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2 책임과 의무 (3)
서부의 전장은 지독했다·
그곳은 하나의 제국과 일곱 왕국이 패권을 다투는 대륙의 용광로였으며 인간을 장작으로 삼는 인세의 마경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뿜어낸 피로 타올라 더 많은 이들의 피를 집어삼키니 그 지독함이 좀 끔찍하겠는가· 또한 장작 된 이들의 사연이 좀 많았겠는가·
아주 기구한 인생을 살아 전장에서 흘러 들어오는 이도 있었다·
엘릭이 만난 어느 귀족 영식이 그랬다·
-엘버스 그레이먼이오· 당신이 카샤가 맞소?
막 17세가 되던 시기였다·
당시의 엘릭은 이제 전장에 적응해나가는 용병계의 유망주였고 그는 영지전을 이끄는 가문의 셋째였다·
둘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였고 그날의 전장은 일백의 화승총 부대가 지키는 성벽이었다·
엘릭과 영식은 성벽을 뚫고 들어가는 공성 측이었다·
-저 성문을 뚫어야 하오· 우리 그레이먼 가의 기사들이 말을 달려 돌진할 것이오· 뒤이어 병사들이 공성을 진행할 테고· 수성 측의 병력이 우리 쪽으로 몰리겠지· 당신은 그 틈에 안으로 잠입해주시오·
그 당시 영식의 나이가 고작 20이었다·
이젠 오래된 기억이라 당시의 생김새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총기 어린 눈동자만큼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왜 스물밖에 되지 않은 귀족 가의 도련님이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함이 차올랐으나 엘릭은 묻지 않았다·
고용인으로서의 소양은 돈을 받은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돌겨어어어억!
전장에 언제나 떠도는 것들이 있다·
쇠와 피의 향이 얽힌 서늘한 비린내나 흙먼지가 비산하며 이는 황토색의 운무 그리고 그것들을 흩어내는 함성과 굉음·
엘버스 그레이먼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지휘관이 아닌 기사로서 전장에 참가해 적진의 성벽을 뚫고자 한 것이다·
흙먼지 사이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발버둥은 간절했다·
엘릭은 전장과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었다·
-카샤 우리도 슬슬 시작하지·
-알겠네·
결과만 말하자면 전쟁은 승리였다·
엘릭이 적장의 목을 베어내고 성주의 핏줄을 포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영식 엘버스 그레이먼은 다신 전장에 설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전장에서 불구가 되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또한 귀족이니 그 삶이 아주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하며 약속된 보수를 받기 위해 그레이먼가의 저택으로 찾아간 날이었다·
그곳에서 엘릭은 엘비스 그레이먼의 기구한 인생을 엿들을 수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에게서였다·
하인이란 족속은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즐기는 법이었다·
-셋째 도련님은 이제 어떡하나요· 불쌍하게도·
-에휴 첩 자식으로 태어난 게 무슨 죄라고 전장으로까지 내몰려선····
-보셨어요? 다신 걸을 수 없는 몸이 됐는데도 웃으면서 들어오셨어요· 바로 공작님을 찾아가셔선 보고를 올리시더라구요·
-그래도 공작님은 눈 하나 깜빡 안 하실 텐데····
누구에게나 찌르면 아픈 구석은 있는 법이다·
그 총명한 영식에게도 그런 역린이 있었던 것이겠지·
엘릭은 대강의 그림을 그렸었다·
아마 영식은 첩자식으로 태어나 핍박받는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굳이 전장 한복판까지 파고들었던 것이 아닐까·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면 장수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꿈을 꿨던 것이 아닐까·
혹은 어버이 공작의 눈에 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그의 속내에 관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떠오른 까닭일 터였다·
17세의 엘릭은 부친을 아주 증오하고 있었고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 자식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 온종일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태생부터 참는 걸 잘못하는 성격인 엘릭은 엘버스 그레이엄을 마주하자마자 그리 물었다·
-꼴이 말이 아니시구려· 못난 부친 탓에 고생이 많소·
-아 자네 왔는가?
-부친이 원망스럽지 않소?
-음?
