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꽤 많은 날이 지났다·
대륙을 들썩였던 서부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제국의 내분·
그 중심에 있던 3 황자 크레돈 마히르가 그제까지 남아있던 4개 왕국과 동맹하여 상황에 대적했다·
전선은 서부의 땅을 정확히 반으로 쪼개 하루도 쉬지 않는 전면전을 치렀고 그 격렬한 소모전의 소식이 매일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특보의 중심엔 언제나 검귀 카샤가 있었다·
그는 나서는 참전의 순간마다 수백 수천의 시체를 쌓아 올리며 전장의 귀신이 돌아왔음을 알렸고 그의 악명이 높아질수록 동부의 한미한 어떤 영지에 관한 관심도 나날이 높아졌다·
위빈이었다·
검귀 카샤를 낳은 땅 그가 숨어있었던 땅이자 그가 떠나온 땅·
도대체 그 땅에 어떤 신비가 숨어있기에 그런 괴물이 태어나는 것인지 알아내려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 땅에 닿지 못했다·
-위빈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혀 있다·
그것은 EW의 주인인 금공이 행한 일이었다·
또한 서부 왕국 연합이 가세하여 행하는 일이었다·
사실 그런 방어가 있다 하더라도 위빈에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위빈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건 카샤의 경고다! 절대 그곳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경고!
누구나 목숨은 하나인 법이다·
이 대륙에서 가장 흉악한 이름에게 누구도 적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최초 위빈과 카샤에 대한 기사를 냈던 신문사의 어떤 기자만이 매일을 공포 속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는 와중·
문제의 위빈은 농사로 한창 바빴다·
모내기가 한창인 봄의 중순·
그날의 테러도 이젠 ‘큰일 날뻔했지’라고 말할 과거가 된 어느 날이었다·
“마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티리아는 그리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포트먼 가 전체가 그랬다·
돌아온 주인이 전장의 귀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의 빈자리와 변한 위빈을 누구보다 실감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엘릭이 떠난 날 이후로 티리아가 변했다·
그녀는 호벤 포트먼을 연상케 하는 위엄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언제나 무표정이던 얼굴은 병자의 것이 되었으며 또박또박하던 어조는 어떤 말을 내뱉던 흔들리는 형태로 변모했다·
포트먼 가에서 티리아는 철의 여인으로 통했다·
과거가 그랬고 이젠 모두가 그녀를 금방 깨져버릴 유리 세공품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티리아는 위태로웠다·
사용인들은 하루하루를 그녀의 걱정으로 지샜다·
“마님····”
하녀장은 실례를 무릅쓰고 달칵 문을 열었다·
티리아의 방이 아니었다·
떠나간 엘릭의 방이었다·
그녀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 밑이 새까맣게 물들 정도로 잠을 자지 못해 고통에 겨운 어느 날이면 꼭 이렇게 엘릭의 침실로 들어가 그의 이불 속에 파묻혀 잠들었다·
그조차도 깊은 잠은 아니다·
하녀장이 문을 연 순간 티리아는 초췌한 낯빛으로 스르르 눈을 떴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는가·”
“조금만 더 주무시겠어요?”
“····”
티리아는 메마른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이내 천천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힘없는 움직이었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거슬린다는 듯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하녀장이 눈짓하자 하녀들이 커튼을 쳤다·
그제야 티리아가 손짓했다·
알디오가 나서 서류들을 건넸다·
그녀는 절대 집무실을 찾지 않았다·
“···농사 현황입니다·”
티리아는 웬 칼자국이 잔뜩 새겨진 탁자에 앉아 그것들을 확인하곤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로 처리하게·”
“예 식사는····”
“당기지 않네·”
티리아는 그리 말하고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그저 저 가여운 여인이 기운을 차리길 바랄 뿐이다·
*
그런 날이 또 며칠 지났다·
티리아는 여전히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택에 박혀 있었고 그런 모습에 알디오와 하녀장이 큰 결단을 내렸다·
“마님이 밖에 나오도록 만들어보죠·”
“아암! 바깥 공기도 쐬고 햇볕도 받아야 금방 기운을 차리실 걸세! 마침 날씨도 참 좋지 않나?”
“방법은 있어요?”
