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등장과 퇴장이었다·
이그렛은 갑작스레 등장한 다날과 혼이 빠져 있던 리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이걸로 모두가 행복해진 거네!”라고 외쳤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나 보자는 심산으로 계속 그 꼴을 보고 있으니 과연·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부 부인! 대접해줘서 고마워··· 요!”
“아 예·”
“얘들아 가자!”
식사도 시작되지 않았건만 이그렛은 떠나겠다는 듯 의사를 내비치더니 두 사람을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이대로 저 둘을 데려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와중 티리아가 나섰다·
“한데 기사분들은 잠시 두고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응?”
“죄송하게도 영지에 막 부임 된 기사들이라 이리 떠난다면 곤혹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마법사님의 뜻은 이해 했지만 말미가 조금 필요하여서·”
티리아로선 엘릭이 공을 들이던 기사라는 생각에 한 말이었다·
다만 그런 이유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파급력은 엄청났다·
“마님!”
“주인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이었던 다날과 리키에게 그 순간의 티리아는 구세주였다·
지옥불에서 건져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빛이었으며 동시에 거대한 악에 맞서 백성을 구하는 용사와 같았다·
뚱하다고만 생각했던 표정이 근엄함으로 비친다·
또박또박한 말투는 단상에 올라 연설문을 읽는 장군 같다·
늠름하고 용맹하며 아름답다!
차오르는 감동을 어찌하지 못한 다날과 리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음 그럼 알겠어! 요!”
이그렛이 수긍까지 하니 사건은 완벽히 해결·
애초에 통할 수밖에 없는 말이긴 했다·
이그렛의 목적은 순간적으로 내뱉어버린 ‘혼약자를 찾으러 왔다’라는 말의 변명이었으며 동시에 ‘나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카샤와 선을 긋겠다’였지 않던가?
사실 여부가 어쨌든 상기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으니 두 기사에게 더 남은 용건은 없는 것이다·
“얘들아 나중에 봐!”
툭!
두 사람의 목덜미에서 손을 놓은 이그렛은 크게 팔을 휘저으며 웃다 그대로 저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도는 침묵·
그녀는 다날과 리키에게 충성심을 남겼고 에드워드에게 안도를 남겼고 엘릭에게 의문을 남겼다·
‘결국 저 여자는 뭘 하러 왔던 것이지?’
엘릭은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야 했다·
*
한차례 난리통이 다 지나간 저녁 식사 후였다·
대뜸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중 하나가 사라졌으나 아직 남아있는 이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지만 뭐가 되었든 해결해야 했다·
“재밌는 구경을 했군· 염화가 그리 유쾌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
늦은 밤 접견실·
티리아를 방으로 돌려보낸 엘릭은 엘버스의 말에 눈을 좁혔다·
불쾌함을 드러낸 행동이었으나 그에 엘버스는 여상스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가 알고 이리 찾아왔겠나· 이게 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지·”
“그다지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하지만 찾아온 이유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엘릭은 이들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서부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해왔으니 말이다·
“황자 오랜만에 뵙소·”
엘릭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던 3황자 크레돈 마히르가 중절모를 벗었다·
금발에 적안·
유려한 선을 가진 미남자가 길게 숨을 내쉬며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카샤·”
“그 이름이 아닌 걸 이젠 알지 않소?”
“제게 필요한 것은 그 이름이라·”
황실의 역린 크레돈 마히르·
엘릭으로선 제국 연회 이후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저 무뚝뚝한 성정은 조금도 변치 않은 듯하다·
“먼저 저자를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크레돈이 가리킨 것은 다과를 우물거리고 있던 에드워드였다·
“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 그는 이윽고 능글맞은 미소를 그려냈다·
“에이 이렇게 소외감 느끼게 하실 겁니까? 저도 나름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자네 용건은 염화가 아닌가?”
“아이쿠 어르신· 그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억울하다는 듯 에드워드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확실히 에드워드는 이그렛이 떠나자마자 사과를 해왔다· 이 모든 것이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되었음을 몇 번이나 강조했고 적의가 없음을 밝히기까지 했다·
하나 그런다고 곱게 보일 수가 있겠는가·
실수라 한들 사고로 이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애초에 그에 관한 감정이 그리 좋지 못했던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이곳이 저택 안인 것을 감사해야 할 걸세· 자네는·”
그런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 에드워드가 김빠진 얼굴을 만들었다·
하나 얌전히 떠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흐으··· 내 편이 없구만·”
“알면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어떻겠나·”
“그건 또 다른 얘기인 줄 압니다· 아니 저도 이러고 싶진 않죠· 예 어르신 심기 거스르기 싫다 이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 인간들이 떡하니 앉아있는데 제가 어떻게 갑니까?”