함께 욕이라도 실컷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음 가주님의 눈에 들기 위해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라네·
때때로 인간은 자신과 아주 다른 선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너무나도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이라 그 인간의 실존에 이질감마저 느꼈다 해야 할까 그날이 그랬다·
엘버스 그레이엄은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초췌한 꼴을 하고 있음에도 반짝거리는 총기를 뽐내는 사내였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자리하지 않은 눈으로 단호히 엘릭의 말을 부정했었다·
-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세· 다른 이유는 없네·
그는 말했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는 마땅한 책임과 의무를 지니는 법이라고·
남들이 우러르는 자리에 있는 만큼 그에 합당한 본을 보여야 하는 법이라고·
이번 전쟁은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한 자리였을 뿐이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엘릭이 무심코 던진 질문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모가지가 달아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버르장머리 없는 질문이었다·
-···당신은 첩자식이 아니오? 절반은 평민인·
그런 말에도 엘비스 그레이엄은 웃으며 답했다·
-다르게 말하면 절반은 귀족이군· 그리고 절반의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써 내 몸의 절반을 잃었네· 음 좋아· 남은 삶은 유유자적 한량처럼 사는 것도 좋을 듯해·
실제로 이후의 그는 그리 살았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전쟁터에서 한발 물러나 귀족 영식으로서 누릴 것은 누렸고 몇 년 뒤엔 결혼까지 했었다·
엘릭이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이후로도 여러 번 만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기이하고 특이한 첩자식 엘버스 그레이엄 그는 엘릭이 카샤로 살아오며 사귀었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청년 시절의 그에게 영감을 줬던 사내였다·
···여하튼 엘릭이 그런 과거를 새삼 떠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저는 티리아 포트먼입니다·
왜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산을 지켰느냐는 말에 떠나간 티리아가 남긴 답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평온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지극히 귀족적이다·
그렇기에 무심코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
그들이 당연하게 짊어지는 어떤 무게에 관해서·
드득 드득―
엘릭은 방의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의 손엔 언제나 품에 지니고 있던 단도가 뽑혀 나와 책상 위를 긁고 있었다·
날이 다 죽어있는 단도였다· 예리하게 갈아낼 것은 아니었다·
단도는 그저 엘릭이 마음의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었으니 말이다·
드득 드득―
그런 단도로 그었음에도 책상 위로는 긴 흉이 몇십 개나 파여 있었다·
그가 고민한 시간만큼 흉은 깊어져 있었다·
엘릭은 그것을 바라보며 같은 단어를 되새겼다·
‘책임과 의무·’
그녀가 말한 ‘저는 티리아 포트먼입니다·’라는 답의 속내가 그것이지 않을까·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엘릭으로선 그녀의 귀족적인 태도와 답을 연관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짊어진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연이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한다·
‘귀족의 부인으로서·’
그들이 무얼 하는 사람이더라····
엘릭이 알기론 귀족가의 주인이 밖을 돌보는 동안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가문의 중심을 지탱하는 사람이었고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티리아의 답 또한 그렇지 않을까·
‘포트먼·’
그녀는 티리아 포트먼으로서 포트먼에 남아있는 것들을 지켜왔다·
개인의 만족이 아닌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이르듯 건넨 답은 그녀가 지켜온 도덕성을 이르는 말일 터다·
부끄러움이 새삼스레 속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책임과 의무는 모두 엘릭이 외면하고 도망친 것들이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도덕과 신의를 지킨 것은 둘 중 그녀뿐이었다·
꽈악 단도를 쥐었다·
엘릭은 죽어있는 날을 보며 상념을 이었다·
그녀가 희생해온 10년을 보상해줄 수는 없다·
엘릭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편지가 또 오겠지·’
유산을 가져오라는 편지·
일 년간 꾸준히 왔던 게 이제와서 안 올 리는 없었다·
관련하여 생각할 점은 위빈 가가 답장을 요구하면서도 이곳을 찾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맞을 터다·
부친의 뜻일 수도 있고 티리아의 뜻일 수도 있었다·
‘물어도 답해주진 않을 테고····’
그녀가 그럴 성격이라면 편지에 관한 것을 이미 일렀을 것이다·
관찰해본바 애초에 뭔가를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니 하소연을 해오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알아낼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으며 방을 나섰다·
“알디오·”
“예·”
“마차를 준비해주겠나?”
“음?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엘릭은 싱긋 웃었다·
“위빈 가에 가보려 하네·”
작은 도움이지만 정말 그 편지가 티리아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위빈 가에 편지를 그만 보내라 이르면 된다·
그 반대의 경우라도 엘릭이 해결해줄 수 있었다· 부친의 뜻으로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시 이어주면 그만인 일이다·
정면돌파·
그것은 엘릭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