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환경에서의 아침은 언제나 낯선 법이다·
그것은 비단 낯선 장소를 갈 때뿐만 아니라 긴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온 때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아·”
엘릭은 멍하니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랬지 위빈으로 돌아왔었지·
푹신한 침대의 감촉과 방 안의 옅은 원목향 그것을 덮는 이불의 따스한 냄새나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립고 익숙했다·
현실감은 그제야 고개를 빼꼼 내밀기 시작했다·
“으음····”
엘릭은 작게 침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마른세수를 하니 전날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주책맞게 울먹이며 마을 사람들을 끌어안던 것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었다·
외에 떠오르는 것은 기쁨·
돌고 돌아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껍다·
그런 순간이었다·
“영주님·”
알디오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지긋한 미소와 함께 그는 커튼을 쳤다·
“허허 전장에서 사신 분이 아침이 이리 느려서 되겠습니까·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피로해서 그랬지· 그보다 영주님은 웬 말인가· 그냥 전처럼 도련님이라고 하게나·”
“이젠 안 될 말입니다·”
알디오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진짜 이 위빈의 영주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그에 엘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호선을 그리며 접혔고 그 순간 엘릭은 크게 웃어버렸다·
“여하튼 능글맞단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엘릭은 가벼운 세안을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갔다·
티리아가 식당 앞에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웃는 그녀가 참 어여뻐 엘릭은 답했다·
“좋은 아침이오· 간밤엔 잘 주무셨소?”
“근래 들어 가장 잘 잔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게 보였다·
새삼 드는 생각이 있었다·
티리아는 규칙적인 생활을 참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장에서의 티리아는 언제나 그곳의 어수선함에 작은 불편함을 보였었다·
꼭 영역 밖으로 내몰린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경계심이 있었다 해야 할까·
하나 엘릭은 그런 사실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괜히 티리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인 듯하여·
“어서 식사부터 하지·”
“예·”
포트먼가의 아침 식사·
부친 때부터 변하지 않은 메뉴인 토스트와 베이컨 프라이가 접시 위에 얹어져 있었다·
문득 깨닫길 그것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위장을 일깨우기에 적합한 메뉴였다·
“가주?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멍하게·”
“···아니오·”
엘릭은 싱긋 웃어넘겼다·
“한데 오늘은 무얼 할 것이오? 한동안 영지를 돌보지 못했으니 바쁠 것 아니오·”
“간단한 서류 처리만 하려고 합니다· 큼직한 안건은 없었던 듯하여·”
“그럼 남은 시간은···?”
티리아가 조금은 개구지게 웃었다·
“가주와 보내는 것이지요·”
꽤 요사스럽게 권유하는 말이라 엘릭은 끅끅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려·”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
곧장 도착한 집무실에서 엘릭은 기시감을 느꼈다·
아직 티리아와 어색하던 시기 그리 쩔쩔매며 일을 배웠던 기억이 생생했던 까닭이다·
다만 반가운 것은 이곳 역시 변한 건 없었다는 것 정도다·
창을 통해 보이는 여름 밀밭의 풍경 사람들의 오감과 볕의 따스함이 단번에 들어오는 조감은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그 순간 엘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을 뛰노는 아이들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을 꼬나쥔 채 꺄르륵 웃는 미소가 참으로 맑다·
“아이들이 참 어여쁘지 않습니까?”
