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으로 밝은 생각을 해야 한다 마음먹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엘릭에겐 지금이 그랬다·
“아름다우시구려·”
“···감사합니다·”
“그네들 솜씨가 전보다 더 발전한 것 같소· 아 물론 부인께서 평소에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오·”
오늘 티리아가 평소보다 더 어여쁘다·
산뜻한 색조를 덧입힌 화장에 그녀와 어울리는 단아한 분위기의 드레스가 특히 눈에 띈다·
역시 그 인간들은 기사단이 아닌 하녀로 들이는 게 더 나았을까·
아니 가면 수준의 화장을 한 채로 하녀 일이나 했을 월영을 생각하니 그건 그것대로 끔찍하군·
엘릭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이어 상상해냈으나 그럼에도 미소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달리 말해 그만큼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었다·
“그럼 가보실까요·”
티리아가 손을 잡아 왔다·
엘릭은 겨우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달그락·
출발한 마차가 저택을 나서니 밭은 푸릇푸릇한 기색이 가득하다·
모내기에 한창인 시기라 지난겨울을 잊게 하는 색채가 온통 들어차기 시작한 것이다·
이질감이 들었다·
이 풍경 속에서 자신만이 유리된 듯한 묘한 감상이었다·
“광장 쪽에 도착하면 바로 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은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끝을 낼 것이구요· 오늘 생길 혼란을 한시라도 빠르게 줄이기 위함이니····”
티리아의 말은 미안하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엘릭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무얼 하는 것이지?’
되뇌는 것은 의문이었다·
진정 위빈의 영주직에 오르려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전쟁에서 눈을 돌리려고? 그것은 결국 도망치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게 나쁜가?
다 떠나서 전쟁터로 향하는 것 또한 도주일 뿐이다·
10년 전처럼 티리아를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란 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오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할수록 짙어지는 괴리감이 있었다·
엘릭 포트먼과 카샤는 그리도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몸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임에도 그 정체성이 서로의 극점에 있는 듯하다·
그에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가주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엘릭은 창밖으로 보이는 인파에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참 많구려·”
“모두 취임식을 보러 온 손님들입니다· 여관도 꽉 차 거리에서 잔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녀의 말마따나 마을에 들어선 순간부터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이 빼곡하다·
엘릭의 삶에서 이리 많은 사람이 몰린 장소는 전장 그리고 제국 수도 한복판이 끝이었다·
정말 취임식이 시작되긴 하나 보군·
그 사실이 왜인지 부담스럽게 다가와 엘릭은 목덜미를 긁었다·
가려움이 짙어졌다·
“가지·”
순서가 어땠더라·
식이 시작되면 곧장 올라가 연설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고 왕국의 사신으로 온 왕녀 앞에서 칙령을 받으며 끝나겠지·
여전한 혼란스러움이 있으나 이제와 돌이킬 수는 없다·
엘릭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단상 뒤로 향했다·
“준비를 마쳐두었습니다!”
설영 기사단의 부단장이 말했다·
그래 이름이 리키였던가·
“수고했네·”
그의 어깨를 툭툭 친 엘릭은 이윽고 팔을 슬쩍 들며 티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팔짱을 껴왔다·
그대로 엘릭은 단상 위를 향했다·
“와아아아아!!!”
공간이 떠나가라 함성이 일었다·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사람들 탓에 현기증이 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니 함성이 더 짙어진다·
엘릭은 단상 위 확성기 앞에 서서 티리아를 흘긋 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시작하면 된다는 뜻이겠지·
시선을 단상 위 연설문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곤 최대한 부드럽게·
“반갑소· 먼저 이리 자리를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오·”
연설이 시작되었다·
*
기계적으로 연설문을 읊었다·
티리아가 작성해준 연설문은 상투적이고 교양있는 말로 가득해 읽어내리는데 부담감이 없었다·
연설의 몇몇 부분에선 크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는데 솔직한 말로 엘릭은 연설문에 집중하지 않아 저들이 어떤 부분에서 환호성을 터뜨리는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그리 연설이 끝나자 왕녀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귀하 포트먼의 남작 엘릭은 왕명을 받들라·”
언젠가 아직 서부의 전장을 떠돌던 시절 신문에서나 봤던 앳된 왕녀가 위엄있는 표정으로 칙서를 펼쳐 들었다·
엘릭은 티리아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왕명을 받듭니다·”
말하며 고개를 숙이니 왕녀가 힘 있는 목소리로 칙령을 읽었다·
영주직의 위임에 관한 말을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낸 문서였다·
지루할 법도 하나 그런 감상을 느낀 이는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위빈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 구경 온 이들 중 대부분까지 국왕의 명령이 내려지는 장면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 경우가 많을 테니 이 광경이 좀 신기하겠는가·
애초에 이런 취임식을 마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지 않던가·
하나 엘릭은 그녀의 말은 그저 신기하게만 들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니 포트먼의 남작 엘릭은 이곳 위빈의 영주로서 백성의 안녕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가?”
