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이 튀어 오르다(4) >
형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블루문에서 영훈이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 여자 앞에서 부회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전무님이라도· 이상하게 전 얼굴도 안 본 그 전무라는 사람보다 상무님이 실수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 형준은 사무실에 들어와 한동안 도청 장치 따위의 전자기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지 온 사무실을 뒤져댔었다·
물론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에 말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때 안심하기보다 혹시 이곳이 아니라 다른데 설치해놓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때 더 이상 지은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띵동!
형준은 바로 일어나 현관문으로 나갔다·
“짠! 오빠 좋아하는 맥주 가져왔지~”
지은이 회사에서 막 퇴근한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손에 들고 온 맥주를 흔들어댄다·
오늘 먼저 퇴근해서 오피스텔에 가 있겠다고 하고 집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 왔네? 일 많다며?”
“윤 대리님한테 부탁했지· 헤헤····”
“윤 대리 자꾸 부려먹지 마· 너 좋아해서 그러는데 미안하지도 않냐?”
“본인이 좋아하는데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발을 던지듯 벗고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형준은 천천히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야·”
그녀가 홱 돌아서며 물었다·
“왜?”
“바빠서· 새로운 프로젝트 맡아서 움직여야 해· 이번에 진짜 중요한 거라서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진짜?”
“응 진짜야· 그리고····”
형준이 어렵게 이 오피스텔에서 그녀더러 나가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프로젝트가 뭔데?”
“응? 아··· 뉴스에서 봤지? 군산조선소· 그거를 조율하는 일이거든·”
“그렇구나· 오빠 혼자?”
“아니 아무래도 팀으로 움직이겠지· 전략기획팀 전체가 움직여야 할 거야·”
“혹시 우리가 매각주관사로 결정된 거야?”
“아직 진행 중이라서 결정난 건 없어·”
“그런데 조선소를 사려는 회사는 어디야? 되게 궁금하네?”
“그게 왜 궁금해?”
“그렇잖아· 군산조선소는 짐 덩어리 아니야? 해주조선해양까지 인수하려는 거 보면 조선업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아닌데 갑자기 인수하려고 하니까 궁금하지·”
군산조선소를 인수할 회사가 해주조선해양까지 인수할 거라는 기사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형준은 순간 움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세원 인터내셔널·”
“세원 인터내셔널? 진짜?”
“응 그쪽에서 준비하고 우리는 중간에서 절충만 해주는 거지· 거기 대표가 마음먹고 준비하는 작업이야·”
“와··· 말도 안 돼·”
“그렇지? 나도 놀랐다니까· 저녁은 시켜 먹을까?”
형준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나가서 안 먹고?”
“귀찮아· 너 배달어플 있지? 잠깐 좀 줘봐·”
형준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한참 동안 만져대다 말했다·
“찜닭 시켰어· 맥주는 찜닭 먹으면서 먹자·”
“응····”
“나 잠깐 씻고 올게·”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샤워를 하고 나온 형준은 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신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그녀가 누군가와 나눈 카톡 내용이 모조리 자신의 핸드폰에 전송되어 있었다·
배달을 핑계로 깔았던 해킹 프로그램이 그녀의 카톡 대화 내용을 모조리 복사했던 것이다·
“후····”
역시 영훈의 말이 맞았다·
허탈하고 허무했으며 화가 치밀었다·
순정을 바쳤다고 하면 오버겠지만 적어도 지은이를 만날 때만큼은 다른 여자와 잔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띵동!
“내가 나갈게~”
형준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던 그녀가 초인종 소리에 부리나케 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녀를 반긴 사람은 찜닭을 배달해온 배달부가 아니었다·
“어? 누구세요?”
“신영은행 감찰부에서 나왔습니다· 회사기밀유출 혐의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일단의 남자 무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오빠! 아니 잠깐만요· 오빠!”
“같이 가시지 않으면 검찰에 바로 고발조치 합니다· 가시죠·”
“아니··· 오빠!”
놀란 지은이 형준을 부를 때 그는 맥주를 따서 TV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심하게 걸어간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지은의 고함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지만 착 가라앉은 눈빛의 형준은 개그프로그램을 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군산조선소 해법 이게 최선인가?]
[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후진국?]
[임대연장 불허된 군산조선소 과연 해법이 있기는 한가?]
영훈은 기사를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아주 악을 쓰고 쏟아내는구나·”
옆에서 연희도 투덜거렸다·
“분명 돈 주고 기사 내라고 했을 거예요· 하나같이 논조가 똑같아· 이걸로 정치권에서 이상한 쪽으로 방향을 잡는 건 아니겠죠?”
“예전처럼 사람들이 언론에 쉽게 휘둘리지 않잖아요·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연희와 대화를 나누는데 민희가 다가와 사장님이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곧장 사장실로 들어가니 송은채 사장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요즘 정신없지?”
“직장인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부담도 크고 그럴 거야· 신영은행 쪽은 어때?”
“며칠 전에 무진중공업하고 인사까지 나눴다고 하던데요? 정호균 회장이 뜨악했다고 하던데 일단 눈 마주치고 얼굴 익혔으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가격 협상 들어갈 겁니다·”
“오늘 기사 보니까 쉽게 따라와 주지는 않을 것 같던데?”
“안 따라오려고 하겠죠·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네· 그들을 따라가게 하는 건 정치권에서 할 일입니다· 그 정도 능력도 안 되면 우리가 조재민 의원을 잘못 판단한 거겠죠· 아 제가 잘못 판단한 거겠죠·”
“최 과장 실수일 수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실수가 맞다면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참 최 과장답다· 그럼 이제 뉴스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는 거지?”
