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2 책임과 의무 (1)
사흘이 지났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인지 위빈의 생활이 지난 10년과 그리 괴리감이 있는 형태였음에도 엘릭은 어느 정도 적응을 시작했다·
여전히 꿈속에선 전장을 헤매고 있었고 눈을 뜰 때면 허우적대며 단도를 찾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꽤 만족스러운 생활인 것이다·
“도련님·”
엘릭은 오늘도 알디오의 목소리에 침대를 나섰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지팡이를 짚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하자 식당에 티리아가 있었다·
“기침하셨는지요·”
짧게 고개를 숙여옴에 엘릭은 답했다·
“좋은 아침이오·”
여전히 그녀와는 어색했다·
말수가 적은 여인에다 하루 대부분을 서로 다른 곳에서 지내다 보니 좀처럼 친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 처음만큼은 불편하진 않았다·
이 역시 적응이었다· 이제 엘릭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오늘도 밀밭을 보러 가시오?”
“예·”
“미안하구려· 내 다리가 이래 일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괜찮습니다· 익숙해졌으니·”
속을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참 뻔뻔한 말이었다· 그녀를 홀로 둔 것은 자신일진대 이제와 사과를 하다니·
엘릭이 또 못난 입을 질책하던 와중 티리아가 손놀림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접시를 바라보며 침묵하다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가주님께 배워와서 익숙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짧게 숨이 삐져나온다·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확실히 아버지의 방식이구나·’
중요한 일은 언제나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밀밭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업체를 모두 정리해 이제 포트먼가에 남은 것은 겨우 밀 농장 하나·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남은 사업이 그것 하나라면 부친의 성격상 그녀에게 인수인계를 마쳤을 것이다·
엘릭은 그런 일을 생각하다 무심코 물었다·
“한데 말이오·”
“예·”
“···아버지와는 어떻게 지내셨소?”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후회보다 궁금증이 더 크다는 게 맞을 것이다·
유서도 없이 유산만 딸랑 남겨놓은 부친의 의중을 알고 싶은데도 단서랄 것이 없으니 그녀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닌가·
티리아는 곧장 답했다·
“일을 배웠습니다· 그 외엔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군요·”
“···나에 관한 말은 없었소?”
“없었습니다·”
확언에 말문이 틀어막힌다·
확실하냐고 물으려던 엘릭은 이내 그 일을 포기했다·
왜인지 현실성이 있었던 까닭이다·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다·
인간 같지도 않은 냉혈한 부친과 저 말수 적은 여인이 이리 식탁에 앉아있는 모습·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져 숨 막히는 침묵이 공간을 떠돌았을 것이다·
기껏 나누는 대화라 해봐야 부친의 “이런 일을 해라”와 티리아의 “예”라는 답이 끝이었을 테고·
엘릭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끔찍하군·’
이런 마음이 들면 안 되겠지만 차라리 도망친 게 다행이라 느껴질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엘릭은 허허롭게 웃었다·
식사 자리는 그리 끝났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티리아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짧게 고개숙이며 인사해왔다·
엘릭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답했다·
“힘내시오·”
그리 식당을 나섰다·
*
주인의 아들이었으나 엘릭이 저택에서 가지는 입지는 손님에 가까운 편이었다·
당연했다·
14세에 가출해 10년 동안 이곳을 찾지 않았으니 집안의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없었고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다리가 이 모양이니 잡일조차 도울 수 없는 게 아니겠나·
그러니 결국 하는 짓이라곤 한량처럼 정원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끝이다·
가을의 서늘함을 온몸으로 받으며 분수대를 보고 사람을 보고 그들과 눈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새로 온 이들이 많구나·’
저택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력은 그대로다·
하지만 잡일을 하는 이들 중 엘릭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하녀장이나 집사 그리고 마부처럼 엘릭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적대하진 않지만 친애하지도 않는 미묘한 선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무얼 그리 보십니까·”
알디오였다·
등 뒤에서 다가온 그는 품에 작은 목함을 안은 채였다·
엘릭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사용인들을 보고 있었소· 모르는 얼굴이 많구려·”
“그렇지요· 아무래도 10년이나 흘렀으니·”
알디오가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혹 도련님께 실례라도 끼쳤습니까?”