두 사람은 골몰했다·
그러다 겨우 떠올린 방안이 있었다·
“아! 마님께서 화단에 심으신 약초가 이제 봉오리를 틔웠네! 그걸로 하면 어떤가?”
“좋은 생각이에요!”
두 사람은 곧장 계획을 실행했다·
*
티리아는 햇볕이 싫었다·
정확히는 엘릭이 없는 새로운 날이 시작된 것이 괴로웠다·
그날로부터 족히 한 달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매 순간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선사해줄 뿐이다·
내도록 티리아는 생각했다·
‘왜?’
왜 그는 그렇게 떠나려 했을까·
이리도 잔인하게 자신을 털어내 버린 것일까·
전장에서의 삶보다 이곳의 삶이 괴로웠나?
자신이 그를 괴롭게 만든 것인가?
생각에 빠져 있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아직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제야 그걸 안 것이다·
마냥 바라만 봐도 좋아서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가졌고 또한 어떤 아픔을 가진 것인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엘릭의 방에 찾아가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내가 모르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서·
그리하여 발견한 것은 그의 침대는 딱 한 사람이 누울 정도로 작다는 것·
그의 책상 위에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새겨놓은 검흔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눈을 뜨면 아침 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자리에 침대를 두었다는 것·
그처럼 살아보려 했다·
매일 아침 같은 생각을 하려 해봤고 생활하고 잠들며 그가 떠올렸을 생각을 유추해보았다·
10년 간 전장을 떠돌다 돌아와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런 사실을 숨기며 지내는 것은 또 어떤 기분이었을까·
전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또한 수상했던 손님들을 마주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도 어려웠다·
“마 마님·”
알디오가 들어왔다·
“잠시 밖으로 나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티리아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유를 물었다·
그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모르지 않기에·
“왜 그러는가·”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런 날에 저택 전반을 직접 점검하시던 것이 생각나서····”
호벤 포트먼에게 배운 것이었다·
-볕이 잘드는 날에는 먼지를 발견하는 것이 쉽다· 물건의 손상도를 확인하는 것과 저택 전체의 조감을 점검하는 것도 이런 날에 하는 게 좋다·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꼭 자신처럼·
“···알겠네·”
문득 엘릭은 자신을 바라보며 부친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감정을 지우고 싶어 티리아는 외출을 결심했다·
알디오의 표정이 환하게 개었다·
하녀장도 마찬가지였다·
티리아는 숄을 어깨에 걸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통 움직이지 않았더니 조금 걸음이 휘청였다·
“천천히 내려오시지요! 일단 정원으로 가실까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저택을 나섰다·
그제야 티리아는 세상이 이리 따스해졌음을 깨달았다·
계절이 변화한 것이다·
벌써 이만큼이나·
“마님 어서 이리로 오세요!”
하녀장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티리아는 한 걸음씩 하녀장을 따라 걸었다·
사용인들의 시선이 꽂혔다·
고개를 드니 그들이 모두 환히 웃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사뭇 치솟는다·
하나 여전히 몸을 내리누르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생각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움직인 끝·
“짠! 화단에 꽃봉오리가 벌써 이만큼 차올랐어요!”
티리아의 몸이 덜컥 멎었다·
“봄이 시작될 때 그리 열심히 키우셨잖아요?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환하게 꽃이 필 거랍니다!”
“뿌듯하시지 않습니까?!”
알디오까지 가세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티리아는 어울려줄 수 없었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마 마님?!”
“이 인간아! 이게 무슨 일이야! 보여주면 좋아하실 거라면서!”
“아 아니··· 그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이 환히 트이는 감각이 일었다·
잊고 있던 사실이 안개 속에 가려졌듯 잘 기억나지 않던 일이 환히 기억나는 감각·
재생되는 것은 엘릭과 나눴던 대화였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 동네가 그렇지 않소? 한 해 내도록 반짝이는 것들 뿐이오· 봄에는 모종이 푸르고 여름엔 그게 무성해져 쨍하오· 가을은 온통 황금빛에 겨울은 또 깨끗하게 빛나지·
아니었다·
-이런 게 참 그리웠던 것 같소· 떠나있던 동안은·
그는 거짓말을 했다·
-봄이 되면 말이오· 꽃을 심어보는 것이 어떻소?
