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이 튀어 오르다(2) >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영훈의 미소에 김만석 산업은행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직도 의심이 들어· 자네들 정말 할 수 있겠나?”
머리가 희끗한 그는 처음 영훈을 만날 때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산업은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현진물산 관계자가 은행장인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전 정권에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던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공직생활을 청렴하게 보냈다는 것 하나를 자부심으로 삼고 살아왔다·
대개 자신을 직접 찾아오는 기업인들치고 국가와 은행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다는 경험 때문에 좋게 볼 수 없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걱정을 하게 됐다·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으로 해주조선해양을 넘겨달라고 요구하는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김만석 산업은행장은 저들이 바라는대로 무진중공업에 선전포고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게 정말 잘한 선택인지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중이다·
“잘할 수 있어서 하려는 게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게 아니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일해서 다 잘 됐으면 세상이 동화 같았겠지· 이건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날카로운 눈매에 굳게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다부진 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현실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현실적인 방안이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닌 것 같으니까 자네 말을 듣고 매각 건을 전부 보류시킨거야· 말이 되는 듯 했으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건 이 상황이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게 저들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거야· 대한민국 재벌을 무시하지 말게· 저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이기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영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그래도 김만석 은행장은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군산조선소는 얼마에 살 건가?”
“7천억 내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금은 얼마나 들고 있고?”
“얼마 전에 현진관광을 산다고 지갑이 빈털터리입니다·”
“하여튼 재벌들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건지···”
“이번 만큼은 좋게 봐주십시오· 비록 남의 돈이긴 하지만 죽은 조선소를 살리려는 일입니다·”
“아네· 아까도 말했듯이 알고 있어· 아니까 자네 말대로 해주는 거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러네· 그래 어디서 충당할 생각이고?”
“신영은행에서 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담보는 군산조선소를 잡고?”
“아무래도···”
“신영금융 이경호 회장이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데?”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영훈이 얼버무리자 김만석 은행장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좋아· 아마 한 시간도 안 돼서 무진중공업 정 회장이 여기로 들이닥칠 거야· 성격 급한 그 양반이 느긋하게 기다릴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없거든· 내가 막아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그게 아니야·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네· 일단 일을 벌렸으니 이걸 끝까지 만들어가는 건 자네들의 몫이야· 내 손에 있는 물건이지만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해했습니다·”
“여론이 우리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순간 자네들과 우리의 거래는 끝이야·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영훈은 미소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하곤 행장실을 나갔다·
만나기 전에는 걱정했는데 만나고 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이 은행장으로 앉아 있었다·
사주를 보고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은 강골이다·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을 사람이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영훈이 타려는 순간 확연히 굳어진 얼굴로 내리는 노신사와 마주쳤다·
그는 영훈을 지나쳐 거친 발걸음으로 행장실을 향했다·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면 영훈이 아니다·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시간 안에 들이닥칠거라고 하더니 정말 기사가 나가고 한 시간 안에 들이닥쳤다·
그 행동력에 감탄을 하며 영훈은 산업은행 본사를 나왔다·
*
“이거 미안하게 됐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왔구만·”
“아닙니다· 앉으시죠·”
김만석 은행장이 자리를 권했다·
정호균 회장은 서슴없이 소파에 몸을 맡기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기사 보고 오는 길이야· 너무 놀라서 혼이 달아날 뻔했지 뭔가· 웃음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일단 자네한테 저간의 사정이라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으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기사 내용이 사실인가?”
정 회장의 돌직구 질문에 김 행장은 담담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당황이라도 할 법하건만 김 행장의 표정은 차분했다·
오히려 방금 전 영훈과 대화했을 때 표정이 더 다양했다·
“누가 더 준다고 하던가?”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 가지고 있는 물건 값을 더 처준다는데야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잖나? 자네가 가진 건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도 아니고 시장에서 파는 과일도 아니야· 국가 기반 산업 중에 하나네· 수많은 가정을 지탱하는 기업의 운명을 하룻밤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네·”
“회장님 말씀대로 수많은 가정을 지탱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결정한 일입니다·”
“이미 약속한 일이야· EU에 결합심사절차까지 들어갔고 합작법인을 만들기까지 여기에 쏟아부은 돈과 시간만 해도 어마어마하네·”
김만석 행장은 비릿하게 웃었다·
“회장님· 솔직하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하게·”
“그 쏟아부으셨다는 돈과 시간 중에 제대로 쏟아부은 건 인력과 시간이 다 아닙니까? 3조 원이 넘는 회사를 돈 한 푼 안 들이고 다 드시겠다고 달려들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까?”
정 회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떡해서든 해주조선해양을 넘기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행장이었다·
“조선업이 몇 년째 불황이었어· 그런데 무슨 돈이 있어서 해주조선해양을 사나? 자네도 그걸 이해했으니까 합작회사 세우는 걸 동의한 거 아닌가?”
