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리아가 눈을 뜬 것은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흐릿하게 풀려있던 눈에 초점이 잡히자 발견된 것은 구석에 웅크려 잠들어 있는 엘릭이었다·
왜 저러고 자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티리아는 이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으음····”
엘릭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악몽을 꾸는 걸까·
그래 확실히 전장을 전전한 이후부턴 매일 악몽을 꿨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있다·
저택으로 돌아온 지금도 악몽은 영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이어 보이는 것은 전신의 상처였다·
한 곳도 성한 구석이 없는 몸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몸에 기록해둔 형상이라 속상함을 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를 가엾이 여기며 상처를 쓰다듬던 중 티리아는 발견해버렸다·
‘····’
엘릭의 목덜미에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뺨이 붉어졌다·
전날 밤의 일이 문득 되새겨진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엘릭의 등을 부욱 그은 일이라거나 소리를 참으려 엘릭의 목덜미를 문 일이라거나 좀처럼 지치지 않는 엘릭 탓에 혼절할 뻔한 일이라거나·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또 기분 좋은 순간의 기억에 숨이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엘릭이 눈을 뜬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아·”
눈이 마주쳤다·
티리아의 시선이 떨림을 품었다·
엘릭 또한 눈을 끔뻑이다 이내 배시시 웃었다·
부끄러운 듯 팔을 뻗어 티리아를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좋은 아침이오·”
“예····”
“잠이 편히 주무셨소?”
“몸이 조금 뻐근한 것만 빼면··· 그러는 당신은 어떠신가요?”
“잘 잤소·”
“악몽을 꾸는 듯했는데····”
“전장의 꿈은 아니었소· 음 그냥·”
엘릭이 말을 얼버무렸다·
티리아는 그의 품 체향에 둘러싸여 괜히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기분을 느꼈다·
분위기가 또 야릇해지는 것이 이대로 다시 하게 되는 걸까·
늦바람이 무서운 법이라던데 아침부터 붙어먹을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괴감이 치솟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티리아의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진 않았다·
-영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덜컥!
엘릭과 티리아가 동시에 튕기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허겁지겁 옷을 갖춰 입었다·
와중 엘릭이 외쳤다·
“기 기다리게! 잠시만!”
당황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에 티리아까지 한껏 부끄러워졌다·
어떻게든 옷을 다 입은 직후였다·
“그 그럼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티리아가 도도도 잰걸음으로 방문을 향해 문을 열었다·
“마 마님?”
알디오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의 시선이 엘릭과 티리아를 오갔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탄성 “아!”와 솟아오르는 입꼬리·
알디오가 따스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엘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딘가 대견함을 담은 것처럼도 보였다·
“조 조금있다 뵙지·”
엘릭의 말에 티리아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티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채였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간 순간
“마님! 영주님 방에서····”
“그만 그만····”
하녀장의 다 안다는 듯한 미소에 티리아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발 그만·”
“아휴 부끄러워하시긴·”
티리아는 울고 싶었다·
*
기쁜 일임과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엘릭에겐 특히 그랬다·
“어제 영주님이랑 마님이 같은 방에서····”
“그럼 이제 후계도 생각하시는 건가?”
