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이 튀어 오르다(5) >
민희가 영업팀으로 내려가자 연희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영훈은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궁금합니까?”
“당연하죠· 아까 그 자리에서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단 말이에요· 뭐예요? 노형석 과장님처럼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주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좀 불안정하다고 봐야죠·”
“왜 불안정해요?”
“본래 도전 지향적인 사주를 타고났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호기심이 많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실패할 확률도 높은데 이 사람은 승부사 기질을 타고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도 합니다·”
“민희 씨가 그런 성격이었어요?”
“본래 자기 자신도 자신의 성향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본래 자신의 성향을 발현시키려면 그만한 환경과 운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참에 한번 보도록 합시다·”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연희가 걱정하는 이유는 이해가 된다·
한두 푼이 걸린 사업이 아닌데 경험도 많지 않은 사원을 보내놓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협상을 대비하게 하니 걱정이 안 되면 그것도 이상하다·
다만 영훈은 보는 관점이 조금 달랐다·
“실수하면 배우는 게 있을 겁니다· 그럼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죠·”
“겨우 직원 경험치를 늘려주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요?”
“어떤 직원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그녀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든요· 회사를 위해 통 크게 투자한다고 생각하세요·”
“와··· 당황스럽긴 한데 당신이 말하니까 또 그럴듯하게 들리네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도박판에 보내는 것도 아니고 손해를 봐도 얼마를 보겠어요?”
“하긴 뭐··· 딱히 위험한 거래도 아니긴 해요· 그래 봤자 백화점 입점 관련해서 수수료나 뭐 그런 것 정도만 이야기할 테니까·”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렸다·
“엄마가 당신을 왜 데리고 가려고 한대요?”
“사장님께서 당신 남자친구로 자랑을 열심히 하셨답니다·”
“아하~ 하긴 자랑할 만하기는 해요· 히히··· 음··· 오늘 좀 그런데····”
그녀는 영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넥타이도 다시 만지고 머리도 슬쩍 만져본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을 펴지 않았다·
“이거 뭐 나도 미용실 가야 하는 겁니까?”
“가면 좋죠· 요 앞 포시즌 호텔 지하에 있는 미용실이 실력 괜찮대요· 한번 가볼래요?”
“호텔 지하에 미용실이 있습니까?”
“그럼요 유명해요·”
“어디에서 유명한 겁니까? 인터넷에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아무래도 내 주변에서?”
“그냥 이대로 갑시다· 귀찮은데·”
“알겠어요· 내가 예쁘니까·”
그녀는 방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영훈과 연희가 회의실에서 나와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영업팀에 갔던 민희가 돌아왔다·
연희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감 때문인지 조금 얼어있는 그녀를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가방을 들고 그대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촤라라락!
가방에서 온갖 화장품과 잡동사니들이 쏟아져나왔다·
연희는 빈 가방을 들고 민희에게 가서 말했다·
“갈 때 이 가방 들고 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민희가 손사래를 쳤다·
줘도 적당히 좋은 걸 줘야지 천만 원이 넘는 Nodri Clare 최고급 모델을 주니 부담스러워서 받을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연희는 민희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쪽 사람들 사람 외형만 가지고 사람 판단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뭐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가서 꿀리지 말고 와요·”
영훈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보탰다·
“받아요· 결과 좋으면 그거 보너스 될 수도 있을 텐데·”
연희가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영훈을 돌아봤다·
하지만 영훈은 그깟 가방 하나 보너스로 주면 어떠냐는 마음에 말을 이었다·
“게임에서도 본인 능력치만큼이나 중요한 게 장비거든요· 장비빨 무시 못 합니다·”
민희는 영훈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을 텐데 괜히 고집부리지 말라는 말에 민희가 연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깨끗하게 잘 쓸게요·”
“이미 중고라 그렇게 애지중지 안 하셔도 돼요·”
영훈은 자리에 돌아가려다가 민희를 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혹시 노형석 과장을 스카우트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요· 노 과장이 브랜드 담당자로 돋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네? 아 네····”
“무슨 이야긴지 잘 이해 못 하겠지만 명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자 연희는 영훈의 소매를 슬쩍 잡아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진 화장품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인심은 내가 썼는데 왜 당신이 생색내는 것 같죠?”
“기분 탓입니다·”
“칫·”
그렇게 비싸 보이지 않았는데 천만 원이 넘는다는 말에 뜨악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 동기부여가 더 확실하게 되겠네요·”
“진짜 본인 거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싫으면 다른 거 하나 사줘요·”
연희는 슬쩍 민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민희는 가방을 책상 앞에 올려둔 상태 그대로 자신의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깨에 메어 보고 기대에 들뜬 모습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의아했다·
“좋아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면 보너스로 줄게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지금 직급으로 보면 민희 씨가 나보다 훨씬 높아요· 내가 보너스를 주고 말고 할 그런 상황이 아닌데·”
“그게 뭐 의미 있습니까? 비서실 직원 전체가 연희 씨 눈치 보고 있는 거 몰랐어요?”
