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이 튀어 오르다(3) >
영훈은 연희와의 데이트 코스와 저녁 메뉴까지 다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근사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추운 겨울에 뮤지컬 공연과 뜨끈한 소머리곰탕을 코스로 잡고 기대하는 와중에 걸려온 이형준 상무의 전화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전화를 통해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형준의 목소리에 일단 데이트 계획을 접고 전에 갔던 룸싸롱인 블루문으로 향했다·
웨이터는 영훈이 오자마자 얼굴을 기억하는지 바로 룸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웨이터를 따라 들어가니 이형준 상무가 전에 봤었던 마담이라는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영훈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가 바로 자리를 권했다·
“앉아·”
“뭡니까?”
“오늘은 여자 가지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진짜 큰일 났다고·”
“그러니까 뭔데요?”
형준은 옆에 앉은 여자를 내보내고는 말했다·
“아버지가 강주현 전무를 이번 정기인사에서 실적 부진을 이유로 해고 시키기로 결정하셨어·”
“강주현 전무면····”
“아버지 오른팔이었다가 내가 끌어들인 내 사람이야· 이건 나한테 경고하는 거야· 더 날뛰는 걸 보고 있지 않겠다는 거라고·”
영훈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면 저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본래 약한 사람이 아니고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역시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아버지이기에 일단 두려움부터 느끼고 보는 것이리라·
안타깝지만 그의 운명이기에 영훈으로서는 도와주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강주현 전무가 꼬리가 긴 타입인가요?”
“응? 무슨 소리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들켰을까요?”
“그야 아버지가 강 전무를 철저히 감시했겠지·”
“강 전무가 그걸 생각 못 하는 사람인가요? 내가 강 전무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형준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강 전무는 회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신영금융에서 상당한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딱히 실수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고 지금까지 추진했던 일은 거의 성공시킨 인물이다·
능력이 있는 인물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거다·
꼬리가 긴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금융 일이라는 게 꼼꼼하고 세심하지 않으면 언제고 큰 사고가 터진다고 항상 이야기를 들었지· 꼬리가 긴 사람이었으면 아버지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럼 강주현 전무의 실수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아버지가 강 전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알아냈을 수 있지·”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어째 그것보다 다른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무님과 강 전무 사이의 일을 아는 사람이 꼭 강 전무 뿐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야? 그럼 내가 실수했다는 거야?”
“어지간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상무님이 실수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형준은 그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비밀이 새어나갈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아니야·”
“흐음····”
영훈은 형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큰 고난은 없어 보였다·
올해 여자로 인한 구설수는 있어도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이직운이 강하지도 않았다·
분명 큰 어려움 없이 지나갈 일인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영훈으로서는 형준의 고민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표정이 드러났는지 형준이 심통을 부렸다·
“야 네 일 아니라고 너무 평안한 거 아니냐? 너랑 나랑 같은 배 탄 거 아니었어?”
“같은 배를 타긴 했는데 어째 난 미풍이 불어오는 걸로 보이는데 자꾸 태풍이 온다고 하니까 실감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게 미풍으로 보인다고? 내가 이상한 거야? 난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라고·”
“그럼 진짜로 강 전무를 자를 생각인지 확인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뻥카인지 아닌지 패는 뒤집어 봐야죠·”
“어떻게?”
“이번 정기인사 전에 강주현 전무 퇴사를 가장 먼저 주장하세요· 그럼 무슨 반응이 나올 거 아닙니까?”
형준은 술잔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럼 더 의심 사지 않을까?”
“거 참 조심성 많으시네· 왜 이러세요? 그렇게 돌다리 막 두드려 보는 성격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니··· 나도 원래 이렇지 않은 거 아는데 상황이 그렇잖아· 최대한 조심해야지·”
“동요하지 말아요· 그리고 고작 그거 들었다고 룸싸롱 와서 술 마시고 이러는 거··· 의심에 확신을 심어줄 뿐입니다·”
“그 그런가···?”