“그럴 리가 있소? 그런 사람은 이 저택에 있을 수가 없지 않소·”
제아무리 부친이 타계했다곤 하나 이곳은 여전히 그가 일궈놓은 땅이었다·
그는 아랫사람이 주인에게 불충한 일을 극도로 혐오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사용인을 뽑을 때면 언제나 그런 점을 우선시해서 보는 사람이었다·
인간을 부품으로 봤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뒤에서 무어라 하든 겉으로는 저택의 매끄러운 운영을 위해 성실함을 연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작 1년 만에 그런 기조가 사라졌으리라 판단하는 것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엘릭은 떠오른 생각을 지워내며 말했다·
“한데 그 목함은 무엇이오?”
“아 마님께로 전달되는 서신들입니다·”
“그분께?”
“예 수확 철이잖습니까· 이곳저곳에 신경 쓸 일이 산재해있지요·”
하기야 그렇긴 하다· 엘릭의 기억 속에서도 수확 철은 부친이 유독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시기이니 말이다·
“어떤 서신들이오?”
“모릅니다·”
“음?”
“주인이 보지 않은 서찰을 먼저 보는 하인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작게 웃으며 내뱉는 말은 변함없는 그의 충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릭은 그 한결같음에 큭큭 웃었다·
“못 친해진 이유를 알겠군·”
“수행은 착실히 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타계하신 주인님과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긴 하다· 부친은 그를 핵심적인 부품으로 여겼을지언정 인간적인 동반자로 여기진 않았으니 말이다·
알디오도 그런 점을 익히 깨닫고 부친에겐 깍듯함만을 보였었다·
엘릭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그분은 낮에는 밀을 보고 밤에는 서류를 보는 것이오?”
“그렇지요·”
“고생이 많으시구려·”
측은함과 죄스러움이 물 밀 듯 밀려왔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엘릭의 역할이었다·
스스로의 책무를 남에게 떠넘기고 이리 유유자적 지내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원망이라도 해주면 마음이 편할 텐데 티리아는 오늘이 오기까지 단 한 번도 투정 따위를 한 일이 없었다·
엘릭은 잠시 고민하다 그리 말을 내뱉었다·
“혹 그 서신들을 내가 받아봐도 되겠소?”
그저 읽는 일이라면 이런 다리로도 가능했다·
물론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제대로 모르지만 서신을 분류하거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피로를 조금은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의욕이 생기는 일이었다·
“으음····”
알디오의 얼굴 위로 망설임이 떠올랐다·
엘릭은 장난스레 말했다·
“나도 일단 주인이긴 하오· 그 서신을 볼 자격이 있는·”
꽤 염치없는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알디오는 그 말에 멍한 얼굴을 만들다 이내 푸흐 웃음을 흘렸다·
“···예 그렇긴 하군요·”
목함이 엘릭에게 건네졌다·
“집무실은 10년 전 그 자리에 있습니다·”
“2층의 중앙이지· 저택의 심장·”
“맞습니다·”
“알겠네· 일 보시게·”
“예·”
엘릭은 목함을 허리에 끼고 집무실로 향했다·
*
의욕과 별개로 당연히 아주 당연히 엘릭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서신은 없었다·
무슨 거래처의 어떤 용건 농사한 밀의 수확량과 이윤 사이의 통계 따위가 너저분하게 널려버린 것이다·
해결은 불가능하다·
다행인 점이라면 어릴 적부터 맥락을 보는 눈만큼은 뛰어났기에 최초 계획했던 분류정도는 가능했다·
엘릭은 크게 세 가지·
외부에서 온 서신과 상단에 관한 서신 그리고 개인적인 서신으로 분류해 가지런히 목함의 내용물을 정리했다·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런 와중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편지였다·
그 위로 찍힌 인장은 위빈 가의 것이었다·
티리아의 친정이었다·
엘릭의 시선은 좀처럼 편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호기심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직 그녀가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나·
그 의도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며칠간 봐온 그녀는 정말 성실히 포트먼의 행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타인일진대 말이다·
남의 편지를 읽는 일이 참 무도함은 알고 있으나 엘릭은 당장 떠오른 호기심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했다·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상념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편지에 부친에 관한 단서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떠오른 참이었다·
손길은 자연히 편지를 누르는 밀랍 위를 향했다·
손톱으로 겉을 긁다가 또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노려보고·
그런 일을 하던 엘릭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밀봉을 떼어버렸다·
행동력이 일을 친 것이다·
짧게 후회하다가도 이내 엘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뜯어버린 거 내용이라도 확인해봐야지·’
혹 개인적인 내용을 엿본 일로 사과하게 되어도 그게 덜 억울하지 않겠나·
더 미안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여하튼 편지의 내용물이 엘릭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소년처럼 기대감과 죄악감 사이에서 두근거림을 느끼던 엘릭은 직후
‘이건····’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