“세상에 나는 아가씨였으면 좋겠어· 마님을 닮은 아가씨면 되게····”
엘릭의 감각은 매우 예민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저택 구석에서 이는 속삭임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함이었다·
그런 만큼 사용인들의 말을 다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골 동네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이리라·
재미있어 보이는 사건만 생기면 쉬지 않고 재잘대며 소문을 퍼뜨리는데 이걸 어찌 막을 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이고 이 알디오는 참 기쁩니다· 제가 이 집안 3대를 다 모실 수 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이가 생기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이 참 심하군·”
“곧 생기겠지요· 응? 무려 검귀 카샤 아니십니까! 이 대륙의 7강! 대륙에게 가장 강한 검사! 분명 영주님의 씨는 강건할····”
“그만해주시게· 내가 미안하네· 그냥 다 미안하니까 그만····”
엘릭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티리아를 만난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뒤늦게 식당으로 내려온 티리아는 아침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겠다는 듯 첫 인사를 건넸다·
엘릭도 기꺼이 따랐다·
“···좋은 아침이오· 식사부터 들지·”
“예····”
얼굴이 새빨개진 남녀가 서로의 눈도 못 마주치며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은 분명 진풍경이었다·
그 오묘하고 야릇한 분위기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꺅! 꺅!’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 이후에도 그랬다·
별다른 업무가 없어 두 사람이 내내 붙어있으니 어딜 가도 시선이 따라붙었다·
결국 두 사람이 피난처로 정한 것은 서재였다·
이곳만큼은 사용인들이 허락없이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음·”
엘릭은 말을 골랐다·
분위기에 취해 밤을 함께 보냈으나 전날 느꼈던 씁쓸함이나 티리아에게 위로받으며 느꼈던 충만함을 곱씹을 새도 없이 이리 난장판이 되어버리니 정신이 어수선하다·
그나마 기꺼운 점이라면 티리아와의 거리가 또 이만큼 좁아졌다는 것일까·
넓은 소파에 앉아 있으면서도 티리아는 엘릭에게 딱 붙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래 놓고는 책에 시선을 콕 박아두고 있었다·
티리아의 귓불이 붉다·
괜히 한 번 깨물어보고 싶다가도 그랬다가 티리아가 소리라도 흘리면 또 부끄러워질 것 같아 괜히 참게 된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겨우 엘릭이 생각해낸 변명거리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말이오·”
“예?”
“아버지의 유산 그걸 부인 앞으로 돌려두려고 하오·”
티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그녀는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음 직접 수령하지 않으시고 말입니까?”
“관리할 자신이 없소· 그리고 그 유산이라면 포트먼에서 행한 사업에서부터 나온 돈이 아니오? 정리하기 전의 사업은 부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그걸 복구해주었으면 하오·”
말을 내뱉고 나서야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그래 이것이 옳을 터다·’
더 이상 아버지를 원망치 않기로 했다·
또한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서로가 닮아 불행했던 사내를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아버지에게 그리 좋은 아들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위한 방편이었다·
엘릭은 포트먼에 아버지의 흔적을 조금은 더 남겨두기로 했다·
그가 일평생을 일궜던 사업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알겠습니다· 큰 사업 몇 가지는 교육을 받았었으니·”
“부탁하오·”
“부탁이랄 게 있나요· 가문을 위한 일인데·”
티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늘도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오묘하게 지적인 분위기 위로 전날 밤의 얼굴이 겹쳤다·
엘릭의 숨이 조금 뜨거워졌다·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가 있었다·
그것은 확신으로 비롯된 경고였다·
아 이제는 절대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구나·
그런 티리아의 얼굴을 알았으니 또한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니 매 순간 이런 욕구에 살겠지·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엘릭의 팔은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기 시작했다·
티리아는 살짝 긴장한 듯 몸을 굳히다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몸을 기대어왔다·
엘릭은 이것이 허락임을 알았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까지는 여유가 있구려·”
“예····”
원숭이처럼 쉬지도 않고 붙어먹는 듯하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빼꼼 고개를 내밀다 이내 욕구에 밀려 다시 들어간다·
예컨대 늦바람이 참 무섭다는 말이다·
*
참 부끄럽게도 두 사람은 하루도 잠자리를 거른 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 달리 쓰고 있던 방은 하나로 합치게 되었고 아침에 사용인들이 깨우러 오는 일조차 없어졌다·
마음의 거리를 따라가겠다는 듯 몸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 것이다·
그런 날이 이어지니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다른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아니 비단 두 사람뿐만 아니었다·
“잘 부탁드리네·”
“예 마님·”
위빈으로 돌아온 지 3주가 되는 날·
슬슬 포트먼가는 후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녀들의 우스갯소리를 빌리자면 ‘그렇게 열심히 해댔는데 애 하나는 생겼겠지’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릭은 부끄러움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다만 에드워드에게 서부의 의원을 요청했다·
산모를 전문으로 보는 의원이었다·
의원이 티리아를 진찰했다·
사용하는 것은 웬 마도구였는데 그것이 티리아의 몸 이곳저곳의 변화를 검진해주는 듯했다·
마침내 검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의원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관리를 하셔야겠군요·”
“아···!”
티리아가 아이를 가졌다·
엘릭이 아버지가 된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98·5화 씬은 후일 외전에서 따로 분량을 할애해 보겠습니다·
본래 씬을 잘 쓰지 못하는 편이라 걱정이 많지만···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절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동안 노벨피아 상위권 야설을 보며!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