다른 사람이 이런 충고를 하면 무시하곤 하는데 이 놈 말은 무시하게 되지 않았다·
꼭 맞는 말만 하는 데다가 겉으로만 존대를 할 뿐이지 하는 행동이나 머리 굴리는 걸 보면 형님으로 모셔도 할 말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때·
“어? 지은이네·”
형준이 핸드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전화가 걸려오면서 여자 사진이 뜨는 걸 설정해놔서 영훈도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굉장한 미녀임은 분명해 보였다·
“여자친굽니까?”
“응 사실 네 말 듣고 이제 정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느 집안 딸인데요?”
“있는 집 딸은 아니고 내 비서·”
“사내연애?”
대기업 비서들은 전부 얼굴을 보고 뽑는 게 분명했다·
“응· 일단 이것만····”
형준이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 영훈이 그의 전화를 낚아챘다·
“어?”
영훈은 대답을 구하는 형준의 표정을 무시하고 여비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사흘이 걸렸다·
무려 사흘·
아무리 여당의 원내대표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지만 그래도 무진중공업과 그 계열사를 이끌고 있는 자신과의 만남을 무려 사흘이나 미뤄가면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찝찝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평화선진당 강금원 원내대표는 여당 원내대표치고 아주 젊은 편이었다·
이제 고작 마흔 여덟이라 아직 쉰도 안 된 나이에 원내대표를 달고 있으니 상당히 성공한 정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 운만 가지고 됐을까?
당연히 정치권 법조계 재계와 두루두루 안면이 있었고 야당 정치인들과도 크게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좋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람 좋다고 쉽게 보다간 큰코 다친다·
“작년 국정감사 때 뵀었지요?”
“맞습니다· 아직 정정하시군요·”
“허허··· 아들래미가 계열사 사장 자리에 있다고 저 할아버지 취급하실 겁니까? 아직도 젊은 여자 옆에 있으면 가슴이 펄떡펄떡 뛴다니까요?”
강금원 원내대표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자리에 앉는 정호균 회장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 되셨겠네요· 해주조선해양 합병에 문제가 생기셨다면서요?”
“안 그래도 바쁜 의원님 붙잡고 하소연 좀 하려고 왔습니다· 세상 참 오래 살 일 아닙니까? 하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어쩝니까? 하소연이야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실 수 있으실 텐데·”
어차피 정 회장은 오늘 만남이 원하는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이 가슴에 얹힌 돌부터 내려놓고 해결책을 생각해봐야지요·”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말씀하시죠·”
정 회장은 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참으로 매정하셨습니다· 우리를 혹독하게 가르치셨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조차 없으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따뜻한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들렀다 가시는 분처럼 그렇게 가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제들끼리 피를 튀기며 싸웠어요· 누구는 차를 가지고 누구는 금융을 누구는 건설을
가졌지요· 전 배와 기계를 가졌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알짜배기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잘 살아남으셨고·”
“조선업 불황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우린 처절하게 버텼습니다· 남들이 군산조선소 가지고 손가락질할 때 우린 허벅지 살을 베어 허기를 버티는 마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 마음 아시겠습니까?”
정호균 회장의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군산조선소는 우리 겁니다· 흔들 게 따로 있지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강금원 원내대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군산조선소에 투입된 자본과 인력이 어마어마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죠·”
그의 마지막 말이 정 회장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매각으로 방향을 잡은 겁니까?”
“군산시의회와 주민들의 반응이 너무 격렬합니다· 오늘 기사 보셨어요? 군산조선소 매각으로 재가동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 때문인지 업체 동원해서 조사해보니까 조재민 의원 지지율이 95%까지 올랐습니다· 아무리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90년대나 2000년 초반도 아니고 요즘 어느 지
역이 저렇게 압도적인 지지율이 나옵니까? 게다가 군산조선소 사태 후에 여당 지지율이 굉장히 떨어졌던 곳입니다· 1년 전이 뭐야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지지율 어림도 없었어요· 덕분에 전라도 지역의 당 지지율까지 덩달아 상승했습니다·”
“정치적인 사정이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강 대표님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그거 사면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몇천억짜리 LNG선을 몇십척씩 수주하니까 그게 그렇게 쉬워 보입니까?”
