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의 감상은 한마디로 지겨웠다·
일면식도 없는 자들과 웃으며 하하호호 하는 일이 엘릭의 성정과 맞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정신이 다른 곳으로 팔려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 위빈 가의 저택에서 뒤로 올라가면 바로 산맥이다·
그리고 그 산맥 두 번째 봉우리의 오두막엔 스승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숨이 묘하게 가빠졌다·
영주로서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일말의 이성이 발길을 붙잡아두었으나 그런 순간들도 이윽고 끝을 맺었다·
연회가 끝났다·
“부인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오겠소·”
“···그리하시겠습니까?”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시오· 온종일 사람에 치여 있었더니 속이 답답하여·”
급한 마음에 변명하는 엘릭은 보지 못했다·
티리아의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지고 있음을·
“다녀오지·”
엘릭은 그대로 뒤돌아 걸어 나갔다·
*
바스락―
봄의 산맥은 초목이 한창 고개를 들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달빛 아래 흔들리는 수풀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그 길을 걸어 오르는 매 순간 엘릭은 생각했다·
스승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거취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단 한 번도 만나러 와주지 않았던 걸까·
곧 풀릴 의문임에도 자문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말의 설렘이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스승이 지금 답답하기만 한 마음의 답을 주진 않을까 하여서·
자신이 이리도 속이 상해있을 것을 예상해 걱정된 마음에 온 것은 아닐까 하여서·
마냥 긍정적인 추측이라 말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엘릭은 스승과의 추억을 믿고 싶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그리도 슬펐던 나날 중 분명 그 역할의 일부를 대신해주었던 것은 스승이었으니·
과묵하고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달리 말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해주던 것이 스승이었다·
하다 못해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엘릭의 속엔 어린 마음이 물씬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두막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왔나·”
야트막한 오두막 앞으로 모닥불을 뒤집는 거구의 노인이 있었다·
구리빛 피부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불거진 힘줄이나 새겨진 주름의 형태도 봉두난발의 백발과 수염도 그리고 가라앉은 채로 모닥불을 온전히 담아내는 텅 빈 눈동자까지·
그는 엘릭의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 그를 빗겨 나간 걸까·
그도 아니면 그가 닥쳐오는 세월을 힘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변함없는 모습이라 엘릭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스승님 정말 계셨습니까·”
잘못 본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한껏 반가운 기분이 치솟아 엘릭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앉아 스승이 운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스승은 한참이나 침묵을 이어가다 문득 말했다·
“돌아왔군·”
“위빈에 말입니까? 예 10년 정도 떠나있었습니다· 한데 그걸 어떻게····”
“돌아가지 않을 건가?”
“예···?”
“전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냔 말이다·”
“···!”
엘릭은 헛숨을 삼켰다·
미소가 삐걱삐걱 어그러졌다·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든다·
전장으로 향한 일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서부에서의 신분의 처리는 확실했고 또한 뒷조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개인적인 정보 보호도 철저히 유지해왔다·
아무렴 오죽하면 그 대륙의 7강과 엘버스조차 위빈에 돌아오기 전까진 자신의 정체를 몰랐지 않았던가·
한데 어찌 스승이 그 사실을 아는 건가·
그가 이걸 알 방법은 서부의 전장에서 자신을 보는 것밖에····
‘···없을 텐데?’
라는 결론에 닿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스승의 고개가 들렸다·
그렇게 그와 서로를 바라보게 된 순간이었다·
“눈빛이 죽었군·”
스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가 옆에 기대어 두었던 두 자루의 철검 중 하나를 엘릭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그를 받아 들자 이윽고
“검을 뽑아라·”
화악!
스승의 몸에서 붉은 기류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의 일은 엘릭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형태였다·
채앵!
짓쳐든 공격에 엘릭의 몸이 사고보다 먼저 반응했다·
*
순식간이라 일러야 할 공방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명백한 엘릭의 참패였다·
털썩 엘릭의 무릎이 꿇렸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살초가 쏘아지는 것에 이를 악 물며 공격을 받아냈지만 그럼에도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반격은커녕 피해를 흘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전신이 난도질을 당해버린 것이다·
“크헉···!”
숨은 가쁘게 내려앉았고 턱은 덜덜 떨렸다·
기량의 차이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살기·’
무엇보다 살기가 문제였다·
검계를 일러준 스승은 이미 엘릭이 온 경지보다 아득히 먼 곳에 올라 있었다·
그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었다·
“퇴보했구나· 어린 시절보다 더·”
그는 오연한 낯빛으로 한 채로 말했다·
엘릭은 바닥에 무릎 꿇은 채로 멍하니 그를 올려봐야만 했다·
“어 째서?”
