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는 몰라도 티리아가 큰 오해를 품고 있다는 것만큼은 자명했다·
엘릭은 그것부터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인 아니····”
“죄송합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티리아가 말을 가로챘다·
푹 숙인 고개나 꽉 쥐어진 주먹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당장은 무슨 말을 들어도 좋게 듣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티리아가 끝내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가 말을 뭉뚱그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흔들리자 엘릭으로서도 당황스러워졌다·
당장 붙잡아 대화해야 하건만 그녀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집무실 문을 향했다·
“잠시 단장을 고치고 오겠습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보낼 수 없었다·
하여 엘릭이 덥썩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마님· 마법사님이 접견을 요청하셨습니다·
말과 동시에·
-뭐야 그냥 열어·
달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엘릭과 티리아가 동시에 굳었다·
“아 안녕··· 요!”
로브를 푹 눌러써 환히 미소 짓는 입술만 겨우 보이는 이그렛이 한 사내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 남편! 데려가려고!”
한껏 수줍어하는 모습은 누가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에게 붙잡힌 사내였다·
“···부단장?”
티리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부단장 리키는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엘릭도 그랬고 티리아가 특히 그랬다·
혼약자를 찾으러 왔다는 마법사의 말·
엘릭과의 개인 면담·
그리고 지금 당황과 억울함을 내비치는 엘릭·
“···아니라고 했잖소·”
그제야 깨닫게 된다·
‘···아·’
착각이었구나·
마법사의 혼약자는 엘릭이 아니라 저 부단장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기사들은 외부 인사를 초청해온 것이었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렇다면 직전 자신이 했던 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에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것은 차마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지난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과거는 묻지 않기로 했는데·
-···혼약을 약조한 게 별 사이가 아니라면· 저는 대체 뭡니까?
-죄송합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차오르는 것은 수치심이오 자괴감이오 또한 안도감이었다·
쏘아지는 것은 엘릭의 억울함과 이그의 행복함과 리키의 멍함이었다·
철저히 고립된다·
혼자 불안에 떨며 감정까지 토해냈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을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티리아의 고개가 엘릭을 향했다·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화악!
얼굴이 붉어진다·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렁그렁해졌다·
입술은 꾹 다물려 오므라들었고 눈썹은 축 늘어졌다·
그녀의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기념비적인 순간·
“이제 내 말을 좀 들을 생각이 드오?”
엘릭은 그리 말했다·
이그렛은 리키의 팔을 퍽퍽 치며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
“미쳤다! 미쳤어!”
리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 건 너지····’
나한테 왜 그러는데·
*
사건의 경과가 엘릭의 머릿속에 대충이나마 그려졌다·
이그렛이 정체를 숨기고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을 했던 것이리라·
아마 약혼자니 뭐니 하는 말을 했을 테고 티리아가 그 대상으로 10년간 저택에 떠나있던 자신을 지목한 것이겠지·
실제 이그렛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꽤 곤란한 상황이었고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파악해도 되리라·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욱 엘릭의 신경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제 괜찮소?”
“····”
일시적으로 이그렛과 리키 그리고 에드워드를 물린 참이다·
집무실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고 엘릭은 고개 숙인 그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가슴께가 영 뻐근했다·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확실히 망막에 새겨졌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단언컨대 그녀가 지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노골적인 표현의 연속 그 끝에서 보이던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까지·
홀로 마음고생한 티리아를 두고 하기엔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들 하나하나가 되새기면 묘하게 입꼬리를 솟게 하는 표정들이었다·
다시 저 고개를 들면 그 표정들이 보일까·
또한 생각이 치민다·
왜 그렇게까지 슬퍼했던 것이냐고·
나를 어찌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주었느냐고·
당신이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속에서 나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바로 내뱉지는 못했으나 그런 의도가 전해지긴 한 듯했다·
아니면 티리아가 제 발 저린 마음에 주절대는 걸지도 몰랐다·
“···가문의 위신에 좋지 않았을 겁니다· 10년 만에 돌아온 후계자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근 귀족들을 통해 왕국 전체까지 안 좋은 소문이 퍼져나갔을 테지요· 오해라 참 다행이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십시오·”
티리아가 엘릭의 옷자락을 구겨질 정도로 꼭 쥐었다·
엘릭은 그걸 느꼈다·
반듯한 정수리만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기에 문득 말을 흘렸다·
“부인이 듣질 않았잖소·”
“···!”
