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릭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저것이 정말 호의에서 나오는 태도인지 그도 아니면 전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그녀 나름의 전략인지·
동부 위빈에 박혀 있다곤 하나 서부의 소식은 꾸준히 들어온 엘릭이었다·
마왕과 성자의 격돌 그에 따른 서부 국가들의 긴장과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모를 수는 없단 말이다·
하나 당장 전장으로 향할 생각은 없다·
그런만큼 한껏 예민해진 정신은 이 와중 이그렛을 치워내고 티리아를 지켜내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살기를 쏘아내는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과연 7강이라는 것인지 이그렛은 그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그의 살기를 신경 쓸 수도 없었다·
‘참··· 이렇게 뜨겁게 쳐다보면 곤란한데·’
이그렛은 홍조를 짙게 만들며 차를 호록호록 마셨다·
엘릭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전장에서 만났을 때 이상의 강렬한 눈빛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멀끔하고 잘생긴 얼굴·
부담스러움이 치솟다가도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
‘···설마?’
아직도 날 좋아하나?
이렇게 부부 생활을 하는 중에도 날 잊지 못한 건가?
이럴 수가! 내가 저 둘 사이의 방해꾼이었다니!
탁!
이그렛은 황망한 기색으로 찻잔을 떨궜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오만한 마법사의 사고방식이었다·
엘릭이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
“미안!”
이그렛은 그 말을 낚아챘다·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고개까지 홱 돌리며 내뱉는 말은 그랬다·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너희들은 둘이 붙어 있을 때가 제일 보기 좋으니까!
나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아니 지켜보고만 싶으니까!
“날 잊어줘!”
결연함으로 똘똘 뭉쳐 외친 말·
소통의 부재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엘릭으로선 황당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기분 나쁘다·
소름 끼친다·
그런 마음이 있어서 그리고 의문이 한껏 떠올라·
“대체 무슨 좆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오?”
용병 시절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상대이니 그냥 칼이라도 뽑아서 협박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런 생각까지 떠오른 순간이었다·
똑똑―
-도련님 소 소 손님이···!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건지 또 다른 방해꾼이 왔다·
*
응접실이 붐볐다·
분위기는 장례식을 방불케 하는 암울함이 가득했다·
분노에 찬 엘릭·
불안감에 찬 티리아·
꽃밭에 있는 이그렛과 공포에 떠는 에드워드·
그 모든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엘버스와 중절모를 꾹 눌러쓴 황자까지·
동상이몽의 현장이라 이 손님 중에서 유일하게 제 진짜 정체를 밝히고 있는 엘버스가 말했다·
“이야 날을 잘못 잡았나보군· 이리 복닥거릴 줄은 몰랐어·”
엘버스의 시선이 한차례 주변을 훑었다·
엘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드워드는 변장이 들키지 않도록 수염을 고쳤다·
“내 지난 연회에서의 만남이 인상 깊어 잠시 방문한 것인데 혹 실례가 되었겠나?”
“···미리 말해주었으면 대접에 신경 썼을진대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오·”
“놀래켜주고 싶었네·”
엘버스는 엘릭의 말을 부드럽게 넘기며 이어 말했다·
“일단 온 목적부터 말해야지· 내 이분을 소개시켜 드리러 왔는데··· 잠시 따로 얘기를 좀 할 수 있겠나?”
엘버스가 황자를 가리켰다·
하관뿐이라곤 하나 엘릭은 그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만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곧 저녁 식사가 있으니 잠깐이라도 좋다면·”
“좋군 그럼····”
엘버스의 시선이 이그렛과 에드워드를 향했다·
에드워드가 나섰다·
“어 저는 여기 마법사님을 찾아뵈러 온 것이라서·”
“엉? 나?”
이그렛이 불량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에드워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래! 너요! 너!’
