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꼭 일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티리아에겐 요즘이 그랬다·
엘릭의 취임식을 결정하고도 약 한 달에 달하는 시간·
처음 몇 주는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 듯했건만 취임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니 시간이 어찌 이리 느리게 가는지 원망스러울 지경이 되고 있었다·
이유야 내외부적으로 많았겠으나 결국 하나만 꼽으라면 불안감이었다·
취임식이란 엘릭이 위빈의 주인으로서 평생 이곳을 수호함을 천명하는 자리다·
공개적으로 선언한 말의 무게가 좀 적겠는가·
국왕의 친서 아래 맺어지는 의식이 허투루 치러질 수 있던가·
부끄럽게도 혹여 엘릭이 그런 부담감에 또 도망을 가버리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갈수록 짙어졌던 것이다·
전과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젠 다리까지 다 낫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걱정도 끝·
드디어 취임식 날 아침이 밝았다·
“마님 기침하셨습니까?”
하녀장이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방문을 두드렸다·
이미 깨어있던 티리아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들어오시게·”
“예·”
달칵 소리와 함께 하녀장 그리고 수석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치고 침구를 정리했다·
티리아는 의자에 앉아 어슴푸레 밝아지는 창밖 세상을 응시했다·
‘조금 더 잘 것을 그랬나·’
아니 누워봐야 더 자지도 못했겠지·
오늘이 드디어 취임식 날이라 하니 좀처럼 깊은 잠에 빠지기 힘든 것이었다·
더군다나 취임식의 규모를 생각하니 고질병인 걱정이 밤새 치솟기까지 했다·
“하녀장 간밤에 위빈에 들른 손님들이 더 있었나?”
“예 왕녀님께서 늦은 밤 철도의 막차를 타고 오셨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관 상황은?”
“아휴 말도 마세요· 여관이란 여관은 방이 꽉 차버려 임시로 마을 사람들이 집에 손님을 들이는 지경이 됐어요·”
“사고가 일어나진 않았나?”
“신분이 확실한 분만 걸러 모셨으니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티리아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위빈에서만 26년을 산 티리아였지만 단언컨대 이 촌동네가 이리 붐빈 일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번 취임식은 페르딘 왕국 전체에서도 중히 다루는 일이었다·
외적인 것을 떠나서도 그랬다·
포트먼은 페르딘 내에선 100년 만에 나온 귀족 가문이다· 물론 단승이 아닌 계승 작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지난 연회에서 그레이엄 공자와 친분을 나눴던 일·
더해 얼마 전 그 그레이엄 공자가 위빈에 따로 찾아왔던 일까지 화제가 되었으니 곳곳에서 엘릭과 교분을 나누러 온 귀족 손님까지 찾아온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곳곳에서 사고가 터질 게 분명했다·
“인파가 이리 몰리는 일은 다들 익숙지 않을 걸세· 모쪼록 안전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달라 이르게·”
“예 기사분들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연회장 말인데· 이 부분의 수배는 제대로 끝냈나?”
“예 위빈 가에 협조를 받아냈습니다·”
티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트먼은 저택에 따로 딸린 연회장 같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홀이라 할 만한 공간이 있긴 한데 왕녀까지 행차하는 커다란 행사가 되어버리다 보니 인원 수용적으로도 또한 손님의 대접에 있어서도 여건이 되지 않는 게 아니겠나·
결국 친정인 위빈 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네들과의 사이가 아주 안 좋아지긴 했지만 결국 위빈 가 또한 얻을 게 있는 거래인 만큼 돌아오는 답은 긍정이었다·
‘외적인 준비는 모두 끝낸 듯하고·’
그럼 남은 것은 하나다·
오늘의 주인공을 맞이하러 가야지·
*
“가주 속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잠이 덜 깨서·”
티리아는 식탁에서 깨작깨작 빵을 뜯어 먹는 엘릭을 물끄럼 바라봤다·
기색이 영 신통찮았다·
정확히 취임식이 결정된 이후부터 쭉 이랬었지·
그에 관해 물어봐도 그저 긴장되어서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사실이 아님은 안다·
그에게 다른 걱정이 있는 것일 터였다·
어쩌면 이 취임식 자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걸 알고도 강행하는 이유는 이기적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가 떠나갈까 하는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들어서·
엘릭이 전에 없던 따스한 목소리로 눈짓과 손짓으로 자신을 대해주고 있음은 알지만 그것이 모든 불안감을 해소해주진 못했기에 이러는 것이었다·
티리아는 그저 언약이 아닌 강제성을 띤 수단이 필요했다·
속에 남아있는 일말의 불안감을 모두 지워줄 사실상의 목줄이 필요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스스로도 그런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점을 그에게 입 하나 벙긋하지 않은 이유 또한 분명했다·
“···잘 끝날 겁니다·”
그의 감정을 조금은 외면해서라도 이 불안함을 해소해야만 하겠다는·
앞서 말했듯 이기적인 이유였다·
“다이넌 단장의 동생에 관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곧 이곳으로 온다 하더군요·”
“아 나도 들었소·”
“가주께선 곧장 화장에 들어가 주십시오·”
“부인은?”