티리아가 물어왔다·
그녀도 같은 풍경을 본 걸까·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아침 식사 때의 기시감을 또 한 번 느꼈다·
깨달음이라 할 것이었다·
‘아·’
집무실은 이 저택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구조였구나·
부친은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일했구나·
오늘만 두 번째·
갑작스럽게 왜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지 영 모를 일이었다·
어색함이 치밀어 엘릭은 목을 쓸었다·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람·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냈다·
“일이나 빨리 끝내보도록 합시다·”
엘릭은 그리 말을 줄였다·
*
티리아가 장담한 대로 일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끝을 맺었다·
그쯤 엘릭은 저택의 정원으로 나와 꽃봉오리를 틔운 꽃들을 그것들이 사뿐히 앉아있는 화원에 들어섰다·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구려·”
“계절 하나를 보냈으니까요·”
티리아는 쪼그려 앉아 검지 끝으로 꽃을 쓸었다·
작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었고 그것이 엘릭으로 하여금 지긋한 미소를 그리게 했다·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으니 티리아가 꽃에 관한 것들을 재잘거렸다·
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편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덕분에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대충 그녀의 말에 맞장구나 치며 시간을 보내길 잠시·
기시감은 또 한 번 찾아왔다·
‘···화원·’
화원은 본디 공터였다·
흙이나 잡초 따위가 겨우 자리해 있어 어릴 적엔 언제나 이곳에서 뛰어놀며 몸을 더럽혔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화원 또한 집무실 창문 아래에 존재했다·
엘릭의 감상은 그칠 줄을 몰랐다·
*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것일까·
마침내 엘릭은 그에 관한 의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부친에 대한 감정은 이미 지운지 오래였다·
이젠 좋다 나쁘다를 가를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 날 이후 위빈을 떠올릴 때도 부친에 관한 것만큼은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을진대 오죽하겠는가·
그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수령하지 않은 채로 봉해두고 있었다·
아마 오늘 같은 고민이 없었더라면 영영 그 재산은 봉해두고 살았을 것이다·
카샤로 번 돈을 생각하면 그 유산은 그리 필요한 게 아니었던 까닭이다·
한데도 이제와서 별 잡스러운 생각이 다 들고 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떠올려 본다·
그는 언제나 아침 식사만은 같은 자리에서 하길 권유했다·
메뉴는 간단한 요깃거리·
식탁 위로 떠오르는 것은 침묵이었고 그것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이후의 일과는 서로가 완전히 동떨어진 형태였다·
자신은 언제나 밖을 싸돌아다니며 사고를 쳤고 부친은 집무실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집무실은 자신이 가까이 있다면 꼭 찾을 수 있을 커다란 창이 있는 집무실이었다·
그것이 묘하게 거슬렸다·
가슴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을 심었다·
이것의 정체를 무어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엘릭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가지 않았지·’
부친의 묘비에는 처음 귀향했던 날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엘릭은 오랜만에 그곳을 찾을 결심을 했다·
*
묘지는 홀로 찾아갔다·
스스로도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티리아에게 말해봐야 그녀까지 허튼 고민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 탓이었다·
마차를 타고 위빈에서 가장 높게 솟은 언덕으로·
그 꼭대기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여전하십니다· 뭐 여전하지 않을 도리도 없으시겠지만·”
부친의 묘비는 위빈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가만 존재하고 있었다·
엘릭은 그 순간 온종일 속에서 찰랑였던 감정이 크게 출렁이는 걸 느꼈다·
묘비 앞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깔고 앉으니 헛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거의 1년 만에 찾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왜 하고있는 걸까·
영문 모를 일이었다·
“자주 찾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실 거란 생각은 않습니다· 그냥··· 저희가 그랬잖습니까·”
혈연으로 묶여 있음에도 한 번도 서로를 온전히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끝내 악연으로 매듭지었다는 걸 생각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맞았다·
그걸 안다·
그럼에도 엘릭은 입술을 달싹였다·
속에 지근거리는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까닭에·
엘릭은 한참이나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이내 물었다·
“당신은····”
잘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살았습니까· 제가 떠난 동안·”
그것은 한 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감정을 묻는 말이었다·
원망에 눈이 가려져 실루엣조차 쫓지 못했던 감정을 묻는 말이었다·
그제야 엘릭은 깨달았다·
‘아 알려고도 하지 않았구나·’
자신은 단 한 번도 부친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어린 자신은 그저 그를 냉혈하고 못난 아비라고 생각하려 했다는 것을·
이제야 그런 사실을 되새기는 이유는 오해로 빚어진 인연의 끝을 알기 때문이었다·
말하지 않고선 모르는 것이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엘릭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티리아와의 오해는 다행스러운 결말로 끝맺었으나 이번만큼은 그 진의를 알 방법이 없었다·
오해를 풀 상대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괜히 속을 끓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비석은 이리 햇볕은 좋은 와중에도 생전 그가 비치던 냉기를 연상케 할 만큼 차가웠다·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워 손에 힘들 더하는 순간이었다·
투둑―
비석의 끄트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엘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그제야 마나를 풀어 비석을 감싸니·
‘···공간?’
비석은 안쪽에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그저 돌은 깎아 만든 게 아니라 특별한 세공이 더해져 있다는 의미·
엘릭은 그 사실에 헛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