이리도 문드러지는지 엘릭도 영 모를 일이었다·
“엘릭 형! 잘 지내셨어요?!”
한 번 인지한 불편함은 좀처럼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을 연신 수면 위로 끄집어내 호흡을 흩어내기 시작했다·
애써 웃으며 응대하려 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될 텐데 생각하는 엘릭을 대신한 것은 티리아였다·
“갑옷의 상태를 봐도 되겠느냐·”
“아 네!”
그녀가 손을 포개어 왔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손이 께름칙함을 털어낸다·
엘릭의 시선이 티리아를 향했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알 턱이 없었다·
분명 그럴진대·
“어떻습니까· 가주께서는 만족스러우신지요·”
꼭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리 힘든 순간마다 손을 맞잡아오는 것인지·
엘릭은 괜히 속이 시큰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훌륭하군· 허먼 영감의 솜씨는 명불허전이야·”
“흐히히 저희 할아버지가 엄청 신나하셨어요· 풀 플레이트를 만드는 건 오랜만이라고·”
“그랬더냐?”
“네! 아 그리고····”
베론이 우물쭈물하다 말을 내뱉었다·
“···음 혹시 있잖아요· 정말 혹시라도·”
간절함 그리고 기대감이 얼핏 묻은 목소리였다·
“기사의 종자를 모집하시면 제가 꼭 도전해보고 싶어요!”
주홍색 눈동자가 꿈으로 타오른다·
티리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게 된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 일은 아직 생각할 때가 아니구나· 기사단의 운용 방향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서·”
“아아··· 그렇죠? 제가 너무 실례를····”
“하지만 혹시 그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네 말을 기억해두도록 하마· 오늘은 가보거라·”
그녀는 특유의 또박또박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베론을 물렸다·
묘한 신뢰감을 자아내는 목소리라 베론은 꿈에 부푼 채로 돌아갔다·
그렇게 베론이 떠나갔다·
“일단 집무실로 들어가지요·”
엘릭은 그대로 티리아의 손에 이끌려 집무실까지 이동했다·
*
이동하는 중 티리아는 어느 것도 묻지 않았다·
집무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순간의 당황을 대신 넘겨주었으면서도 그 연유가 궁금하지 않은 것인지 곧장 본인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엘릭은 물끄럼 그녀를 바라봤다·
무심함이라 해야 할까 그녀의 그런 무던한 기색에 괜히 속이 찔린 엘릭은 질문을 건넸다·
“왜 묻지 않으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직전의 일 말이오· 아니 그보다 대신 일을 봐주어서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당연한 일입니다· 영지의 일이니·”
그녀는 서류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더해 가주께서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을 캐묻고 싶진 않습니다·”
“내가 평생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말이오?”
무슨 답을 듣고 싶어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문득 스스로에게 그런 의문이 치솟는 와중이었다·
티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그녀는 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터라 표정이 음영에 가려진 채였다·
“그 아이와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또한 아니오·”
“그렇다면 다른 일이겠지요· 제 얄팍한 추측 능력으로는 아마 그 아이 또래의 다른 아이가 가주와 안 좋게 엮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답이었다·
그녀가 의도했던 그것이 아니던·
엘릭은 눈을 좁혀 그녀의 표정을 더욱 선명히 보려 했지만 요원한 일이었다·
여전히 엘릭이 볼 수 있는 것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후광처럼 두른 그녀의 모습 그리고 입술의 달싹임이 끝이었다·
그 입술은 말했다·
“가주께서 살아오신 세월이 어떠하였는지는 모릅니다·”
조곤조곤하게
“그 세월이 가주에게 아픔이었는지 기쁨이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또한 또박또박하게
“그러니 섣불리 묻지 않을 것입니다· 혹여 슬픔이라면 떨쳐내지 못한 상처를 제가 들쑤시는 일이 될 테니· 그저 가주께서 훌훌 털어내신다면 제게도 그런 일이 있었음을 일러주지 않으실까 기대하는 수밖에요·”
그녀의 말은 참 기이한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
엘릭은 알았다·
그저 만들어낸 어조로는 저런 신뢰감을 줄 수 없었다·
티리아의 말에는 진심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누구를 대함에도 언제나 진솔함을 보였다·
그 사실이 와닿는다·
피부 위로 그리고 마음속까지·
감사함에도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생각해보니 우습게도 그녀의 친절이 자신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솟은 까닭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런 것이 신경 쓰이는 걸 보니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긴 한 듯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됐다는 것이겠지·
어쩌면 이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지난 세월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에게 숨기고 있던 과거를 내비치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 타인의 피를 먹으며 살아온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엘릭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나 결국 말하지 못했다·
겨우 해내는 것은 돌려 내뱉는 말이었다·
“···딱 그 아이 또래의 아이를 만난 일이 있소·”
“그렇습니까?”