에드워드가 가리키는 것은 크레돈과 엘버스였다·
“우리 터놓고 말해 봅시다· 당신들도 어르신을 영입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닌가?”
“적국의 장수에게 그런 말을 해줄 정도로 머리가 없진 않네·”
“이미 답은 다 했구만· 뭘·”
크레돈과 에드워드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엘릭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거라면 편지를 써도 되었을 텐데·”
평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때가 되면 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 또한 어느덧 옅어지고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데 그게 마음이 이들을 영지로 불러들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속이 다 쓰린 지경이다·
대체 이 절름발이 하나를 얻겠다고 뭐 이리들 난리를 치는 것인지·
“돌아들 가주시게· 할 얘기는 없네·”
엘릭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중요한 안건입니다·”
“저도 그렇수다· 목숨줄이 걸린 문제라·”
크레돈과 에드워드가 같은 의견을 보였다·
그쯤 되니 엘릭 또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정말 모르는 일이 있다면 제국 쪽일 터였다·
에드워드의 목적은 아마 대주주인 제르디아를 보호하고 전장을 대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긴 시간 전장에서 살아온 엘릭은 알았다·
전쟁의 화마를 피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반대로 걷는 것임을·
정보의 부재만큼이나 두려운 일은 없음을·
얘기는 들을 필요가 있다·
판단이 끝났다·
“···그럼 황자님 쪽 얘기를 듣도록 하지·”
“저는요?”
“가보시게· 자네 용건은 내가 들어줄 마음이 없으니·”
“어르신?”
에드워드의 얼굴 위로 당황이 피어났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고 또 한숨을 크게 내쉬다 이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저쪽처럼 일방적으로 나설 생각 없습니다· 애초에 전장에 붙잡아둘 생각도 없고요·”
곧장 말하는 것은 합의안 달리 말해 거래 제안이었다·
“딱 한 번 한 번만 전장에서 검을 휘둘러주면 됩니다· 어느 전장일지는 어르신도 아실 테니 그 부분은 넘기고 일단 해주시기만 한다면 보상은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이후 전장과 관련된 일이 다신 생기지 않도록 사후 조치까지 해드릴 수 있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는 어르신이 전장에 오는 거 반대하는 쪽이라고·”
결국 제르디아를 살려달라는 말·
뒤에 붙은 조건들은 사실 엘릭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면모가 있었다·
오늘 같은 일을 그가 이름을 걸고 막아준다는 말이니까·
이미 한 차례 곤욕을 치른 차이니 망설임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걸 에드워드도 안 것인지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으스대는 꼴로 제국 측을 바라봤다·
하나 그 미소가 오래가진 못했다·
“크흡···!”
그제까지 가만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엘버스가 웃었다·
특유의 요사스러움이 도드라지는 미소였다·
대관절 무엇이 저리 웃긴 것인지·
생각이 치미는 순간이었다·
“이보게 친구·”
엘버스가 입을 열었다·
“금공이 내민 대가 중 자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안 그런가?”
엘릭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돋아났다·
에드워드의 이마엔 힘줄이 돋았다·
와중 엘버스만 여유로웠다·
“이보게 금공·”
“뭡니까?”
“음 이걸 어찌 말해야 할까·”
톡 톡·
뺨을 검지로 두드리던 엘버스가 이내 싱긋 웃었다·
“자네는 엘릭이 전장에 나서지 않더라도 앞서 말한 것들을 해주어야만 하네·”
“예?”
“저 친구가 자네 주주거든·”
“그게 무스····”
순간 에드워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던 까닭이다·
‘잠깐만·’
여유로운 엘버스의 태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의 카샤·
주주라는 말·
그리고 EW 내에서 침묵 중인 6%의 지분 KS·
근래 KS의 일로 꽤 골머리를 썩혔기에 금방 만들어진 인과였다·
‘카샤· Kasha· KS?’
라는 추측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말했잖나· 자네가 맡긴 돈으로 투자를 했었다고·”
엘버스가 에드워드를 턱짓했다·
“저기 넣었네·”
의심이 확신이 됐다·
에드워드의 행동은 빨랐다·
그는 소파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공손함이 에드워드의 자세에 가득했다·
교과서로 실어도 될 정도였다·
“계셨군요?”
에드워드가 애절하게 엘릭을 올려다봤다·
잃어버린 주인을 만난 강아지의 얼굴이었다·
“주주님···?”
주주님과 주인님의 동의어·
적어도 에드워드에겐 그랬다·
낑낑····
그런 앓는 소리까지 내며 에드워드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영입이고 나발이고 에드워드의 머릿속엔 주주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