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2 책임과 의무 (4)
위빈의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가장 화려한 것이 무엇이오?’라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돌아오는 답이 있었다·
바로 ‘위빈 가의 저택이오’였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저택은 묻어난 세월만큼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고 장식물들의 값어치만큼이나 눈부신 빛을 발했다·
절제와 질서를 미덕으로 아는 포트먼과는 대칭점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저택인 것이다·
또각또각―
그 저택의 주인은 오늘 분주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셉 위빈 현 위빈 남작가의 가주이자 티리아의 아버지였다·
“그놈이 돌아오긴 돌아오는군·”
조셉은 넥타이를 조여 매며 말했다· 그 넥타이는 수도에서도 부르는 게 값인 비싼 천을 장인이 한땀한땀 지어 완성한 넥타이였다·
“하필 이런 순간에 오다니 참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아니오?”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천것이죠· 사라질 거면 영영 사라지던가 딱 봐도 유산을 탐하러 온 거잖아요? 그게 어떤 돈인데!”
답하는 것은 부인인 아냑 위빈이었다·
그녀는 쪽빛의 화려한 드레스 위로 값비싼 치장을 두른 채였다·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핀 하나가 위빈의 농민 가족이 한달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값어치였다·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어떡하죠? 그놈이 혹시 유산의 상속권을 주장하면····”
“흥! 지까짓 게 뭐라고 상속권을 주장하오? 그 돈은 우리 것이오! 딸의 세월을 10년이나 허비하게 한 그놈들에게 정당히 받아야 할 돈!”
“여 역시 그렇죠!”
두 사람은 불안감을 감추려는 듯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호벤 포트먼의 유산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위빈 가는 그 돈이 없으면 더 이상 멀쩡히 운영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아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품위란 곧 평민들과는 다른 겉모습에서부터 나온다 믿는 이들이었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쉽사리 손에 넣음으로써 온다 믿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소비는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가 있었다·
위빈이 가난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질 좋은 밀을 생산하는 밀밭이 지천에 널려 있음에도 그것으로 얻는 벌이보다 소비가 더 컸기 때문이다·
가세가 다 기울어갈 즘에 딸을 포트먼에 보낸 것은 그들로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가문을 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딸에게 있지 않던가·
마냥 방치하지도 않았다·
조셉은 실제로 포트먼을 위빈과 같은 격의 귀족가로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움직였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 포트먼이 남작가가 된 것은 위빈 덕이었고 그것으로 의리는 다한 것이다·
‘아암 딸을 남편도 없이 10년이나 살게 했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최초의 계약 이후 포트먼에서 년 단위로 들어오던 지원으론 모자랐다·
최초엔 그것으로 족했으나 소비가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근 영지의 귀족들과 사냥대회를 한다거나 부인의 티 파티를 지원한다거나 그 외에 저택의 유지보수와 스스로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던가· 이제야 입지를 늘려가는 참인데 더 큰 것을 손에 쥐려면 호벤 포트먼의 막대한 유산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분명 그놈과 죽은 포트먼이 딸아이를 겁박하고 있는 것일 테지· 그게 아니면 티리아가 우리 편지에 한 번도 답하지 않은 것이 말이 되오?”
“그럼요! 티리아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요!”
아냑은 슬픔을 가장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샘을 콕콕 찍었다·
이젠 포트먼이 된 티리아는 그곳으로 향한 이후 단 한 번도 집안과 교류하지 않았다· 정기적인 모임 자리에나 가끔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그리고 호벤 포트먼이 타계한 이후는 아예 연을 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다· 방문은 허락도 안 한다·
억지로 밀고 들어가는 방도는 떠올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입구에서 소박맞게 된다면 인근 귀족들에게 비웃음거리나 될 테니 말이다·
“우리가 딸을 구해줘야지요!”
“아암!”