“얼굴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데 표정이 일그러진 모양새만큼은 선명하오·”
“어떤 아이였습니까?”
“서부에 있던 때였소· 그 아이는 소년병이었고·”
“드물군요· 서부 전쟁에서 소년병은 징집하지 않는 것으로 들었는데·”
“···스스로가 원한다면 전장에 설 수 있지· 구태여 막을 정도로 인간미 넘치는 전장은 아니니 말이오·”
“그럼 그 아이는 스스로 사지에 들어간 것이겠군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간 것으로 추측하오·”
“죽었습니까?”
“그렇소·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그 표정이 가주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그런 듯하오· 하여 베론을 보는 일이 힘드오·”
“그런 일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티리아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와 엘릭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장은 두렵지요· 저는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르겠으나 가주께서 그 참혹함을 안다는 건만큼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 역시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이 밀밭뿐인 동네의 흙냄새와 다른 향을 품고 있었다·
“어떤 위로를 드린다 한들 제가 하는 위로가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니 대신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약속이라면?”
“가주께서 그 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때까지 그 아이를 구태여 상대할 일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혹여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우습지도 않은 소리일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정말 그리할 생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약한 소리나 하는 이런 사람의 무엇을 보고 이리 위로를 건네주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이 친절에 기대기만 해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고맙소·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은 일만 하고 살 순 없겠지· 그리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느낀 게 하나 있었소·”
“무엇입니까?”
“뭐든 마주하다 보면 언젠가는 무뎌지는 법이란 것·”
엘릭은 티리아를 슬쩍 밀어냈다·
이제야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확실히 느껴진다·
그녀의 온 신경이 자신에게 몰려있음을·
그녀는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을 진솔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그 무엇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공포는 도망치려 할수록 덩치를 불리는 법이지· 내 친구의 말이었소·”
“좋은 친구를 두셨군요·”
“과분한 친구지· 그러니 그 친구를 봐서라도 내 스스로 그 아이를 마주해 보겠소·”
말을 내뱉으니 그제야 쉽다·
아니 티리아의 앞이라 쉬워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얄팍한 마음이라 해도 크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종자 기사를 하나 들이는 것도 좋겠지· 서임식 날 함께 진행하면 좋을 듯하오·”
위빈에서의 자신은 전장의 귀신 카샤가 아니었다·
엘릭은 그것을 확실히 구분하고자 했다·
이곳에서만큼은 철딱서니 없이 가출한 절름발이 도련님이었다·
아직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부인의 치마폭에서 겨우 위로받는 머저리였다·
그 요소에 전장의 악몽을 꾸는 귀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털어내야 하는 것일 터다·
“부끄러운 말을 해 미안하오·”
하고 결심하며 말하자·
“고민이 있다면 나누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에 티리아가 구태여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희는 부부이지 않던가요·”
부부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티리아의 또박또박한 어조가 슬쩍 뭉개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사뭇 간질거렸고 유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