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에 작은 사고가 있었으나 어찌 되었든 성공·
티리아는 무사히 서부 연합 지휘 본부에 도착했고 잔류를 허가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위빈 시골 땅에서 농사나 짓던 여인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시간을 놀리게 된 것인데 그것은 티리아의 계획적이고 꼼꼼한 성격상 참으로 달갑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한 선택이 있었다·
“카샤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엘릭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서부 연합의 지휘 본부는 달리 말해 검귀 카샤를 눈으로 보아온 사람들의 집단이란 뜻이다·
어딜 가도 생전 볼 일이라곤 없었던 정예병과 고위 귀족으로 평해질 서부의 장군들·
그들을 통해서라면 엘릭이 살아온 삶을 가늠할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다행히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티리아가 카샤의 아내라는 것은 이미 기사를 통해 만천하에 밝혀진 사실이었고 그런 만큼 그들은 때로는 호의적으로 때로는 두려워하며 티리아의 말에 답해줬다·
“검귀라는 별명의 뜻은 다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지요· 전쟁터에서의 카샤는 이 땅에서 죽어 나간 병사들의 원한이 그러모아 만들어진 귀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끔찍하고 두려운·”
“카샤는 말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초에 입을 여는 상황이 잘 없었죠· 전장에서 그가 귀신이라 불린 이유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그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기에 타인의 비명을 수집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요·”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경의 표시는 아니고 언젠가 입을 연 카샤의 어투가 늙은이 같아서라고 했습죠· 뭐 그렇다고 그를 놀릴 만큼 간이 큰 사람이 있진 않지만요·”
“괴물이었습니다·”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아니 아군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략적 가치를 추산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어떤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맡겨도 돌아오는 것은 성공했으니 보수를 달라는 말이었으니까요·”
티리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낮 용병부터 병사를 거쳐 장군까지 온갖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카샤는 티리아가 알던 엘릭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스스로를 숨기고 인연을 잘 만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이쯤 되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누구도 검을 휘두르지 않는 가주를 알려 하지 않았구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씁쓸했다·
하긴 당장 자신조차 엘릭이 카샤라는 걸 알지 못했을 땐 그를 미신적 존재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 그를 알 이유가 이들에겐 없을 터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나날이 꽤 짧지 않게 이어졌다·
그동안 티리아는 몇 차례 엘버스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이따금 찾아오는 금공과 염화를 상대했다·
그런 일조차 없으면 엘릭이 전장에 돌아온 이후 나왔던 그의 기사들을 수집했고 그러다 방에 틀어박혀 잠을 잤다·
그때까지도 엘릭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자크로 떠나갔다는 말은 들은 지도 1달은 훌쩍 넘은 듯한데 대관절 그곳에서의 볼 일이 뭔지 도통 다른 소식을 전해오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금공이 이르길 그가 무사하다· 마왕이 그것을 보증했다· 라는 말만 해온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마님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겠습니까?”
다날이 은근슬쩍 말해왔다·
별달리 일정이 존재하지 않아 방에만 있었던 것이 걱정스러웠던 걸까·
이곳까지 묵묵히 함께 와준 기사들의 기색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내 너무 안에만 있었군· 나가 보세·”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의견을 따라줘도 좋으리란 생각에 몸을 일으킨 티리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했다·
“그러고보니 말일세·”
“예?”
“염화님과 있었던 일은 잘 해결되었나?”
움찔 그 묘한 삼각관계를 이르는 말에 다날과 리키의 몸이 떨렸다·
이어 떠오르는 것은 웃음이다·
“아무렴요·”
두 사람은 아직 티리아에게 관계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부인이 알면 너희 다 뒤진다?
자기애 넘치는 이그렛의 엄포 탓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좀 잘났잖냐· 부인이 나를 카샤를 눈독 들이는 암코양이로 보면 어떡해? 난 그냥 응원하고 싶은 건데· 그러니까 입 다물라고· 아참 내가 지휘 본부 들르는 건 너희들 보러 오는 거로 해둘 테니까 그렇게 알고·
두 사람은 세상이 한창 미운 참이었다·
*
어느 날 다날이 물었다·
“얘들아·”
“예·”
“우리 뭐하고 있는 거냐·”
“····”
단원 중 누구도 그에 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문득 지나온 삶을 돌이켰다·
서부의 사신이라 불리던 암살자에서 동부 지부의 핵심 인력으로 그리고 카샤의 기사가 된 뒤에 서부로 복귀·
그냥 왔다 갔다만 한 것도 아니다· 매 순간 걸어 다니는 재앙 같은 것들에게 치이고 산다·
카샤부터 이그렛 거기에 금공과 그레이엄 공자까지·
자신들의 정체를 아는 것은 딱 네 명밖에 없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마음만 먹는다면 목줄을 쥐어틀어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리도 파란만장한 삶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눈물이 다 나는 지경에 이르러 다날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이번 역시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답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벽에 똥칠을 해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겸허히 수용하며 운명을 받아들여야지·
그러니 생각할 것은 하나다·
카샤와 마님이 만나는 것은 확정·
이미 그녀를 위빈에서 지키라는 명에 위배된 만큼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로 굳어지고 있었다·
“마님은?”
