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새해 첫 달의 끄트머리다·
엘릭은 티리아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치곤 꽤 오랜 시간을 들인 이후에나 베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꼭 기사 서임식이 있기까지 일주일을 앞둔 날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라는 이유를 들었으나 결국은 변명이지·
결국은 겁이 많았던 것이다·
엘릭은 마침내 허먼 영감의 대장간에 홀로 찾아간 날 그 사실을 깨달았다·
“종자 정말 하고 싶으냐?”
참으로 어려운 말인 줄 알았다·
한데 과거의 그림자를 곁에 두는 것은 그리도 두려운 일이었을진대 막상 해내고 나니 참으로 별거 없던 게 아닌가·
결국 스스로 해낸 말처럼 도망치려 했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베론은 그 소년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얼마나 허탈한지·
“정말요···?”
베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꿈결에 젖어 몽롱한 미소를 띄워 냈다·
그러다 주홍 눈동자를 맑게 태워 올렸다·
“싫으냐?”
“싫긴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
“그래! 나도 들었다· 이놈아!”
조손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참으로 다정하다·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저러다 뒤로 넘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방방 뛴다·
웃음이 나왔다·
이제 엘릭은 그의 얼굴에서 다른 걸 봤다·
전장에서 원독에 차 스러지던 소년병 대신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래 위빈의 탕아 엘릭 포트먼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어울릴 것이다·
“아참! 엘릭 혀···아니! 영주님! 다음 주 서임식에 저도 참여하면 되죠? 복장은요? 저도 갑옷을 입나요?!”
“나보다는 영감이 더 잘 알겠지· 영감 손자를 멋진 모습으로 서임식에 데려와 주시오·”
“아 믿고 맡겨라! 내 손자라 그러는 게 아니고 이놈이 천상 갑옷 입을 체격이다!”
“기대하겠소· 그럼 나는 가보지· 다음 주에 보자 베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사뭇 가볍다·
무릎이 본격적인 회복기에 들어섰기 때문일까?
‘···아니·’
이제야 외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소년과 그의 아버지를 그 외의 수많은 사람을 죽여놓고도 뻔뻔하게 내일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지·
염치없게도 그런 일을 바라게 되었다·
엘릭은 품 안의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버릴 수 있게 되는 날이 내게도 올까·
더 이상 과거가 나를 붙잡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
평생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왜인지 그 생각이 바뀌고 있다·
한결 발걸음이 조급해진다·
그런 마음이 연신 한 사람을 향하고만 있어서·
“부인!”
저 멀리 저택 화단에 나와 있는 티리아가 보인다·
엘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티리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잘 끝내고 오셨는지요·”
라고 물음에 엘릭은 답하였다·
“이제야 끝낼 수 있게 되었소·”
공적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내뱉은 답이었다·
*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기사 서임식 당일·
올겨울 참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위빈 영지에 근 몇십 년간 없었던 대축제가 벌어졌다·
기사·
시대가 변하며 그 빛이 바랬다곤 하나 여전한 웅장함이 남아있는 이름이다·
영주의 검 영지민의 방패 그리고 영지의 힘·
그 낭만을 우러러보지 않는 자가 이 위빈에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만큼 영지의 중앙광장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영지의 새로운 기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 좋은 날·
구태여 이 축제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사람을 꼽으라면 둘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가 전 영주 가였던 위빈가 거기에 하나를 덧붙여·
“아이고 내 팔자야·”
기사 서임을 받는 당사자들 되시겠다·
“아이고오···!”
쿵! 쿵! 다날은 풀 플레이트의 가슴을 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사 서임을 앞둔 전 월영의 페르딘 지부 암살자들은 하나같이 죽상을 지으며 초상집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결국 왔구나!
제 발로 노예 계약을 완수하는 날이 기어코 와 버렸구나!
“단장···!”
이젠 정말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버린 다날은 부하들의 부름에 괜히 심경이 예민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울컥 화가 차오르지만 죄도 없는 부하들을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
결국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얘들아 살아야 한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이다·
다날은 생각했다·
아 과연 그 극악한 검귀 카샤가 우리를 어찌 다룰까·
기사라는 이름을 달고 기사다운 일을 할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두려운 미래만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영주란 무엇인가!