그는 떠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떠날 사람이라면 그리도 무엇에도 정을 주지 않았다면 이곳이 그리도 괴로웠다면·
미래를 기약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테니·
문득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언어였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네·”
티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분 같기도 했고 미소 같기도 했다·
“가주는 정말····”
하나 확실한 것은 있었다·
티리아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힘이 실렸다·
“···정말 매를 들어 혼을 내야 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네·”
하녀장과 알디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런 중에도 티리아는 연신 엘릭의 욕을 해댔다·
상스럽진 않았다·
그녀는 상스러운 욕을 생전 들어본 일도 없는 사람이라 욕이라 해도 귀여운 투정으로 보이는 수준이었다·
“대체 사람이 왜 그러는 겐가? 고민이 있으면 말을 하면 될 것 아닌가·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고민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항상 혼자 끙끙 앓네! 나는 없는 사람인가 보네!”
“마 마니····”
“그때도 그렇네· 부부는 서로 기대는 관계가 아닌가? 한데 가주는 매번 저 혼자 일을 해결하려고 해· 안 보이는 데서 홀로 판단해 움직이면 그게 날 위한 것인 줄 아는 게야!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칭찬을 해줄 수 있나?!”
“마님···?”
“세상에 어쩜 사람이 그리 멍청할 수가···!”
하고 감정을 토해내는 중 티리아는 덜컥 헛웃음을 흘렸다·
생전 처음 남 앞에서 내뱉은 싫은 소리에 생경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치솟는 와중 함께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 까닭이다·
‘···나도 똑같구나·’
직전 그리 해대던 욕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안이었다·
솔직하지 못하고 마음을 숨겨서 홀로 감내하고 그러는 게 상대방을 위하는 일로 아는 것은·
‘나도····’
엘릭이나 자신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속이 뜨거웠다·
그제야 웃음이 덜컥덜컥 삐져나왔다·
아 그런 것이었다·
마음은 결국 언어로 정리해야만 확실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어의 형상으로 뭉치고 문장의 형태로 빚어내야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아직 그걸 하지 않았다·
자신도 엘릭도·
티리아는 그대로 돌아섰다·
“···가봐야겠네·”
“어 어딜 말입니까?”
“가주에게로 가야겠네· 가서 확실하게 얘기해야 할 듯해·”
“마님! 그곳은 전장입니다!”
“마 맞아요! 지금 서부가 어떤지 아시면서···!”
“그런 곳에 가주가 있으니 더욱이 가야지·”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로 경악이 떠올랐다·
“그 칠칠치 못한 인간이 또 무릎이라도 다쳐 오면 어떡하나?!”
언제나 무표정이던 그녀가 참으로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티리아에게서 생기를 느꼈다·
*
다날은 헐레벌떡 뛰어가 짐을 챙겨 떠나는 티리아를 막아섰다·
“마 마님! 안 됩니다요!”
“비키시게·”
“저어어얼대! 절대 안 됩니다요!!!”
쿵!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다날은 간절했다·
전장으로 떠난 엘릭이 그녀의 안전을 부탁한 만큼 사지로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저를 밟고 가십시오!”
그 순간 정말 티리아의 발이 머리 위로 닿는 것에 다날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티리아는 물었다·
“아직도 막을 생각인가?”
다날은 고민했다·
그녀가 엘릭의 부탁을 모름은 자명하다·
아마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하지만 걸어볼 만한 것은 그의 부탁을 티리아에게도 전하는 것·
그리하면 적어도 전장으로 향하는 걸음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일순 떠올랐고 저울질 끝에 다날은 결정했다·
“가 가주님께서 마님의 안전을 부탁하셨습니다!”
물론 선택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었다·
티리아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또 어딘가 애틋해졌다·
“···그래 가서 물어볼 것이 늘었군·”
그대로 티리아가 다날을 지나쳐갔다·
아주 가랑이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다 단장! 이제 어떡해요?”
리키와 단원들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다날의 뺨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쩌긴 이 새끼들아····”
따라가서 온몸으로 지켜야지·
저 여자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순간 우리가 죽는 목숨일 텐데·
다날은 세상이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