“네· 우리는 신영은행에서 제시한 가격으로 협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해주조선해양은?”
“군산조선소가 먼저입니다· 산업은행에서도 무진중공업과의 거래를 재검토하겠다고 했지 깨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산업은행하고 단둘이 테이블에 앉으려면 군산조선소를 쥐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앉지도 못하게 하겠죠·”
“음··· 알겠어· 그리고 최 과장 오늘 스케줄 좀 널널하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나 따라갈래?”
“어디 가십니까?”
송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비서실 과장이면서 사장 스케줄도 체크 안 하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하하··· 그런가요?”
“농담이야· 인도 대사관에서 초청했어·”
“인도요?”
“인도 대사 아내가 내 어릴 적 친구거든· 계속 인도에 있다가 얼마 전에 들어왔는데 주한 인도 대사를 소개시켜 준다고 초청했어·”
“그런 자리에 제가 참여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우리 최 과장 자랑을 좀 했거든· 게다가 연희 남자친구라니까 꼭 보고 싶다네? 괜찮지?”
솔직히 귀찮았지만 여기서 안 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인도는 아주 중요한 시장이야· 중국 이상으로 커질 수 있는 시장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사업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곳이야· 만약 주한 인도 대사와 친분이 생기면 굉장한 힘이 될 거야·”
영훈은 감이 잘 안 왔지만 그렇다고 하니 꽤 중요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외부 강의 끝나고 지하주차장으로 와· 내 차로 다 같이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오니 민희가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 오늘 저녁 Nodri Clare 행사 참석 잊지 않으셨죠?”
“어? 그게 오늘이었어요?”
“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VIP 초청 행사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요즘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돌아다니느라 깜빡했다·
그리고 다른 일은 몰라도 Nodri Clare 브랜드는 노형석 과장이 쥐고 있는 한 문제가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예 신경을 꺼놓았던 것도 한몫했을 거다·
“흐음··· 이걸 어쩐다····”
영훈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연희가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온다·
“왜 그래요?”
“오늘 Nodri Clare VIP 초청 행사라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힘 좀 줬는데?”
연희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생로랑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여느 배우 못지않았다·
오늘 평소보다 더 예쁘게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사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인도 대사관에 초청받았다고 하셔서요· 아무래도 거기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진짜요?”
“그 자리는 빠지면 안 될 자리 같으니 Nodri Clare는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후··· 아침부터 힘 빡 준다고 새벽부터 미용실 다녀왔는데·”
“아니 뭐 연예인이세요? 새벽에 미용실을 왜 갑니까?”
영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니 그녀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예인만 새벽에 미용실 가라는 법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하고 가야 걔네들이 날 보고 딱 기가 죽는다고요·”
“가만 있는 연예인들 기는 왜 죽이려고요?”
“히힛··· 그냥 내 기분 좋으려고·”
“아~”
역시나 임연희 성격은 어디 안 간다·
연희는 영훈을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안 하면 걔들이 날 보고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그저 부모만 잘 만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미모는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흉볼 거라고요·”
“예 예· 알겠어요· 어쨌든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누굴 만나러 가야 하는 건 똑같으니까 새벽 미용실행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근데 그 자리에 다른 백화점 관계자들도 나올 거란 말이에요· 당신이 안 가면 누가 협상을 해요? 노 과장님이 잘 하실까요?”
영훈은 솔직히 누가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럴 겁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형석 과장의 사주를 다시금 곱씹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어····”
“왜요?”
“나 말고 다른 분을 보내죠·”
노 과장의 운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올해 노 과장에게 이직의 운이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데 이직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회사를 못 버텨서 나가는 게 아니라 만약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을 해간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 VIP 초청 행사에서 다른 백화점 사람들과 만나면 오히려 득보다 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준비한 게 있으니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누굴 보내게요? 임원급을 보내려고요?”
아무리 회사에서 힘이 세다고 하지만 Nodri Clare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원을 보내서 무슨 협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희에게 시선이 갔다·
맞다·
이 여자가 지금 비서실에 있기 때문에 자꾸 비서로 능력을 한정하고 있었다·
“민희 씨 혹시 Nodri Clare 브랜드 좀 알아요?”
“네? 네· 회사 브랜드라서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럼 잘됐네요· 나 대신 행사장 좀 갈래요?”
“제가요?”
민희보다 더 놀란 사람은 연희였다·
하지만 영훈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네· 가서 백화점 관계자들과 협상할 때 노형석 과장님 옆에서 도와주세요·”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녀는 직장인이 될 사주가 아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스릴을 즐기며 배짱이 두둑하고 눈치도 빠르다·
아이러니하지만 굉장히 잘 풀려서 지금 대기업 비서직으로 일하는 거지 만약 자칫 잘못했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잘못 풀리면 범죄자가 되기 딱 좋다·
사기를 치면 수백억을 사기 치고도 눈썹 하나 흔들릴 여자가 아니었고 도박을 하면 수많은 사람을 속여먹는 타짜가 될 수도 있었다·
마침 사주에 칼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 여자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니니 잘 풀린 게 아니면 뭔가·
“가서 본인이 생각할 때 가장 회사에 이익이 되는 거래인지 생각해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잘 모르겠다면 나한테 연락하시고요·”
영훈이 그렇게 말하자 연희가 끼어들었다·
“노형석 과장님과 의견이 갈리게 되면요?”
영훈은 얼떨떨해하는 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희 씨는 나를 대신해서 가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영업팀으로 가서 필요한 자료 확인하세요·”
“네·”
그녀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