“수주는 해주조선해양이 하는 거 아니었나요? 해주조선해양에 군산조선소를 붙이는 거···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강금원 원내대표의 말에 정 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해주조선해양이 군산조선소까지 돌릴 만큼 수주잔량이 넘쳐날 거라고 보십니까? 지금 수주량은 거제 조선소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알아보니까 그렇게 여유 있는 건 아니더군요· 그리고 무진중공업과 해주조선해양이 합병하는 거 노조에서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두 회사가 합치니 결국 어느 정도 직원 감축은 불 보듯 뻔한데 어느 직원이 좋아할까요? 그런데 빈 조선소를 더해주는 거니 직원은 감축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엄청난
고용증진 효과가 있겠죠·”
어떻게 이야기를 돌려도 결국 여당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악이 받쳐 올랐다·
“이봐요 원내대표님!”
“압니다· 현실적으로 군산조선소 돌리다가 수주 못해서 휘청거릴 거 알고 있어요· 아마 몇 년 못 가고 다시 산업은행에 다시 맡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라고요?”
“·······”
“그건 당신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진들과 직원들이 할 일입니다· 회사를 망하게 할 정도로 경영을 못하면 망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써줘야 합니까? 수주? 솔직히 해주조선해양이 수주 못 채워서 다시 군산조선소가 망한다 한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그냥 죽은 상태로 두는 것보다는 나
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말한 강금원 원내대표는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회장님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돌아가지도 않는 조선소 때문에 골치 썩지 마시고 그거 팔아서 현금이라도 두둑하게 챙기면 오히려 다른 좋은 매물이 나왔을 때 무진중공업이 인수할 수 있는 여력도 생기고 혹시나 모를 불황을 대비해서도 좋은 선택 아닐까요? 게다가 군산조선소로 가
지게 될 부담을 현금으로 교환하면서 악재를 털어버리니 이것보다 더 좋은 리스크 헷지 방법이 또 있습니까?”
“그게 여당의 방침입니까?”
“당의 방침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몇몇 의원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요· 아 제가 우리 회장님께서 만나자고 하셔서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을 모셨습니다·”
그는 보좌관을 호출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을 모셔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자 마음 같아서는 갈아 마시고 싶은 조재민 의원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청년은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딱 떠오르지 않았다·
“뵙고 싶었습니다 회장님· 나 군산시장 출마 하려고 준비 중인 조재민이에요·”
정호균 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호균이오· 그대가 바로 내 새끼 훔쳐가겠다고 이 사단을 낸 장본인이구먼·”
“하하하 아이고 회장님도 참··· 말씀에 어폐가 있습니다· 돈 안 된다고 죽여놓고 내 새끼라니요· 남의 새끼도 그렇게는 안 할 텐데요 하하하! 그리고 여기는 신영은행 이형준 상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영은행 이형준입니다·”
정 회장은 그제야 저 젊은 청년이 누군지 기억이 났다·
경제인 모임에서 이경호 회장이 데리고 다니며 칭찬을 해대던 그 친구가 바로 이 친구라니····
“그래 기억나는군· 그런데 왜 이 자리에···?”
대답은 조재민 의원이 했다·
“우리가 신영은행을 매각주관사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두 회사가 자주 만나게 될 거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 만나 잘해보자는 의미로 불렀습니다· 자네 너무 싸게 팔면 안 되네! 알지?”
“그럼요· 최대한 비싸게 팔아보겠습니다·
순간 정 회장은 눈앞의 물컵을 집어 던질 뻔한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