이리 갑작스레 공격해오는 것이냐고·
그보다 직전 했던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대체 당신을 무엇을 알고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고·
그런 질문을 함축한 말이었으나 원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승은 다만 알 수 없는 말을 시작했다·
“일찍이 검계에 닿았다· 오로지 나만이 그 경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의 검이 엘릭의 턱 끝에 걸렸다·
“검계에 이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놈이 이 대륙 천지에 그리도 드물다· 네놈 이전에 둘이 더 있긴 했으나 그놈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그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상태였지· 그보다는 명성에 취해있는 것이 문제였다· 단련을 멈췄던 것이다·”
그의 눈빛이 더 깊게 내려앉았다·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이 경지에 올라 같은 풍경을 볼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하여 끔찍한 고독 속에서 매 순간을 살았다· 또한 그보다 두려운 것이 따로 있었다· 내 검이 이 이상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낼 상대가 없어 져버렸다는 것·”
“그게 무슨····”
“홀로 오를 수 있는 경지의 끝에 다다랐단 말이다· 이 너머에 다른 풍경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뻗을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다·”
사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걸린 주름의 형태가 일변했다·
또한 그의 말에 초점이 잡혔다·
“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싹이 트지 못한다면 토양을 다져야 함으로·”
“···!”
“거대한 독을 쌓아 그 속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는 장을 열어냈다· 그렇게 3년간 양분을 주었으나 누구도 만족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더듬더듬 엘릭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의 말이 시인하는 바가 꽤 명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비탄에 잠겨 대륙을 떠돌았다· 그런 중 너를 찾았다·”
왜인지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검계에 이를 재능이 네게 있었다· 조금만 등을 떠밀어준다면 홀로 그 경지에 오를 재능이 네게 있었단 말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리하여 네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을진대·”
그가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뒷걸음질 치느냐·”
“크헉!”
뚜두둑 스승의 살기에 엘릭의 몸이 아래로 짓눌렸다·
그는 그리하고도 모자라 더 진한 살기로 엘릭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매 순간을 기다림에 살았다· 네놈이 검계에 닿는다면 분명 우리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인간에게 내려진 한계를 스스로 초월하여 더 우월한 종으로 생으로서 내려진 제약을 벗어던지고 불멸하는 의지로· 그리 살 수 있었단 말이다·”
쿨럭! 엘릭이 피를 토해냈다·
“네가 마지막이다· 시대가 검을 허락하는 시기가 끝을 보고 있다· 한데 어째서!”
그가 처음으로 분노를 목소리에 담아냈다·
“네놈은 그리 방만하단 말이더냐!”
“끄으윽···!”
스승의 발이 엘릭의 왼쪽 어깨를 짓눌렀다·
엘릭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극심한 격차가 있었다·
“여러 번 고민했다· 네놈을 치우고 다른 씨앗을 찾아야 하는가· 그도 아니라면 스스로 초월에 오를 방도를 찾아야 하는가·”
스승은 크게 숨을 내쉬더니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냈다·
하나 그것은 엘릭에게 조금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전조일 뿐이었다·
“무엇도 불확실함에 나는 이리 결론지었다·”
쿠우우우웅!
굉음이 일었다·
꽤나 먼 곳 그리고 들려선 안 될 자리에서·
엘릭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다름 아닌 그의 모든 것이 자리한 땅이었으므로·
‘위빈!’
경악에 차는 순간이었다·
푸욱!
엘릭의 배에 검이 박혔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찌릿한 통증에 엘릭의 숨이 일순 멎었다·
삐걱삐걱 돌아간 시선이 스승을 향했다·
그는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네놈을 방만하게 만드는 것을 치우면 그만인 것이다·”
스르륵 검이 빠져나온다·
엘릭은 몸의 통제권을 상실해가는 감각을 느꼈다·
그런 중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감정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짊어진 것을 모두 버려라· 오로지 살의만을 벼려 걸어라· 와라 나는 옥좌에서 기다릴 테니·”
툭 엘릭을 발로 밀어낸 스승이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엘릭은 꺽꺽 숨을 내쉬며 그 뒷모습을 봤다·
머릿속에 정보가 몰아친다·
스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가 자신을 찾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가 왜 그렇게나 강했고 자신이 전장에서 강해질 수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들이 잠시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듯 떠오르다 이내 침잠했다·
그런 것보다 더 크게 새겨지는 사실이 있었던 까닭이다·
엘릭은 배를 움켜쥐며 몸을 뒤집었다·
고개가 들렸다·
시선이 위빈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사고가 일점으로 좁혀지며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부인···!’
티리아가 위험하다·
어서 위빈으로 가야 한다·
엘릭은 덜덜 떨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