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차다·
보통 이맘때쯤이 되면 조금씩 기온이 올라간다는데 올겨울은 유독 한파가 지독하다·
덕분에 밭이 꽝꽝 얼어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설까지 온통 불어대니 영지가 마비되었다·
침묵의 계절이었다·
모든 영지민들이 벽난로에 기대 집 안에서 생활하는 일이 잦았다·
그나마 영지의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눈발에 남긴 작은 발자국이 유일한 인기척이다·
그런 날이었다·
“영주님! 망토가 완성되었습니다!”
일전 마수 사냥 때 잡아둔 마수의 가죽을 빼돌려 주문한 망토가 완성되었다·
새까만 털이 반지르르 윤기를 자아냈다·
질감이 보드랍다·
엘릭은 이 망토를 입을 사람을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
낯간지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엘릭의 행태는 평소와 조금 달라졌다·
아침 식사 때부터 그랬다·
“한동안은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영지 전체가 쉬어가는 시기라·”
빵과 베이컨 그리고 달걀·
간단한 식사임에도 여느날과는 달리 깨작대며 잘 먹지 않았다·
엘릭은 그저 흘금흘금 그녀를 살피며 말을 흘려들었다·
생각하는 일은 역시 털망토에 관한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전해줘야 할까·
그냥 입으라며 줄까? 그도 아니라면 생각해서 제작했다고 생색이라도 낼까·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자는 너무 무심해 보여서 후자는 너무 찌질해 보여서였다·
엘릭은 적당히 생색을 내고 싶었다·
그리함으로서 당신이 신경 쓰인다는 티를 내고 싶었다·
직접 말로 하면 되지 않냐 묻는다면 그가 할 말은 없었다·
구태여 이유를 붙이면 부끄러움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은 그의 인생에 남에게 선물 따위를 전해줄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어렸을 적엔 철부지 도련님 커서는 남에게 칼침을 놓는 살인자·
감사함이나 호의를 물질의 형태로 남에게 전하는 일은 그에겐 꽤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을 끙끙대게 된다·
덕분에 오늘의 악몽은 꽤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가주·”
“음 아·”
“오늘따라 유독 멍하십니다·”
“그····”
하며 말꼬리를 늘리던 엘릭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잠자리가 좀 춥더구려· 덕분에 설쳤소·”
“난로를 더 강하게 떼라 이르겠습니다·”
“고맙소·”
사실 잠자리는 더웠다·
이 이상 더워지면 그때야 말로 온도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알디오에게 따로 일러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
일이 없다는 말은 정말인지 웬일로 티리아가 집무실에 오지 않았다·
알디오에게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물으니 답이 돌아왔다·
“서재에 계십니다· 독서 중이시지요·”
그러고 보니 아픈 와중에도 백과사전을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지·
“찾아가시겠습니까?”
“할 일도 없으니 나도 책이나 읽으러 가보겠네·”
“도련님이요? 책을?”
알디오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전장에서 떠난 이후로 꽤 오랜만에 보는 표정·
엘릭은 눈을 좁혔다·
“왜 그렇게 보는가?”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몸 곳곳을 살피는 모습이 작지 않게 속을 긁는다·
하지만 울컥 성을 낼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엘릭 포트먼과 독서는 평생 인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너무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가보겠네·”
절뚝절뚝 자리를 떠난 엘릭은 그대로 서재 앞에 당도했다·
안쪽에서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거라·
적당히 위엄있고 굳은 목소리·
하인을 부릴 때의 어조였다·
이런 목소리를 들은 일이 그리 적지 않음에도 대상자가 자신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엘릭은 괜히 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티리아가 보였다·
“···가주?”
그녀가 크게 눈을 떴다·
평소랑은 다른 차림새였다·
한껏 뜨인 눈 위로 알이 동그란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편한 드레스 위로는 갈색의 숄이 둘려 있었고 머리는 뒤로 땋아 둥글게 만 형태였다·
귀밑머리가 삐죽삐죽 빠져나와 있는 게 괜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주께서 어인 일로 이곳에?”
그녀도 알디오와 마찬가지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엘릭은 괜히 속상해졌으나 티를 낼 순 없었다·
다만 앞으로는 남들 앞에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부인께서 이곳에 있다 해서 들렀소· 할 일이 없으니 무료한 게 아니겠소·”
하며 엘릭은 그녀의 곁으로 가 앉았다·
소파가 커다래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다·
“한데 웬 안경이오? 눈이 안 좋았소?”
궁금했던 점을 묻자 그녀가 “아”하는 소리를 냈다·
“마도구입니다·”
“음?”