건네진 질문이 무거웠다·
이 답을 함으로써 갈림길 끝에서 내린 스스로 선택을 확정 짓게 되는 것이니 절로 망설임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곧장 답하지 못함에 티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가주·”
엘릭은 이목이 제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망설임이 이어지니 곳곳에 의아함을 품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예·”
떠밀리는 형식으로라도 엘릭은 답을 내뱉을 수 있었다·
“이로써 포트먼의 남작 엘릭이 위빈의 영주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와아아아아아!!!”
큰 함성소리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엘릭은 자신감있게 웃고 있는 왕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었고 엘릭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포트먼 남작·”
“왕국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러운 마음입니다·”
말하니 턱 힘이 풀린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
그래 국왕의 칙서 앞에서 언약을 했으니 이젠 뒤로 물릴 수 없었다·
보라 티리아도 꽤 밝은 얼굴이지 않나·
모든 게 잘 끝났단 말이다·
여전히 가슴은 답답했지만 이 감정도 언젠가는 수그러들겠지·
그리 스스로를 다독이며 일어나 좌중 바라본 순간이었다·
“···!”
엘릭의 몸이 멎었다·
개미 떼처럼 몰려 있는 인파 속에서 어떤 사내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백색의 풀어헤친 머리칼 그리고 공허함이 담긴 눈·
남들보다는 더 큰 덩치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기에 더욱 눈에 띄는 노인·
이제 그를 발견한 게 도리어 신기해질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품은 이가 정확히 엘릭을 응시하고 있었다·
*
곧장 그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13년이다·
11살이던 때 이후로 13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스승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절로 애가 닳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나 그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연회장으로 가지요·”
엘릭은 오늘 귀족들과의 연회라는 큰 일정이 남아있었다·
그 이전에 한 차례 시선을 교환한 스승이 그대로 뒤돌아 사라져버렸다·
분명 인파 속에서 느리게 움직인 것 같은데 그를 눈으로 좇을 수 없었다·
스승은 신기루를 본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
와중 떠오르는 의문은 그럤다·
어찌 스승이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일까·
자신의 취임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온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직접 찾지 않고 저리 멀리서 보고만 가는 것인가·
제자가 잘 자란 것을 확인하러 온 것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엘릭은 제 스승의 성정을 꽤 잘 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비록 이름도 출신도 모르지만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은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감정의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나 모든 행동에 목적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은 이별의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사사로운 정에 목을 맸다면 그때 자신을 데려갔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디로 간다든지 언제 돌아오겠다든지 등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해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돌아온 것도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을 멀리서나마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따로 이야기할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어디인지는 뻔하다·
그 먼 과거부터 스승과 만나는 장소는 한 곳이었으니·
“가주 괜찮습니까?”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위빈 가의 연회장 한가운데 티리아가 소곤소곤 물어왔다·
엘릭은 그제야 정신을 일깨웠다·
시선이 제게로 몰려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연회가 한창인 것도 잊은 듯했다·
겨우 미소를 지어내며 엘릭은 사람들의 시선을 물렸다·
“괜찮소· 오늘 사람을 너무 만나 현기증이 조금 일었을 뿐이오·”
연회가 언제 끝나더라·
앞으로 한 두 시간 정도는 더 이어질 텐데·
엘릭이 그런 생각이나 떠올리는 중이었다·
티리아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불안감이 막은 입술 뒤로 하나의 말이 또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스러졌다·
‘혹시 보셨습니까?’
엘릭은 몰랐다·
단상 위에서 스승을 본 것이 그만은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