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의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누군가를 대하며 몸이 먼저 반응한 일도 눈을 마주하는 게 힘들어 고개를 숙이는 일도 또한 그런 스스로가 바보 같게 느껴지는 일도·
그 모든 것이 이그렛의 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저를 부르셨는지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그 외의 모든 소음이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네에····”
이그렛은 살아생전 가장 소녀다운 목소리를 냈다·
그리한 후 당황했다·
‘뭐 뭐야 씨발····’
목소리가 왜 이러는데·
왜 이렇게 가늘고 작게 나오는데·
이그렛은 평소 호방하게 욕을 뱉어내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괴리감에 치를 떨었다·
하나 그리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음 마법사님이 맞으십니까?”
“네에····”
“저희 영지에 볼 일이라도?”
어찌 저리 관찰력이 좋을까·
당신이 포트먼이 안주인이냐는 말 그리고 자신의 로브·
단서는 2가지 밖에 없을 터인데 그새 인과를 엮어 답을 도출해낸다·
그 영민함이 이그렛의 박동을 더욱 어그러트렸다·
“그 그러니까····”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덥기는 또 왜 이렇게 더운지 냅다 로브를 벗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도 없었다·
이곳이 동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유명인이기 때문이다·
혹여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가 ‘염화 이그렛이 동부에 있다!’ 따위의 기사가 나버리면 칼바란은 그대로 침략에 노출된다·
이그렛은 와중에도 그런 걸 신경 써 로브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 그쪽 저택에 아는 사람이 있어··· 요·”
왜인지 존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그렛은 몸을 웅크렸다·
여인은 다소곳이 손을 앞으로 모으곤 짧게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만남인지라 미처 예를 다하지 못했군요· 위빈을 다스리는 포트먼 가의 티리아입니다·”
티리아 포트먼·
티리아 포트먼·
티리아 포트먼·
이그렛은 그녀의 이름을 연신 속으로 되새겼다·
절대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이··· 이그·”
“이그?”
“내 이름··· 요·”
티리아는 “아” 소리를 내곤 다시 한번 예를 다했다·
“이그 마법사님이시군요· 일단 마차에 오르시겠습니까? 마침 볼일이 끝난 터라·”
마법사는 희귀 자원이다·
개중에서도 금장 로브를 두른 마법사는 대륙 어딜가도 환영받는 고급 인력 중 하나였다·
산업의 발전으로 그 효용이 떨어졌다 한들 여전히 귀족이나 다름없는 것이 상급 마법사·
티리아로선 그녀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이그렛으로선 그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철들기 전부터 금장 로브의 마법사였고 또한 평생을 남에게 대접만 받아왔던 게 그녀다·
대접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처지에 마침 상대가 연유도 모르게 신경 쓰이고 있으니·
‘나 나한테 관심 있나?’
여인끼리가 어쩌고 상대가 유부녀고 하는 문제를 넘어 본능의 영역에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바람일지도·
“고 고맙··· 요·”
이그렛은 혼란 속에서 겨우 그런 말을 토해냈다·
스스로의 마음이 왜 이런지 도통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중 티리아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마차 쪽으로 이그렛을 안내했다·
이그렛은 몰랐다·
‘가주의 말씀대로 마법사는 참 희한하구나·’
티리아가 그녀의 태도를 괴이하게 여기고 있음을·
그 원인이 오늘의 목적인 카샤임을·
-마법사는 대체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편이오· 지난 10년 만난 마법사 중 제정신인 자가 단 하나도 없었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비밀이었다·
*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길을 느릿하게 달리는 중 이그렛은 연신 옆자리의 티리아를 흘금거렸다·
말수가 많지 않은 그녀 덕에 생각을 정리할 틈이 조금 생기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이그렛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빠르게 뛰는 박동을 느꼈다·
대체 왜 그녀 앞에서는 이렇게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조 좋아해? 내가 여자를?’
설마 이제까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던 게 그 이유인가?
성 정체성이 그리 어그러져 있어서 노처녀가 되었던 건가?
‘···아니야·’
그건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 않나·
보통 연애 결혼 따위를 생각하면 상대와 이렇고 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 것이다·
한데 이그렛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에게 손대고 싶지 않은 기분·
손대는 일이 하늘 아래 해선 안 될 대죄로 느껴지는 기분·
그녀가 현 상태를 유지했으면 한다·
고귀하고 아름답고 또한 우아한 저 모습 그대로 영원히 정지해 있으면 했다·
그걸 달리 표현해·
‘동경?’
아마 그런 감정이 아닐까·
썩어도 준치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대마법사는 스스로의 감정에 금방 답을 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우상화였던 것이다·
언제나 만인의 우상이었던 이그렛은 생애 처음 남을 우상으로 모시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에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한데 찾으신다는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으 으응···?”
“저택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즉슨 사용인 중 지인이 있다는 것일 텐데 저희 저택 사용인 중엔 마법사님과 연이 있을 법한 이가 없는 터라·”
그러시겠지·
이곳까지 숨어들어온 카샤의 용의주도함을 생각해보면 섣불리 정체가 발각될 일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또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카샤가 이 여자를 노리고 있다면?’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 여인이 그 악독한 귀신에게 더럽혀진다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소름이 끼쳐왔다·
이그렛은 고개를 흘긋 들었다·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티리아를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지켜줄게···!’
