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준 상무의 싸움(5) >
군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영훈의 옆에서 운전하는 이는 놀랍게도 이형준 상무였다·
본래 따로 가고 싶었지만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이동을 회사 사람들에게도 잘 알리고 싶지 않았던 영훈이었기에 운전기사를 붙여준다는 비서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연희와 매일 붙어 다니는 것도 꼴불견이 분명했기에 혼자 내려가려고 했는데 형준의 연락에 같이 움직이는 거였다·
이형준 상무가 직접 운전을 하는 것도 수행기사를 믿지 못해서다·
군산에서 만난 이형준 상무와 조재민 의원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대형은행의 전략기획팀 팀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지휘할 거라는 말에 조 의원이 좋아하는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지방의 별볼일 없는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조 의원의 예상 외의 카리스마를 본 형준은 이번 프로젝트에 더욱 큰 자신감을 얻었다·
“잘할 수 있겠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거야·”
“그런데 말이죠···”
“뭐?”
영훈은 운전에 열중하는 형준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뭐 다른 생각 합니까?”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주 미세하게 상이 변한 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눈치도 못 챌 정도여서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처신 잘하셔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중요한 시기예요· 여자 조심 말 조심 잊으시면 안 됩니다·”
순간 형준은 뜨끔했다·
어제 강 전무와 했던 이야기를 알고 저러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당연하지·”
“어련히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신도 모르는 실수 하나 때문에 나중에 곤란을 겪을 수 있어요·”
“알았어· 조심한다니까·”
형준은 괜히 찔려 자꾸 같은 이야기를 한다며 역성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군산에서 올라와 경부고속도로의 시작이자 끝인 한남대교에 이르렀을 때가 저녁 6시 40분이었다·
형준은 한남대교를 건너 영훈을 내려주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본래 여의도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영훈은 이태원에서 데이트가 있다며 거절하기에 형준은 두 말 하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한남동 고급주택촌에 위치한 이경호 회장의 저택은 높은 담장과 수많은 CCTV로 완벽하게 보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대식구가 같이 사는지라 형준은 항상 본가에 있을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는 했었다·
예전에는 그저 집에 있으면 놀지 못한다는 생각에 철없이 답답해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에 어지간하면 집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이른 저녁부터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니?”
거실에서 동생들과 같이 수다를 떨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거실 탁자 위 수북이 쌓여 있는 명품포장백을 보니 어디 백화점을 또 털어온 게 분명했다·
“그냥 일찍 왔어요·”
“배 고프지? 아줌마! 형준이 왔으니까 형준이 좋아하는 갈비찜 좀 해줘요·”
어머니가 집안일을 해주는 아주머니에게 소리친다·
당연하겠지만 이 집의 여자들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기에 어려서부터 일하는 아주머니가 바뀔 때마다 형준이 좋아하는 메뉴의 맛이 조금씩 달라졌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번 아주머니의 손맛이 좋아 형준은 적어도 집밥 만큼은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죠?”
“아니 방금 오셨어· 아마 서재에 계실거다· 들어가서 인사해·”
“알겠어요·”
형준은 바로 할아버지가 주로 계시는 서재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어? 빨리 왔구나·”
“네·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와 같이 식사하려고 일찍 왔습니다·”
“오~ 그래? 잘 됐구나· 요즘 회사 일은 어떠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신영투증에 있다가 은행으로 와서 그런지 임직원들하고 친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려서 자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렇지· 내 손자라고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서 뻐기고만 있으면 직원들이 흉보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친해지면 그게 다 네 재산이 되는 법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가서 옷 갈아입고 내려와라·”
“네·”
형준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와서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자못 긴장해서 그런지 셔츠를 벗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다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이세준 회장과 눈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시팔···
이건 정말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평소 들어오지 않을 이른 시간에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미리 선수를 치려고 했는데 하필 아버지도 오늘따라 일찍 들어올 줄이야·
형준은 마치 연기자라도 된 듯 아버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오셨어요?”
“일찍 왔구나?”
“네· 한 번쯤은 일찍 들어와서 가족하고 같이 식사라도 하려고요·”
“잘했다·”
그렇게 이세준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와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형준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심이 분명했다·
맹수의 추적을 받는 초식동물이 된 것 마냥 소름이 돋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분명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자 드는 공포심은 어찌할 수 없었다·
형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뉴스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샌가 아주머니가 다가와 식사 시간임을 알렸다·
형준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로 정신을 차리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식사 자리로 들어섰다·
푸짐하게 차려진 한 상을 보면 절로 군침이 돌 터였지만 오늘 만큼은 식욕이 전혀 돌지 않았다·
“앉아라· 형준 애미가 특별히 얘기했나보다· 갈비찜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니?”
이경호 회장은 오랜만에 손자와 같이 식사를 하게 돼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형준이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잡는 순간 이세준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아 말씀 안 드렸는데 형준이를 베트남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경호 회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베트남? 은행에 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굳이 형준이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어?”