“저야 가문의 사람들에게····”
“가문 사람은 내게 주고 여동생은 부인이 쓰시오·”
“···예? 그럼 가주는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되었소· 남자가 이쁘게 꾸며 뭐하오·”
주인공의 될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릭의 태도가 드물게 완고했다·
괜히 입씨름할 시간도 아깝다·
그저 하녀들에게 꼼꼼하게 하라 언질을 주는 게 낫겠지·
“알겠습니다· 그만 일어서지요·”
식사를 마친 티리아가 말하자 엘릭이 따라 일어섰다·
그때 문득 티리아는 깨달았다·
오늘 식사 내도록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
심란한 와중이었다·
“마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역시 키가 아주 큰 그리고 가면 수준의 화장을 한 화려한 여인이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소름끼치면서도 반가웠다·
“잘 지냈는가·”
“그럼요! 이렇게 다시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세상에 저희 못난 오빠를 기사로 들여주셨다는 말에 눈물이 다 나더라구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손동작·
그에 티리아의 표정이 조금은 풀리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것인지 그녀는 꺄르륵 웃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기대하세요· 제가 오늘 마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주인공은 가주가 해야지·”
“무슨 섭한 말씀을! 마님이 아름다운 게 가주님을 최고로 빛나게 하는 일인 걸요!”
“말이라도 고맙네·”
“진심이라구요?”
입술에 검지를 얹으며 눈을 깜빡깜빡 뜨는데 그것이 참 여러 생각을 스쳐 지나가게 했다·
티리아는 잠시 굳어버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역시 단장과 참 닮은 듯해서·”
“으응···?”
그 순간 다날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으나 티리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 남매니까요?”
라고 말한 다날은 애써 화제를 돌리곤 그녀의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 눈감아주세요!”
“잘 부탁하네·”
눈을 감은 티리아는 그새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취임식 순서를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재생해보는 것이었다·
다날로선 좋은 일이었다·
‘아 안 들켰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화장을 두껍게 했고 목소리도 얇게 했으며 자세 또한 연구를 거듭해 더욱 여성스럽게 꾸몄다·
한동안 이런 일을 하지 않아 불안한 점이 있었으나 다행히 기우인 모양·
티리아는 조금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빨리 끝내자·’
판단을 내린 다날은 눈짓으로 오늘 여장을 함께한 리키와 메이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컨셉은 청초한 한 떨기의 꽃이에요!”
촤르륵―!
화장도구가 펼쳐졌다·
제국 연회에 참여한 이력이 있던 엘릭조차 감탄한 화장술이 다시 한번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손이 수십 개로 불어난 것처럼 잔영을 남기기 시작했다·
*
“잘 되었군·”
화장을 끝낸 티리아가 탄성을 흘리며 거울 속 제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오늘도 무사히 한 건 해결·
그리 표현해야겠지·
다날은 싱긋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녀오셔요!”
“고맙네· 내 돌아와 꼭 사례를 넉넉히 하도록 하지·”
답한 티리아가 바삐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아암 오늘 취임식을 가장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니 쉴 틈이 없긴 하겠지·
뭐가 됐든 좋다·
“흐아 뒤지겠네!”
풀썩 바닥에 주저앉은 다날은 가발을 벗고 손부채를 부쳤다·
리키와 메이븐 역시 진이 다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날처럼 주저앉진 못했다·
“그럼 저희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아····”
“아아 고생해라·”
임시로 티리아의 화장을 위해 빠져나왔으나 이들의 본업은 기사다·
그중 셋이 오늘 같은 날 자리를 비웠다간 의심을 살게 분명하지 않나·
곧장 경계 임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단장이 좋았다·
직위를 앞세워 남들보단 조금 더 쉴 수 있었으니까·
홀로 남은 다날은 드레스 앞섬을 풀어헤쳤다·
‘더워 죽겠네·’
대체 여자들은 이 치렁치렁한 머리와 꽉 조이는 드레스를 어떻게 매일 입고 다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정말 같은 종은 맞는 걸까?
‘아 화장은 또 언제 지우지?’
이 두꺼운 가면도 벗어던져야 하는데 참 시간이 왜 이리 빡빡한 건지·
다날이 한숨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달칵!
“마님! 영주님께서····”
문이 열렸고
“···단장?”
방에 들어온 베론과 다날의 눈이 마주쳤다·
가발을 벗고 드레스를 반쯤 벗은 다날과 풀 플레이트 차림의 베론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쩌적 굳은 채로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다날은 그 순간 베론의 눈빛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아니야·”
“이해합니다·”
“아니라고· 뭘 이해하는 건데·”
“저 저는···!”
베론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날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베론이 외쳤다·
“그렇지요! 단장은 남자다운 사람이니까! 여장은 남자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그렇기에 가장 남자다운 행동이니까!”
“그게 무슨 소린데!”
“이해합니다! 이해하는데!!!”
베론의 눈꼬리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크윽! 죄송합니다!!!”
샤샤샥!
베론이 그대로 뒤돌아 뛰쳐나가 버렸다·
이 와중에도 그림자 걸음을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경이적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아니라고 미친놈아!!!”
다날은 절규했다·
그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