운명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이리라·
그런 생각까지 떠올리며 이그렛은 답을 이었다·
“겨 결혼···! 요!”
카샤 같은 너저분한 사내는 자신이 몸소 받아내고 그녀를 아름다운 이 모습으로 지키겠다!
“결혼··· 아 혼인을 약속한 사이입니까?”
“대충···?”
“놀랍군요· 마법사님 또래라면 론? 데인? 아니면 음··· 기사 중에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이제까지 중 가장 긴 말이 나왔다·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있는 걸까?
어조도 좀 더 산뜻해졌다·
뭔가 소녀다워서 좋다·
“그 가명을··· 쓰고 있을 것 같은··· 요·”
헤실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수줍게 답하자 티리아의 손끝이 움찔했다·
아차 가문의 사용인이 가명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미심쩍을 수도 있겠다·
“데 데려갈··· 요·”
거슬리는 것은 눈앞에서 치워주겠다·
그런 의미로 말하자 티리아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한 시골 영지라 부끄럽습니다· 가주께 일러 보안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군요·”
“가주라면····”
“아 저희 남 편····”
왜인지 남편이란 단어를 내뱉는 순간 티리아의 뺨이 붉어진 것만 같았다·
표정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영주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타인이기에 그리고 그녀의 작은 반응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아는 사실이었다·
‘죽일까?’
남편이란 작자를 죽여야 할까?
이리 아름다운 티리아에게 손을 댄 후안무치한 자라면 갈가리 찢어 죽이는 게 옳은 법도가 아닐까?
‘그래 죽이자·’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 도착했군요·”
마차가 멈췄다·
창 너머로 작고 고즈넉한 저택이 보였다·
이그렛에겐 변방의 별장 수준으로 보이는 저택이었다·
‘이런 작은 곳에서 살다니····’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결정 영주를 죽이고 티리아와 카샤를 데려가자·
이그렛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티리아가 이어 내렸다·
“잠시·”
티리아가 손을 뻗어 이그렛을 지그시 붙잡았다·
그 순간 열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소곤소곤 전신으로 퍼진다·
등골이 짜르르 울리는 묘한 쾌감이 치솟는다·
배덕감은 덤이었다·
“읏····”
하고 소리를 흘리는 순간이었다·
“···부인·”
소름끼치게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살기가 이그렛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티리아는 모르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가주님· 저택의 손님이십니다·”
“손님이라····”
“가주?”
익숙한 목소리다·
사내의 목소리가 이그렛에게 너무 익숙했다·
한데 그와 티리아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너무 이상하다·
또한 이 살기가 이상하다·
‘어···?’
고개를 든 이그렛은 볼 수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 서 있는 기억 속 이목구비 그대로의 사내를·
그럼에도 멀끔하게 차려입어 기억과는 다른 사내를·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카샤 카샤가 눈앞에 있었다·
예상치 못한 형태 직위에 앉아서·
“마법사님 저희 가문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까 저자가 카샤가 티리아의 남편이란 말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와중에도 카샤가 다가온다·
지팡이를 짚으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숨 막히는 살기로 전신을 찍어누르며·
그렇게 코앞까지 와서는·
“이리 오시오·”
거칠게 티리아를 낚아채 품 안에 가둔다·
이그렛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죽일 것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샤가 있었다·
“···여기까진 어인 일이신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목을 옥죄는 감각·
그의 살기겠지·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을 적대하는 것에 가장 먼저 의문이 들어야 할 텐데·
아니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이 의문스러워야 할 텐데·
또한 이 살기를 걷어내기 위해 발악해야 할 텐데·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고 오로지 하나의 생각 장면이 이그렛의 속을 가득 메웠다·
“어····”
티리아를 지키겠다는 듯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살기를 뿜어내는 카샤·
그 품에 안겨 새빨개진 얼굴로 토끼처럼 크게 눈을 뜨는 티리아·
그리고 그 뒤로 고즈넉한 저택·
보면 볼수록 한 폭의 그림 같은 또한 누군가의 망상 같은 이상적인 광경·
이그렛은 이제야 깨달았다·
‘아 나 이런 거 좋아했네·’
자신이 지독한 얼빠라는 것을·
이쁘고 잘생기면 뭐든 좋은 쪽이라는 것을·
그녀는 홀린 듯 말을 흘렸다·
“오랜만····”
그리고
“···!”
그 말에 티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그렛이 이곳에 온 목적이 혼약자를 데려가기 위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
‘저년이 왜 여기에?’
다날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길을 지나던 중 카샤가 살벌한 표정으로 나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 나온 참이다·
한데 세상에 이럴 수가·
오전에 외출을 다녀온 부인과 함께 온 꼬맹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염화 이그렛인 것 아닌가?
‘···좆됐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분명 오늘 중으로 누구 하나의 목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니라·
다날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기사단의 막사로 향했다·
“기사단 전워어어어언!!! 집하아아아압!!!”
우렁차게 외치자 종자기사 베론까지 다섯이 자신의 앞에 도열했다·
다날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실습이 있다· 기사단 류 은신술을 하루 동안 유지하라!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척!
다날이 수인을 맺자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눈치 빠른 네 명의 기사는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수인을 맺고 몸을 숨겼다·
베론은····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게 기사지!’
활짝 웃으며 그간 열심히 배운 은신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베론은 오늘도 착실히 암살자로 완성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