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2 책임과 의무 (2)
『사랑하는 딸 티리아 이 아비가 또 편지를 보내는구나·』
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일상적인 인사말로 시작해 안부를 묻고 근황을 이르고 뒤이어 은근하게 목적을 덧붙이는 편지다·
역시 귀족의 편지라는 것일까 온갖 화려한 수사와 비유가 덕지덕지 묻어나 한 번에 말하면 될 걸 빙빙 돌리는데 그 목적지만큼은 너무나 명확하다·
엘릭은 부릅 뜨인 눈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편지를 읽었다·
상황의 맥락을 읽는 재주가 있음이 축복인 걸까 저주인 걸까·
‘이건····’
『10년이면 족하다· 이만 들어와 함께 하자꾸나· 원한다면 새로운 혼처를 찾아줄 수도 있단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그만하고 취할 것은 취해 오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되었잖니·』
편지는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상속된 유산을 취해 돌아오라고·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시선은 여전히 편지에 콕 박힌 채였다·
‘그래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부친은 그 막대한 자산을 모두 현금화해 자신의 앞으로 돌려두었다·
그 속에 그녀를 위한 몫은 없었다·
당연히 억울할 만하지 않나?
보통 사람이라면 유산이 탐 날 것이다·
엘릭은 티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수가 적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품위가 몸에 배어 절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이었고····
‘···고생을 많이 했겠지·’
홀로 긴 세월을 견뎌온 여인이다·
아무렴 남편도 없이 그 삭막한 부친 아래서 9년을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솔직히 유산을 취해도 할 말이 없긴 하다·
엘릭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정당한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는 유산 때문이라 생각하면 편하게 답이 나오기도 했다·
머릿속이 맑게 갠다·
한데
‘왜····’
가슴은 이렇게 먹구름이 가득 낀 것처럼 꽉 막힐까·
위빈에서의 평화로운 시간이 문제였는지 그도 아니면 달콤하고 썼던 첫사랑이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는 어린 마음인지·
조금은 회피적인 발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발상을 부추기는 것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어떤 행동이었다·
‘···유산 때문이라면 왜 그리도 열심히 일했을까·’
엘릭은 그녀가 매일 성실히 밀밭을 살피던 것을 떠올렸다·
아침이면 꼭 식사를 함께 하던 일을 떠올렸고 밤늦은 시간까지 매일 이런 서신들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유산을 취하려면 이미 1년 전에 취해갈 수도 있는 사람이 그리하고 있단 말이다·
돌아온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기엔 그 사이 1년간 게으름을 피운 것 같지도 않았다·
불쾌하게 마음속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부분이 있어 엘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집무실을 눈으로 훑었다·
부친 때와 달라진 것 없는 공간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는 있었다·
엘릭은 책장 어딘가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 여기군·’
그곳엔 편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살펴보니 모두 위빈가에서 온 편지였다·
하나하나 꺼내 읽었다·
그 편지는 모두 1년 전부터 오기 시작한 것들이었고 편지의 목적은 한결같이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유산이었다·
단 한 번도 답신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 편지에는 제발 답을 달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의심한 일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이 모든 일이 이르는 답은 명확하다·
‘지키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녀는 주인이 돌아올지 장담할 수도 없는 유산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디오도 모르는 것을 보면 그녀가 철저히 사실을 숨겼다는 말이 된다· 알디오는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일을 알려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엘릭은 지난 1년 내도록 그녀가 홀로 외로이 싸워왔다는 것에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셨소·’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티리아가 있었다·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릭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더해 그런 궁금증을 좀처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집무실을 나간 엘릭은 말했다·
“알디오·”
“예·”
“영애를 불러주시게·”
그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
티리아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단장했다·
기분은 근래 들어 가장 좋은 상태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근래 들어 항상 기분이 괜찮은 편이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영영 밀어낼 줄로만 알았던 엘릭이 그나마 상대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긴 했지만 이따금씩 미소를 보여줄 때가 있었다·
거짓된 미소일지언정 그것이 향하는 끝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뻐지는 게 아니겠나·
미련하다 욕해도 어쩌겠는가 마음이 저 홀로 떠나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을·
심지어 오늘은 먼저 대면을 요청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되었을까?’