앞으로는 영지를 돌보는 현명한 지도자를 연출한다 한들 결국 수면 아래로 추잡한 전쟁을 해대는 위정자들의 총칭이다·
그 아귀다툼 속에서 자신들이 하게 될 일이 기사다울 가능성은 아주 적지 않겠는가·
하물며 영주가 그 검귀 카샤인데 말이다·
또 뼈 빠지게 구르기나 하겠지·
당사자인 엘릭이 아무 생각도 없음을 모르는 다날은 당장이라도 목을 매달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막사를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앳된 얼굴과 그렇지 못한 떡대를 가진 풀 플레이트의 소년이 환히 웃으며 막사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 저놈이 그 종자·’
대체 어쩌라는 걸까·
저놈도 암살자로 만들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저놈 몰래 움직이라는 말일까·
아니 사실 저놈도 감시역인 거 아닌가?
다날은 의심암귀에 사로잡혔다·
“어 왔냐·”
“종자를 맞게 될 베론이라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이 위빈의 제일가는 대장장이시며···!”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하는 꼴이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게 보인다·
열정적이다·
다날의 속에서 저 소년이 카샤의 귀일 가능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베론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전 월영들은 서로 눈짓을 나누며 의논을 이었다·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저놈만 불쌍하게 된 거지·’
‘너무 어린데 쟤라도 여기서 나가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카샤의 귀에 우리가 저놈을 괴롭혔다는 말이 들어가면?’
‘괴 괴롭히자는 게 아니고····’
‘아서라· 카샤 그놈이 좀 악독하냐·’
일단은 모른 척 같이 지내기라도 해볼까·
그런 결론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들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멋진 기사님이 되셨잖아요! 갑옷도 다들 잘 어울리세요! 저도 언젠가는 이 갑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열정 그리고 열망 또한 동경·
순박한 시골 청소년 베론의 빛에 전 월영들의 마음이 기울었다·
주로 측은지심 쪽이었다·
‘단장··· 쟤 너무 착한데요?’
‘카샤의 간자일 가능성이····’
‘간자는 무슨! 그 악독한 카샤라면 분명 우리한테 이 애의 암살자 교육을 시킬 거예요! 저 애는 희생양이라구요!’
부하 중 유독 잔정이 많았던 리키가 재고를 부탁했다·
다날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만약 정말 암살자 교육을 시키기 위해 저 애를 우리 밑으로 넣은 거라면···!’
이미 암살 업계를 손 씻고 나온 몸·
또다시 악의 연쇄를 이어나갈 수가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다날은 스스로도 연유를 모를 묘한 정의감에 사로잡혔다·
약자가 되어봐야 남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 인간의 간악한 습성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다날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년·”
“예 옙!”
“지금이라도 도망치도록·”
“···예?”
“아픈 나날이 기다릴 거다· 너는 평생 오늘의 일을 후회할지도 몰라·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 도망쳐라·”
다날의 표정이 사뭇 엄격하고 근엄해졌다·
하나 그의 화법이 문제가 되었다·
“단자아앙···!”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베론은 그의 근엄함에서 기사로서의 책임감을 엿보았다·
베론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견뎌 보이겠습니다!”
쿵!
베론이 무릎을 꿇고 다날을 올려다봤다·
“그게 기사니까!”
다날의 속에 측은함이 가득 들어찼다·
“···미련한 놈·”
그는 차마 베론을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이 역시 베론에게 기사의 근엄함과 어른의 멋들어진 씁쓸함으로 보였음은 그가 모르는 일이었다·
오해는 깊어지고 있었다·
*
엘릭은 마을 광장으로 나와 전 월영들의 기사 서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순서야 지루한 연설을 끝내고 이 자리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대망의 서임식 검을 기사될 자의 어깨에 얹는 것으로 끝·
지금이 바로 그 순서였다·
엘릭의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이놈들은 뭐 이리 몸을 움찔움찔 떨어대는지 원·’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아는 건가?
어깨에 검을 얹을 때마다 안색을 새파랗게 만들며 움찔거리니 참 보기에 좋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시야에서야 안 보이지만 이런 반응을 이어갔다간 뒤에 있는 티리아에게 의심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엘릭은 자중하라는 뜻으로 검을 조금 더 지긋이 눌렀다·
“에으····”
다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엘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놈들이 기사질을 잘 할 수 있을는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는 엘릭은 몰랐다·
이들이 이리 겁먹은 이유가 정말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여하튼
“이로서 서임식이 끝났소! 오늘부로 위빈 영지의 기사단! 설영 기사단이 정식으로 창설되었음을 선포하오!”
“와아아아아!!!”
어찌 되었든 서임식은 그리 무사히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