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리아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10분 정도가 더 흐른 뒤였다·
잔뜩 호들갑을 떨고 있는 이그렛과 속이 바짝 곯아 있는 얼굴의 에드워드·
그리고 눈치만 보고 있는 기사단까지 더해지니 눈앞의 광경이 참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는 와중이었다·
“···아!”
티리아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혼절 직전 들은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나자크라니···!’
세상에 다른 곳도 아닌 나자크를 제 발로 들어가다니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티리아도 이제 엘릭이 카샤임을 알았다·
누가 와도 쉽사리 해할 수 없는 강자가 남편이란 사실에 어색함과 안도가 동시에 차오르지만 그래도 이건 선을 많이 넘은 일이다·
나자크는 걸어 다니는 시체와 유령과 온갖 사특한 냉기가 가득한 땅이다·
실로 그 악명이 동부 끝까지 퍼져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 곳을 제 발로 찾는 엘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암만 칼을 잘 다룬다고 한들 실체가 없는 유령을 벨 수는 없는 법이다·
“마 마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어서 가주를 빼어내 와야 하네·”
티리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결연하게 말했다·
“혹여 그곳의 귀신에게 몸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한시 빨리 움직이지· 와이트 공작 당신도 저를 좀 도와줘야겠습니다·”
티리아는 망자에 관한 여러 소문을 믿는 편이었다·
실제로 마왕이란 존재가 이 땅에 버젓이 자리한데다 과거의 악명까지 있으니 그런 믿음은 꽤 확고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몰랐다·
“어서 가주를 구하러···!”
“음·”
귀신에게 몸이 빼앗길지 모른다 말하며 호들갑을 떠는 티리아의 모습이 나자크를 경험한 서부 사람들에게 얼마나 촌스럽게 보일지를·
“···마님 일단 제 얘기부터 들어보시겠습니까?”
다날은 최대한 티리아가 놀라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 동부 촌년은···’ 따위의 불손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외진 시골에 짱 박혀 사니 그런 소문을 그대로 믿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하지 않았다·
···진짜로·
*
오해가 풀리니 티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미 밑천이 털린 상태에서 무표정을 가장해 봐야 애처롭게 보일 뿐이지만 어쨌든·
달그락!
마차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당장 엘릭을 찾아갈 방도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티리아가 선택한 것은 일단 전쟁지대의 후방 지휘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있는 한 언젠가는 엘릭을 만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마차 여정은 기차보다 쉬웠다·
이그렛의 흐흐 웃는 소리나 에드워드의 조심스러운 태도만 빼면 거기에 기사단원들이 자신의 몫까지 함께 부끄러워해 주는 것만 빼면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고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다·
불행히도 꽤 쉬운 일이었다·
“여기서부터 전쟁지대입니다·”
펼쳐진 광경이 그만큼 참혹했기 때문이다·
“한 푼만 줍쇼!!!”
마차가 지나다니는 대로 근처로 빈민들이 말라붙어 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곳곳에선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선 시도때도 없이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행색이 멀쩡한 사람도 표정만큼은 어두웠다·
병사들은 잔뜩 군기가 잡힌 채로 이동하고 했고 후줄근한 용병들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특히 티리아의 시선을 끄는 것은 용병들이었다·
엘릭이 검귀 카샤라는 이름으로 10년 간 용병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비켜!”
“억!”
용병 무리가 빈민을 발로 걷어찼다·
티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임에도 마냥 혐오만을 띌 수 없었다·
혹여 엘릭도 저러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함께 떠올랐기에·
문득 에드워드가 말했다·
“어르신은 저런 잡배들처럼은 안 굴었습죠·”
“음···?”
“이런 후방까지 오는 일이 잘 없으셨습니다· 어르신은 지난 10년 내도록 최전방에만 있었거든요· 칼질만 해도 바쁘실 분이 저렇게 거리에서 행패 부릴 시간이 있기야 했겠습니까·”
눈치가 빠른 건지 그도 아니면 표정에 감정이 드러났던 것인지·
에드워드의 말은 티리아가 속에 띄워 올렸던 고민을 딱 잡아채 해소해주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런 후방에서 노는 용병들은 용병이라 말하기도 애매한 것들입니다· 그냥 힘 좀 쓰는 깡패들이 나 용병입네~ 하면서 거들먹대는 게 대부분이라·”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안심하시라는 말이지요·”
싱긋 에드워드가 웃었다·
그러자 이그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카··· 엘릭은 애초에 남들 눈에 띄는 걸 싫어했었어요· 그 10년 동안 사진 하나 안 남길 정도로 철저하게 기자들을 피해 다녔죠·”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를 일이다·
···아니 분명 다행스러운 일은 아니지·
티리아는 엘릭으로서의 그를 안다·
그는 사람을 꽤 좋아하는 편이며 산책을 즐기고 또한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성미에도 안 맞는 일을 10년이나 해왔으리란 생각에 속은 조금 미어졌다·
미간이 좁아졌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 더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후였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지휘 본부입니다·”
그곳은 거대한 저택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네 개 왕국의 깃발이 나란히 꽂혀 있고 그 가운데 크레돈 마히르의 인장이 문양의 형태로 박혀있는·
“일단 음··· 그래 이리로 오십쇼· 그래도 아는 사람을 부르는 게 맞을 테니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겠습니까·”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티리아는 뒤늦게야 그가 말하는 인물에 대해 알 수 있었다·
*
지휘 본부의 응접실·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구려·”
티리아는 눈앞의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리 오랜만은 아닌 것 같지만 뭐··· 아니 사실상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 듯하구려· 다시 인사하지·”
눈부신 백발 총기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휠체어·
“엘버스 그레이엄· 카샤의 가장 절친한 친우요·”
그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약식으로 예를 취했다·
앞서 몇 번 보아왔던 때처럼 여유가 가득한 미소였다·
“그래 목적은 카샤가 맞소?”