“인정합니다·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해주조선해양을 사겠다는 기업이 나타났습니다· 무려 현금 일부분이 추가된 상태로 말이죠·”
“말도 안 돼! 누가 해주조선해양을 산단 말이야! 현진중공업도 진작에 포기했고 삼전중공업도 포기했었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진짜 이럴 거야?”
김만석 행장은 전혀 물러섬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현금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최소 1조 5천억· 그 정도 자금을 들고 오시면 판을 다시 깔겠습니다·”
“우리가 그 돈이 어디 있어!”
정 회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김 행장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무진오일뱅크 지분을 사우디의 석유회사 아람코에 팔면서 생긴 1조 4천억이 있지 않습니까?”
정호균 회장은 설마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굳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
“그거 투입하십시오· 그럼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밑천이네·”
“밑천을 투입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건 애당초 합의한 것과 달라· 기존 원안으로 가야 해”
“공적자금만 10조 넘게 투입한 회사가 해주조선해양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어떡해서든 넘겨야 했지만 꼭 전액이 아니라고 해도 현금을 주고 사겠다는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회장님께 이 회사를 넘기면 무진중공업과 뒷거래가 있을 거라는 말이 안 나올 거라고 보십니까? 전 회장
님처럼 두꺼운 벽이 되어 막아줄 돈도 백그라운드도 없습니다· 회장님을 위해 이 위기를 감당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서릿발이 풀풀 날리는 김 행장의 말에 정 회장은 더 이상 말로는 해결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하필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공기업 인사들이라고 하나 같이 청렴하고 성실할까?
그 중 대부분이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수억이 넘는 연봉이나 받아 먹으려는 인사들인데 하필 이 김만석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청렴하고 대단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산업은행장 자리는 그저 거쳐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정권이나 다음 정권에서는 못해도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 정도까지 노리고 있을 정도로 야망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회사 내부에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도움 하나 안 되는 기업의 합병 가지고 오점을 남기기 싫어할 수밖에·
“생각이 확고하군· 후회하지 않겠나?”
“사실 이래도 되는건가 싶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정호균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장실을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실장이 즉시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렸다·
묵묵히 기다리던 정 회장은 빈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입을 열었다·
“누가 우리 먹이에 손대려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봐· 그리고 룸싸롱에 각 언론사 기자들 초청해서 배불리 먹여·”
비서실장은 바로 정 회장의 뜻을 알아들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선진당 원내대표와 약속 잡아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
이형준 상무는 블라인드로 가려진 혼자만의 사무실에서 영훈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즉각 기사가 뜬거 보고 그래도 좀 놀랐어· 산업은행장이 그렇게 빨리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알고 보니까 굉장히 웃긴 상황이었습니다· 무진중공업에서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했더라구요· 산업은행에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해주조선해양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가 산다고 하니 걱정은 하면서도 굉장히 달가워 했습니다·]
“그랬겠지· 무진중공업이 돈 없다고 물적 분할로 합작회사 지분을 가지는 형식으로 합병하는 거였거든· 머리를 기가 막히게 쓴 거지· 그런데 정호균 회장이 보통 성깔이 아닌데 산업은행장이 잘 버틸까?”
[야심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군산조선소 이야기를 꺼내니 눈빛부터 달라지던데요?]
“흐흐··· 네 말대로 정치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면 군산조선소 회생 기차에 한 발 올리고 싶겠지· 이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결국 군산경제 회생에 자신도 한 몫 했다고 뻐길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겠죠· 하여튼 제가 맡은 일은 해결했습니다·]
“오케이· 내가 믿···”
말을 하는 중에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상무님·”
“응? 왜?”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후··· 알았어·”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볼일 끝났으면 문을 닫으라는 형준의 눈빛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요즘 들어 갑자기 냉랭하게 바뀐 그의 행동에 불안하고 섭섭했지만 어려운 일이 있는가 싶어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형준은 일부러 그녀를 피하며 어떻게 헤어질 것인지 구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후··· 아버지가 또 찾으신단다·”
[그래요?]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
“왜 말이 없어?”
[아닙니다· 일단 다녀오세요·]
“그래 갔다 와서 통화하자고·”
형준은 찝찝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부회장실로 향했다·
“왔니?”
언제나처럼 이세준 부회장은 따뜻한 미소로 형준을 반겼다·
“네 부르셨어요?”
“기사 봤다· 네가 말한대로 잘 진행되고 있더구나·”
“감사합니다·”
형준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앉는데 탁자에 너저분하게 서류가 어질러져 있었다·
뭔가 해서 보니 놀랍게도 그룹 임원 명부와 실적 그리고 목표달성 성과율 따위를 종합해놓은 자료들이었다·
“이건···”
“어 이번 정기인사 때문에 좀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장 윗줄에 강주현 전무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보라고 올려놓은 게 분명했다·
형준은 철렁이는 가슴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번 정기인사에 탈락하는 사람이 꽤 되네요·”
“그렇지? 이제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실력이 떨어지는 인사는 가차없이 잘라내야 해·”
지금껏 10년 넘게 오른팔로 곁에 둔 강주현 전무를 실적미달로 잘라내겠다고 선언한다·
형준은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마주 웃어야 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