“내 말도 좀 들어주시구려· 다음부터는·”
티리아의 고개가 더욱 깊숙이 박혔다·
콩 가슴팍에 그녀의 이마가 닿았다·
그나마 드러난 귓불이 그릴에 익힌 것처럼 새빨갛다·
아직도 부끄러움이 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엘릭은 무심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이 잘 해결되었으니 그저 다행인 일일진대 이리 몸을 겹치고 있으니 왜인지 숨이 뜨거워지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본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한껏 치밀고 있었다·
*
저녁식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간 다날은 식탁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서·
‘리키?’
안쪽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고 속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간악한 마녀에게 리키가 잡혀있었다·
월영의 훈련생일 때부터 살아남자 함께 결의를 다졌던 동료가 잡혀있었다·
아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그러니까 그 기사가 남편?”
“응!”
식당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단서였다·
결혼은 무슨 약혼은 무슨 이 모든 건 농간이 분명했다·
생존력과 눈치 하나만큼은 어딜 가도 지지 않는 다날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저것은 추악한 역할극이었다·
리키는 어떤 음모에 빠져있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리키가 희생되고 말리라·
문득 그와의 추억이 다날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우리 꼭 대륙 최고의 암살자가 되는 거야!
-단장이 된 걸 축하해! 아니! 축하합니다! 이제부턴 제가 보좌하겠습니다!
-단장! 우리 또 승진했어! 새로운 지부로 가는 거야!
-월영에서 나왔지만 뭐 어때? 우리는 아직 살아있잖아? 힘내보자고!
함께 살아남자 결의했던 순간들이 별처럼 빛났고 이내 스러졌다·
추억들이 곧 빛바래지리라는 것에 속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대로 숨으면 나는 살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이 함께 해온 동료를 버릴 만큼 가치 있는 목숨일까?
‘아니다!’
다날은 단호히 부정했다·
함께가 아니라면 생존에는 의미가 없다·
결의가 샘솟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쨍그랑!
다날은 창을 깨고 식당에 착지했다·
“뭐 뭐야!”
가장 놀란 것은 이그렛·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악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다날의 눈에 보인 것은 울먹이는 리키였다·
‘단자아아아앙!!!’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다날은 그에게 웃어줬다·
‘걱정마라· 너를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벌떡 일어선 다날은 차례로 카샤 티리아 그리고 이그렛을 바라봤다·
그리곤 이그렛의 앞으로 가 쿵! 무릎을 꿇었다·
“저로는 안 되는 것입니까아아아아!!!”
타오르는 열정을 담아 외쳤다·
다날은 리키를 대신해 볼모가 될 생각이었다·
“어 어···?”
“리키가 아닌 저느으으은!!! 안 되는 것입니까아아아!!!”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그렛이 약혼자 역을 필요로 한다·
일면식도 없는 리키를 그 자리에 앉혔다면 자신도 앉히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수라장이라 해도 좋다·
이들이 자신을 미친 인간으로 봐도 좋다·
부하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은····”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쿵!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에 깨진 유리조각이 박혔으나 다날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사내의 우정은 그만큼이나 끈끈했다·
하나 다날이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 녀석···!”
염화 이그렛 발렌티아는 미치광이다·
서부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녀와 비견될 것이 신성교국의 성자밖에 없다 평해질 정도의 엄청난 미치광이다·
그녀의 사고방식 안에서 다날의 행동은 거짓말을 더욱 견고히 만들 새로운 기회로 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장!”
“리키!”
두 사람이 끈끈한 우애를 나누고 있는 순간
“나 때문에 싸우지마! 둘 다 받아줄게!”
탁! 이그렛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녀의 입매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구경꾼들이야 점점 흥미로워지는 와중
“···예? 왜요?”
다날은 그런 질문을 해버렸다·
희생이 아닌 동반자살이 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엘릭과 티리아의 오해는 확실히 풀렸으니 다행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