“···예·”
“음 그 친구 예상이랑은 다르구려·”
티리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의 미소가 사뭇 잔잔해졌다·
“위빈에 있는 것은 모두 놓고 왔다· 더 이상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 말했거든·”
울컥 화가 차오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무엇도 해결하지 않고 도망간 주제에 해결이란 말을 입에 담다니 그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냔 말이다·
바로 목소리를 내면 울분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티리아는 짧게 숨을 가다듬은 후에야 답을 내뱉을 수 있었다·
“···모자란 가주입니다· 일처리가 많이 서투르시지요·”
“그렇긴 하오· 하긴 예전부터 칼질 말곤 영 재주가 없었지· 여자관계도····”
티리아의 눈이 부릅 뜨였다·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엘버스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아차차 잡설을 할 뻔했구려?”
잡설이 아닌 듯한데·
“···그렇습니까?”
“그렇소· 사내끼린 지켜줘야 할 비밀이 있는 법이지·”
“부부 사이엔 숨김이 없어야 함을 믿는지라·”
“개인적으로는 참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이라 생각하오· 정말 서로에게 숨김이 없는 관계라 믿는 이들은 둘 중 하나지·”
엘버스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둘 모두가 완벽히 숨겼거나 숨길 것이 없을 정도로 역사가 없거나·”
“공자께서 보시기에 저희는?”
“글세 난 부인과 따로 대화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판단이 쉽진 않소·”
티리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 저런 말을 하는 저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저 감정적으로 엘릭의 과거에 분노하기엔 티리아의 이성은 성숙했다·
정말 그와 연을 맺은 여인이 있었다면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긴 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엘버스의 태도는 마냥 이간질이라 하기엔 어딘가 수상했다·
티리아는 굳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엘버스는 후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 보지 마시오·”
“실망하게 하여서 저를 돌려보내려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로 느꼈다면 뭐 그게 맞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헛수고를 하셨습니다·”
우뚝 엘버스의 손짓이 멎었다·
“흐음?”
그의 얼굴 위로 흥미가 돋아났다·
티리아는 말했다·
“가주가 어떤 여인과 관계를 맺었든 그건 저와 가주의 일입니다· 혹여 가주께 숨겨진 가정이 있었다 해도 저와 가주의 일입니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가주는 제 남편입니다· 그가 자의적인 선택으로 전장으로 향했으니 저는 꼭 가주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게 부부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에 엘버스는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의무요?”
티리아는 답했다·
최근에서야 솔직해질 수 있었던 답이었다·
“의무도 책임도 아닙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게 이유입니다·”
침묵기 잠시 감돌았다·
그 끝에서
“푸흡!”
엘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재밌는 답이군!”
짝짝!
박수를 친 그는 말했다·
“역시 그 친구가 참 인복이 많은 듯해· 나 같은 친우 당신 같은 부인이 있지 않소? 아 그렇게 표정을 굳히진 마시구려· 그저 걱정되어서 그랬소· 그 친구가 가진 게 많아서 덤벼드는 여인이 종종 있었거든·”
“····”
“미안하오· 사과의 뜻으로 말해주지·”
엘버스는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 친구 동정이오· 여자하곤 손도 못 잡아본·”
턱 하고 안도가 차오르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자괴감이 차오르고 부끄러워지니·
다만 티리아는 말했다·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얼굴은 아닌데·”
“그리 보인다면 유감입니다·”
엘버스가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웃었다·
참으로 그것을 읽으려는 자의 심력을 갉아먹는 미소였다·
불편함이 차올랐다·
동시에 티리아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가주와 친우가 되신 이유를 알겠군요·”
“무엇이라 생각하오?”
“가주께선 굳이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하지 않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뿐·”
그렇기에 엘릭은 엘버스에게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것은 엘버스로서도 반갑고 소중한 그런 대등한 관계였을 것이다·
정답임은 그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부인과도 꽤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졌소·”
웃기지도 않는 소리·
티리아는 절대 그와 친해질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어이쿠 그리 벽을 치실 것까지야·”
티리아는 대화만으로 상대를 갉아먹는 자와 가까이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