얘기도 제대로 듣지 않고 곧장 휙 날아가 버린 이그렛 탓에 이런 사고까지 터졌으니 울분이 한껏 차오른 차였다·
앞에서 그걸 티낼 수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었다·
그는 주주에게 반항할 만큼 간이 크지 못했다·
“좋군· 그럼 이쪽 신사께선 마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우리는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이대로 이그렛의 입을 먼저 막을 생각이었다·
황자 쪽 목적이야 엘릭의 꼴을 보니 이뤄지지 않을 듯하고 그렇다면 신경 써야 할 것은 엘릭 본인 쪽이겠지·
‘살아야 한다· 일단 머리부터 박을까? 다행이야 이 여자가 다짜고짜 마법부터 쓰지 않아서·’
어떻게든 엘릭을 진정시키고 사과까지 하면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마무리 된다·
그러니 이제 슬슬····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티리아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고요한 기색으로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주님과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특히 엘릭이 크게 당황했다·
쿵 쿵·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임을 알았다·
평소라면 절대 큰 손님들을 따로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티리아는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이기적인 이유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소 손님들은 방으로 안내해드리라 했소·”
말하는 엘릭의 표정이 사뭇 어색했다·
자세도 조금은 구부정했다·
티리아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가주·”
“말하시오·”
“설명이 필요한 상황 같습니다· 저 손님들에 대해서·”
사실 돌아올 답이 두려웠다·
혹시 정말 소녀의 말대로 두 사람이 혼인을 약조한 사이라면·
자신은 모르는 곳에서 두 사람 사이에 추억 따위가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버려지게 된다면·
자연히 입술이 떨림을 머금었다·
그런 스스로가 부끄러워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과거는 묻지 않기로 했는데·”
이리 추하게 매달리는 나를 어찌 생각하실까·
티리아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궜다·
머리칼이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
그에 엘릭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들은····”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적었다·
저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지난 10년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싫었다·
엘릭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중에도 티리아의 저런 모습에 속이 아릿해졌다·
죄악감이었다·
거짓으로 스스로를 꾸며왔다는 사실에 또한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저리 눈에 띌 정도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랬다·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 내뱉는 말은 급하게 지어낸 형태였다·
“저기 그레이엄 공자와 만남은 부인도 아시는 대로요· 마법사는 여행 중 알게 된 이요· 별 사이 아니오·”
허술한 미봉책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거치지 않은 변명은 대체로 허점투성이인 법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완전치 못한 설명은 오해를 짙게 만들 뿐이었다·
“···혼약을 약조한 게 별 사이가 아니라면·”
티리아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다·
“저는 대체 뭡니까?”
엘릭은 그런 표정을 처음 봤다·
그녀는 아득한 절망감에서 허우적대는 사람 같았다·
답을 갈구하는 얼굴 위로 티리아는 슬픈 형태의 주름을 그려냈다·
정말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가냘프고 애처로웠다·
그녀 특유의 신비로움이 그 위로 덧씌워지니 엘릭의 망막에 새겨지는 것은 절망을 그려놓은 한 폭의 유화와도 같았다·
하나 그런 점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그랬다·
“?”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
에드워드는 이그렛을 질질 끌고 저택 뒤편으로 나왔다·
그제까지 순순히 끌려오던 이그렛이 말했다·
“이제 놓지?”
성난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곧장 손을 뗐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누니이이임!!!”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실제로 에드워드의 눈망울은 그렁거렸다·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자의 공포에 질린 낯빛은 그리도 처절했다·
하나 이그렛이 공감할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 추운 한겨울에도 꽃밭 속에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편이라 위로의 말을 해주니·
“걱정마· 카샤한테 말곤 정체 안 들켰어· 내가 그 정도 생각도 없게?”
“그게 문제라고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떽떽거리지 마· 시끄럽게·”
이그렛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런 중에도 카샤와 티리아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직전 응접실에서 나란히 앉아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니 또 그새 히죽히죽 미소가 떠올랐다·
“야 비실아·”
“예···?”
“걔 둘 진짜 잘 어울리지 않냐?”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실실대기나 하던 이그렛이 이어 내뱉는 말은 그랬다·
“내가 원래 카샤 그놈 데리고 가려고 했거든? 근데 둘이 있는 거 보니까 도저히 못 끼어들겠는 거야·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지· 근데 어라? 카샤가 나한테 미련이 있는 것 같네? 난 이걸 좀 확실하게 끊고 싶단 말이지·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일단 에드워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여 그가 떠올린 생각은 그랬다·
‘미친년인가?’
아니 맞구나·
돌이켜보니 염화 이그렛은 서부에서 정평이 난 미친년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들을 가치가 있나?
생각하면서도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대주주는 신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내가 마침 그 부인··· 으헤헤··· 부인 분이랑 얘기하면서 변명으로 내뱉은 말이 있거든? 여기 약혼자 찾으러 왔다고· 그러니까 그 약혼자 역할로····”
휙!
이그렛이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웬 말라깽이 기사 하나가 튀어나왔다·
“으헉!”
“···이놈을 쓰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놈도 포기하지 않을까?”
그는 설영기사단의 부단장 리키였다·
들키게 된 이유야 뻔하지 않나·
곧 죽어도 7강 고작 암살자의 은신을 못 알아챌 수가 없는 법이다·
“야 기절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
리키는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불지옥의 사신이 히죽 웃고 있었다·
리키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몰랐다·
그저 다날이 숨으랬기에 숨었고 하필 숨은 자리로 이들이 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들킨 것이다·
아 한 많은 생도 여기까지 구나·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너 내 약혼자 역할 좀 해줘야겠다·”
이그렛의 말에 리키가 멍해졌다·
“네? 제가요?”
그런 답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