밭을 살피다 급하게 나오느라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몸에서 흙냄새가 날까 걱정되었고 머리칼은 정리가 덜 된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여유롭진 않았다·
“마님 준비는 끝나셨는지요·”
알디오가 문밖에서 말했다·
티리아는 아쉬움을 삼키며 답했다·
“그래 나가마·”
무슨 용건일까·
망상 같은 추측이 머릿속을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혹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말이나 다른 개인적인 용무로 대화를 원하는 것이라면 어찌 응대해야 할까 따위의 생각이 영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나올 만한 용건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미리 준비하며 도착한 곳은 1층의 응접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용건은 이번 역시 티리아의 바람과는 아주 다른 형태였다·
“내 이런 편지를 봤소· 우선 미안하오· 허락도 없이 열어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지난 일 년간 지독히도 그녀를 괴롭혀왔던 친정의 편지였던 까닭이다·
저게 왜 이곳에 있을까 의문에 엘릭이 답했다·
“알디오가 옮기던 서신 사이에 끼어있더구려·”
그것참 공교로운 말이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혹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을까·
유산을 노리고 이곳에 있는 파렴치한 여인으로 여기지 않을까·
온갖 불온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으나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더 찾아봤소· 영애께서 지난 일 년간 이 편지들을 무시했던 일도 대충 알게 됐소·”
기뻐할 수는 없었다·
오해가 없어 다행인 중에도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 있었기에·
‘영애····’
그에게 자신은 여전히 영애였다·
“그저 묻고 싶어 불렀소· 왜 돌아올지 장담도 할 수 없는 내 몫의 유산을 지켜온 것이오? 가지셔도 됐을 텐데·”
그에게 자신은 타인이었다·
유산을 지킨 일이 의문으로 자리할 정도로 머나먼 타인·
괜히 시큰거린다·
첫 만남에서 보였던 냉랭함이 없어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던 심장은 어느새 욕심이 생겨버렸는지 고작 이런 일에 새삼스러운 상처를 받고 있었다·
“말해줄 수 있겠소? 왜 영애께서 위빈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인지·”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다·
잔인한 정도로 무심한 의문으로 가슴을 후벼판다·
그는 잔잔한 얼굴이었다·
분노나 멸시가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
차라리 그리해주면 미움 받는 입장이란 걸 되새기며 마음을 놓았겠지·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얼굴이 참으로 야속하다·
그러니 말하게 된다·
투정에 가까웠다·
티리아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악을 했다·
“포트먼·”
“음···?”
“저는 티리아 포트먼입니다·”
위빈의 영애가 아닌 포트먼의 안주인입니다·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런 뒷말까지 내뱉지는 못했다·
혹여 이 말에 경멸이 돌아올까 두려워 남이 아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까 두려워·
차라리 타인으로라도 남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었다·
다행히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또박또박 나왔다·
어릴 적 지독한 훈육을 통해 완성한 예법이 슬픔을 가려주는 것이었다·
그리도 싫었던 고된 체벌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끝이오?”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아 이번 말도 제대로 뱉었구나·
한데 언제까지 이리할 수 있을까·
책상 아래 무릎 앞으로 모인 손이 꽉 쥐어진다·
피가 안 통하는 기분이었다·
오래 있었다간 괜히 추한 꼴을 보여주게 될 터다·
“이만 가보아도 되겠는지요· 일이 남아 있는지라·”
“그 건····”
입술을 벙긋하던 엘릭이 이내 느릿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티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온함을 가장했다·
곧게 허리를 세운 후 오른손을 가슴 위로 얹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곤 속도를 신경 써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복도를 걸으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속이 찌르르 아팠으나 다행히도 익숙한 일이다·
내일이면 여느 때처럼 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