티리아의 눈에 확실히 드는 것·
혹여 카샤가 자신들을 해하려 들 때 그녀가 앞장서서 ‘이 사람들이 날 성심성의껏 지켜줬어요!’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나오신다고 합니다·”
“좋아 오늘도 열심히 모셔보자고·”
“산책 코스는 이렇게 정했습니다·”
리키가 종이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꼭 암살자의 잠입 루트를 기록해놓은 듯한 암호화된 지도였다·
다날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안전하군·”
티리아가 아니라 자신들이 안전한 길이다·
엘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길·
그럼에도 치안이 좋으며 불시의 습격에 바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트여있는 골목·
마침 날씨도 좋으니 티리아의 울적한 기분을 낫게 해줄 법하다·
다날의 흡족한 미소에 단원들의 의욕도 고취됐다·
“얘들아 오늘 임무도 완벽하게 해내보자·”
“옙!”
그런 순간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티리아가 가볍게 단장하고 나왔다·
다날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로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산책이 시작됐다·
*
이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햇볕은 쨍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게다가 이곳이 전쟁지대 중에서도 후방에 속하는 곳이다 보니 별다른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다·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기가 좋은 것이다·
티리아 또한 그래 보였다·
“마님 그쪽 길이 아닙니다·”
“아 음····”
얼마나 멍해져 있던 것인지 벽에 머리를 박으려 한다·
다날은 빠르게 티리아의 방향을 정정했다·
‘하여간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단 말이지·’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리 고민에 빠져 있을 때면 원래 성정이 나오는 듯했다·
두꺼운 철 가면을 쓰면서도 막상 까보면 소녀 같은 사람이라 어색할 때가 많다·
괜히 걱정스러운 순간이 있는 것이다·
“미안하네· 내 잠시 고민이 있어서·”
“아닙니다· 혹 산책을 그만두시고 싶으신 것은····”
“아니네 오랜만에 나오니 속이 뚫리는 기분일세· 이리 권해주어 고맙네· 자네들에겐 언제나 신세만 지는 듯해·”
다날과 단원들의 눈이 빛났다·
“저희 역할입니다!”
“책임이라 한들 그것을 다하는 것은 능히 칭찬받을 일이지·”
오늘도 호감도를 적립하는 건가!
함박 웃음이 그들의 얼굴 위로 그려졌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인간도 있는데·”
티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날은 왜인지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무력적인 부분으로 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그녀일진대 기세만으로 이리 공포에 떨게 만들다니·
다날과 단원들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 되었다·
“음 괜한 말을 했군· 잊어주시게·”
“옙····”
그런 잡담이나 하며 한창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막 골목을 지나쳐 돌아가는 순간
쿵!
마침 그곳을 나오던 사람과 티리아가 부딪쳤다·
“읏···!”
“아 죄송합니다·”
“마님!”
다날은 깜짝 놀라며 휘청거리는 그녀를 지탱했다·
그리하며 한껏 성난 얼굴을 만들었다·
그것은 분노를 가장한 당황이었다·
골목 뒤에 사람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과 티리아의 몸에 생채기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혼재된 당황·
실수했다·
생각이 치밀자 다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어느 놈이냐!”
화살을 적에게 돌리고자 내뱉은 외침·
하나 직후 골목에서 튀어나온 남자를 마주한 다날은 바짝 얼어붙었다·
‘얼레?’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선하게 웃는 금발의 사내는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다·
흰색의 펑퍼짐한 신관복을 입었음에도 도드라지는 근육의 형태는 다날이 이미 아는 것이었다·
“다 단장·”
리키가 어쩔 줄 몰라하며 속삭였다·
다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서 성····”
성자 하임베르크·
대륙의 7강 중 하나이자
“쉿 모른 척 해주시겠소?”
이그렛과 함께 서부의 2대 광인으로 꼽히는 미치광이·
“우연한 만남은 여기까지· 실례를 끼쳐 죄송하오·”
그가 소리 없이 멀어졌다·
살았나? 다날은 손끝의 떨림을 느끼며 그가 나타난 쪽을 바라봤다·
[지새는 밤의 여인들]
누가 봐도 퇴폐적인 이름 건물 그리고 헐벗은 여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
성자는 소문대로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