“기존 임원진은 사고방식이 굳었습니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생각을 시시각각 맞추어 가기보다 기존에 해왔던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베트남은 우리 신영은행이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인데 베트남 역시 사회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라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기존 임원들이라고 전부 머리가 굳어 있을 리가 있을까·
특히 한국처럼 SNS를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 발전한 곳도 많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형준을 미래 신영금융을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경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우리 형준이처럼 젊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빠르게 변화를 이끌어야 시장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꼼짝없이 베트남으로 가야 할 상황이라 형준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나섰다·
“저기··· 베트남행은 잠시 미루면 어떨까 합니다·”
“왜? 거기 가서는 못 놀까봐 그러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준비하도록 해·”
이세준 부회장의 강압적인 어조에 움찔할 때 이경호 회장이 물었다·
“왜? 애비 말처럼 그냥 놀려고 안 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네·”
“그럼 이유가 있겠구나· 무엇이냐?”
형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지금 멈춰있는 군산조선소를 팔아볼까 합니다·”
“뭘 팔아?”
“무진중공업이 세웠다가 직원을 해고하고 지금 놀고 있는···”
형준이 말을 하는데 이세준 부회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그게 무슨 벼룩시장에 나온 물건이야? 마음대로 사고 팔고 하게?”
“그래 그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경호 회장 역시 고개를 흔들며 안 될 거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박하는 형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군산 시의회에서 산업단지입주계약 연장 불가 방침을 세웠습니다· 입주계약 연장 안 되면 무진중공업으로서는 조선소에 세운 막대한 시설을 다 날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주계약 연장을 안 시켜준다고?”
이경호 회장의 눈빛이 변하자 이세준 부회장이 급히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무진중공업이 어딥니까? 정치권에 언론까지 꽉 잡고 있는 데가 무진입니다· 무진자동차가 고려일보에 주는 광고료만 해도 어마어마 합니다·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이 회장의 시선은 형준의 얼굴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는 게냐?”
“확신하는 이유는 있지만 아직 모든 게 정리되진 않았기에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제 생각만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 일은 지금 상당히 진척된 상태입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임대계약 연장이 안 된다고 치자· 그걸 어떻게 우리가 손을 대?”
“시의회에서 임대연장불가 방침을 공표하고 난 뒤 매각 주관사로 신영은행이 선정될 겁니다·”
여기까지 되니 이경호 회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랑 이야기를 한 거냐?”
“차기 군산 시장이 될 사람과 협의를 끝냈습니다·”
“벌써?”
“네·”
“그럼 그냥 베트남 가기 싫어서 땡깡을 부리는 건 아니구나·”
“할아버지 저 베트남에 가기 싫을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제가 우리 회사를 위해 한번 진행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예요· 회사에도 상당한 수익을 안겨줄 게 틀림없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전혀 매력적인 물건도 아니고 괜히 분란만 일으켰다고 역풍을 불러올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 회장이 물었다·
“가격은 어느 정도나 생각하고 있냐?”
“7천억에서 8천억으로 보고 있습니다·”
“7천억이라··· 조선업체들이 다들 기나긴 겨울을 벗어난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만한 현금을 쥐고 있는 업체도 많지 않을 거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고용해야 할 직원들까지 생각하면 투자해야 할 돈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걸 누가 할 수 있겠니? 애비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건 가능성을 보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구매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구매자가 정해져 있다고?”
“네·”
“어디에서 이걸 사겠다고 하더냐?”
“죄송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이 새어나가서 문제가 생길까봐 염려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자신을 벼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보고 있는 이 상황에 현진물산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들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문제는 현진물산의 이야기를 벌써부터 꺼낸다면 그때부터 이 일은 신영은행 전략기획팀의 일이 아니라 신영금융지주의 일로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자신은 베트남으로 가게 될 것이고·
아마 ‘이제부터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지휘할 테니까 너는 베트남 일에 집중해’라는 말로 달랠 게 분명했다·
형준에게 있어 현진물산은 절대 놓을 수 없는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나한테도?”
“죄송합니다· 제가 손을 댄 일이고 제가 핸드링 하고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뉴스가 나오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회장은 손자의 그런 배짱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짓는다·
“허튼 소리는 아니겠지?”
“할아버지 저 어린애 아닙니다·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판은 이미 짜놨습니다· 차기 군산시장은 군산조선소로 선거유세를 들어갈 테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끝이냐?”
“네· 지금은 그저 뉴스 보도만 나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어떤 보도?”
“산업은행에서 무진중공업에게 해주조선해양 매각을 보류한다는 보도가 첫 단추입니다·”
이경호 회장은 진정 놀랐는지 한동안 형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내가 뭘 해줄까?”
“나중에 때가 됐다 싶을 때 산업은행장에게 힘 한 번만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던차에 잘 됐구나· 먹어라· 애비도 들어라· 콩나물국이 시원하구나·”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베트남 행은 미뤄졌다·
형준은 주먹을 움켜쥐고 희열을 애써 감췄고 이세준 부회장은 담담한 눈빛으로 식사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눈빛에서 보여지는 열기를 놓칠 정도로 형준은 어리석지 않았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