“지난 수도행 때 왕녀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더군요·”
아 엘버스의 안배가 이렇게 가시적으로 돌아오는군·
확실히 티파티를 좋아하는 페르딘의 왕녀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일이 기억나고 있었다·
“···안 어울립니까?”
머쓱해 하는 듯했다·
엘릭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지적으로 보이오· 눈걸이 하나로 분위기가 참 달라져 조금 놀랐을 뿐·”
“음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어느새 티리아의 책이 덮혀 있었다·
뭘 보고 있었나 싶어 커버를 보니 소설이다·
그것도 민간에 꽤 돌아다니는 통속 소설·
“이런 소설도 좋아하시오? 의외로구려·”
“시간을 떼우기엔 좋지요· 생각 없이 볼 수 있어서·”
“나는 부인이라면 역사서나 시집을 읽을 것으로 생각했소·”
킥킥대며 말하자 티리아가 조곤조곤 답했다·
“주기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하나 교양은 공부의 영역이니 여가엔 즐기지 않을뿐·”
“다행이구려· 그게 나만 재미없는 건 아니어서·”
“가주께선 조금 더 읽으셔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엘릭이 물끄럼 티리아를 바라봤다·
장난이겠지?
“몇 가지 추천드려도 되겠습니까?”
···장난이 아니었군·
괜한 섭섭함과 별개로 이쯤 되니 정말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일었다·
추천을 부탁하니 그대로 일어선 티리아가 고민도 없이 책 몇 권을 뽑아왔다·
“음·”
제목부터 끔찍하게 졸려올 것이 분명한 역사서였다·
“혹여 있을 귀족분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자주 화제로 오가는 책들입니다· 쉬운 것들이니 금방 외실 겁니다·”
“읽는 게 아니라 외우는 것이었구려·”
“아는 척을 하기엔 그쪽이 더 쉽지요· 이해는 기억보다 훨씬 힘든 일이니 말입니다·”
엘버스 같은 소리를 한다·
그게 웃겨 피식 웃으니 티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괜히 앙증맞아 털 망토의 일이 또 떠올랐다·
“자 읽어보시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테니·”
“음 알겠소·”
왜인지 더워지는 기분에 엘릭은 그녀를 더 바라보지 못하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자가 좁쌀만 했다·
그걸 집중하며 한 글자씩 삼키니 괜히 주변 것들이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벽난로가 장작을 갉아 먹는 소리·
그녀의 숨소리와 숄의 따스한 냄새·
그리고 조곤조곤 어느 기점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하며 그녀가 일러주는 말·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
“···가주?”
졸렸다·
*
왜인지 포근하고 따스한 냄새에 엘릭은 뒤늦게 눈을 떴다·
시야가 이상했다·
끔뻑끔뻑 눈을 깜빡여 보니 천장과 티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뒤통수가 말캉하고 왜인지 시야를 가리는 옷의 굴곡이 있었다·
멍하고도 맑은 머리로 생각한다·
‘꿈을 안 꿨다?’
그만큼 깊게 잠들었다는 말이다·
이만큼 깊게 잔 게 얼마 만이지?
인지하니 머릿속이 사뭇 개운해진다·
그렇게 눈빛이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시각 정보가 드디어 하나로 규합되며 현 상황을 엘릭에게 일렀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었음이 뒤늦게야 인지되었다는 말이다·
“으헉!”
인사말에 엘릭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티리아는 말했다·
“간밤은 정말 못 주무셨나 보군요· 금방 잠드시기에 두었습니다· 실례였을까요?”
아니 실례는 내가 했는데·
“···아니오· 면목 없구려·”
책을 읽다 잠들다니 이 무슨 부끄러운 꼴이란 말인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게 차라리 다행으로 느껴졌다·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려 시계를 보니 세상에 두 시간이나 지나있다·
그동안 계속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던 건가?
뒤통수의 감각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시선이 그녀의 허벅지로 닿으려 했다· 그 외에도 시야를 가로막던 굴곡이 떠오른다·
뺨이 더욱 화끈거린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엘릭이 그리 정신을 다잡던 중이었다·
“일단 나가실까요·”
티리아가 물어옴에 엘릭은 창밖을 살폈다·
눈이 그쳐있었다·
먹구름이 사라지니 쾌청한 하늘이 보인다·
“밖으로 말이오?”
“예?”
“아 그 말이 아니었구려·”
그냥 서재를 나가자는 말이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차였다·
‘···잠깐·’
맑아진 머리가 도운 것인지 좋은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그녀에게 선물을 건네주려 하지 않았나?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다는 말이다·
“부인·”
“예·”
“바깥 바람이라도 좀 쐬는 것 어떻소? 졸음기도 달아낼 겸·”
넌지시 화두를 던지니 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