어떻게 키운 딸이던가· 얼마나 많은 자원을 들여 키운 딸이던가·
그 아이의 하얀 피부와 황금색 머리칼은 직접 낳아 물려준 것이다·
그 아이의 예절은 수도의 예절 교사를 불러 가르친 것이다·
귀족으로서의 마음가짐은 또 어떤가? 품위를 내려놓으면서까지 훈계해 완성한 것이다·
티리아 위빈은 감히 이르건대 위빈 가의 역작이었다·
본래 백작 이상의 귀족에게 시집보낼 아이였던 말이다·
그런 아이를 보냈는데 새장 안의 새처럼 가둬두고만 있다니·
그러면서 그 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있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치솟는 화에 두 사람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러나 그 기색은 응접실 앞으로 도착할 즘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귀족은 쉬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인 까닭이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 인간 같지도 않던 호벤 포트먼의 아들이니 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꽤 조마조마했다·
그리 마주한 순간 두 사람은 안도했다·
“너무 늦게 인사드리러 와 죄송합니다· 엘릭 포트먼입니다·”
절름발이 교양이라곤 없는 평민의 단촐한 인사법·
서글서글한 인상은 봐줄만 하나 그게 끝·
두 사람에게 엘릭은 아주 쉬운 상대로 보였다·
*
과하다·
엘릭이 두 사람의 치장을 처음 마주하고 떠올린 생각이었다·
10년 전 혼인식 날의 기억으론 이 정도까지 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세월이 참 무섭긴 했다·
무심코 떠올리게 되는 것은 친우 엘버스 그레이엄의 말이었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지· 제아무리 비싼 것을 둘러도 그게 티가 나선 안 된다네· 치장의 가치가 주인을 잡아먹었다는 말이 되거든·
그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 두 사람은 뭐랄까 치장의 무게에 짓눌려 찌부러진 사람들 같았다·
실례되는 생각이었으나 어찌하겠는가 사실이 그런 것을·
여하튼 첫인상은 좋지 않았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런 감정은 짙어져만 갔다·
억누르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이 보인 태도가 그랬던 까닭이다·
“10년만인가요? 얼굴 보는 일이 참 힘들군요·”
“사정이 있으셨겠지· 이런 쪽의 의무에 관해선 배운 일이 없으실 테니·”
“하긴 포트먼이 귀족에 편입된 건····”
공격적이다· 나름의 품위를 지키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이어가는 말이었으나 그 의도가 너무 명확했다·
“···음 모를 만도 하네요·”
사실 죄인인 입장이긴 했다·
그들로선 딸을 10년이나 방치하고 돌아온 원수가 자신이지 않은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태도는 정당할 수도 있었다·
기꺼이 감내했을 것이다·
이들의 진심이 그랬더라면 말이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죠?”
“저택으로 왔던 편지를 봤습니다· 그에 관하여····”
“아 그 얘기였나·”
피식 비웃음에 가까운 작은 소음이 공간 위로 튀어 올랐다·
이후의 일은 엘릭에게 작지 않은 불쾌함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러 오신 거겠죠·”
이들의 말이 그 목적지가 엘릭으로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숨기려 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이쪽의 언어엔 재주가 없는 듯하니 조금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정당한 값으로 우리가 받아 가려 하네·”
“우리 딸아이를 그리 내버려 둔 값이죠·”
“이제와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긴 너무 염치없다 생각하지 않나? 솔직한 말로 자네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자네가 의미 있는 일에 쓸지도 의문이군· 그와 자네는 참으로 달라 보이네·”
“차라리 영지의 이익을 위해선····”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맞겠지·”
엘릭은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가는 말을 경청했다·
그들의 노골적인 속내를 조금의 가감없이 받아들이고 그 말을 분해하여 속뜻을 살폈다·
그리하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 끝에서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없구나·’
티리아에 관한 말이 없었다·
이들은 인사를 나눈 직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으며 유산과 관계되지 않은 말로는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다·
10년이나 고생해온 딸이 아닌가·
또한 지난 1년간 왕래하지 않은 딸이 아닌가·
하다못해 안부 정도는 물어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찌하여·’
그녀에 관한 것 묻지 않는지·
엘릭은 혹여나 하는 기대에 대뜸 그런 말을 흘렸다·
“우선 부인을 함께 데려오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그녀의 업무가 바빠····”
“말을 돌리는 겐가?”
성난 목소리로 반문함에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감정이 그리는 형상은 분노에 가까웠고 혐오와 닮아 있었다·
이런 종류의 원망은 소년 시절을 벗어나며 털어버렸을 줄 알았건만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직 꽤 힘든 일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아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런 것이겠지·
엘릭은 티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인지 그녀의 그런 무심함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는지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저 의무를 말하던 눈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격류에 휩쓸린 듯 요동치는 감정 속 어딘가 피어나는 것은 측은지심이었다·
엘릭은 그녀의 인생을 동정했고 그 속에 저들과 같은 죄인이 된 스스로를 질책했다·
와중에도 조셉 위빈은 말을 쏟아냈다·
상대를 억누르려는 듯한 힐난의 말이었다·
개중 유독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과한 탐욕은 사람을 망치는 법이라네· 이 점을 기억해주면 좋겠네·”
과한 탐욕·
그 말이 기폭제였다·
“···그 탐욕 부리겠다면 어쩔 것이오?”
“···뭐라고 했나?”
“탐욕을 부리겠다 하면 당신들이 어찌할 수 있냐 물었소·”
엘릭은 고개를 들었다·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소?”
도발하듯 건넨 말에 위빈 남작부부의 얼굴이 멍해졌다·
먼저 반응한 것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조셉 위빈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 이런 무도한···!”
“맞소·”
멈칫 조셉이 굳었다·
엘릭은 자리에 앉은 채로 여전히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는 무도한 자가 맞소· 조금 많이·”
그것은 그가 지나온 지난 10년을 일컫는 말이었다·
엘릭의 분위기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