“아니 뭐··· 그건 알고는 있지만 대놓고 보너스를 주기는 좀 애매하다는 거죠· 그리고 아까 장비빨 어쩌고 하면서 본인 장비는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에요?”
영훈이 빙그레 웃었다·
“난 기본 능력치가 워낙 좋아서요· 장비까지 좋으면 너무 사기 아닙니까? 하하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합시다·”
“우리 일이요? 그게 뭔데요?”
“점심 뭐 먹을래요?”
연희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더니 주변 맛집에 대해 열거하기 시작했다·
*
솔직히 민희는 연희가 빌려준 가방이 고맙기는 했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행사에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게 한다면 최영훈 과장이 크게 실망할 거라는 걸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현진물산의 권력서열은 사장 다음이 바로 최 과장이었다·
그렇기에 영업팀에서 받은 자료와 각 백화점 명품매장 매출 관련 자료를 달달 외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저녁이 다가올 무렵 화장을 다시 손보고 연희가 준 가방에 자신의 물건을 담아 행사장인 청담동으로 출발했다·
행사장은 청담동의 고급 주택 하나를 빌려 진행했는데 본래 미래 백화점에서 컬렉션을 열자고 하는 걸 노형석 과장이 거절했다·
언제까지 미래 백화점 단독으로 브랜드를 이끌고 가기에는 매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호텔이나 전시장 쪽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특색있는 곳에서 컬렉션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더 좋았다·
매우 큰 저택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포토존에서는 연예인들이 한 명씩 사진을 찍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연예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드라마도 즐겨 보는 그녀였기에 눈이 돌아갈 법도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렇게 좋아하던 연예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고 입구 경비 직원에게 신분을 확인시켜준 후 저택에 들어갔다·
중간중간 톱스타들이 보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입고 있는 옷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왜 연희가 자신의 명품 가방을 들고 가라고 했는지 왜 최 과장이 장비빨을 무시 못 한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팔에 천만 원이 넘는 가방이 걸려있어 그런지 어깨가 움츠려 들러다가도 다시 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창가나 진열대 탁자 소파 테이블 등에 Nodri Clare 브랜드의 가방 액세서리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세팅된 형태나 조명을 봤을 때 굉장히 섬세하게 준비를 잘 했다는 게 느껴졌다·
“어? 왔어요?”
노형석 과장이 멀리서 그녀를 보고 다가왔다·
자신이 주최한 행사라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네· 연예인들 진짜 많아요·”
“다 서가은 덕분입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확 올라가니까 우리가 초청한 연예인 대부분이 행사에 응했어요· 뭐 스케줄 때문에 못 온 사람들도 꽤 되긴 하는데··· 그래도 톱스타도 오고 그렇네요· 하하하!”
같은 팀이었다면 직급이 낮은 민희에게 말을 놓겠지만 같이 일해본 적도 없었고 그녀의 부서가 비서실이기에 노 과장은 감히 말을 놓지 못했다·
직급보다 무서운 게 최고 권력자와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가가 아니겠는가?
“백화점 관계자들은요?”
노 과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전부 와 있기는 한데 아직 우리 쪽에 접근하는 관계자는 없어요· 분명 관심 있어 하기는 하는데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무슨 눈치를 보는 건데요?”
“뉴월드나 그랜드 백화점 모두 우리와 입점 계약을 진행하다 거절한 곳들이거든요· 먼저 다가와서 다시 입점해달라고 해야 하니 불편한가 봐요·”
“아····”
그때 서가은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서가은 씨· 저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나온 김민희라고 해요·”
서가은은 인사를 받아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최 과장님과 연희 씨를 찾으시는 건가요?”
“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못 나오세요· 대신 제가 나왔습니다·”
“아····”
실망하는 서가은의 눈빛·
민희는 이미 영훈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고 왔다·
서가은의 남자친구가 운영하는 반도체 회사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하는 곳이라는 것·
당연히 영훈이나 연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을 것이기에 실망하는 그녀를 보고 민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Nodri Clare 브랜드 런칭이 이렇게 성공하게 된 건 가은 씨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고마워요·”
“혹시 오늘 컬렉션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가은 씨잖아요·”
서가은은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제안해주니 민희가 제법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서가은 씨 반가워요~ 오늘도 너~무 예쁘다·”
민희는 옆에서 슬며시 끼어든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의 드레스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녀는 서가은과 친분이 상당한 듯이 보였다·
“어머~ 실장님· 반가워요· 언제 오셨어요?”
“나야 아까부터 왔었지· Nodri Clare랑 가은 씨랑 너무 잘 어울리더라· 아 근데 여기는····”
“현진물산 관계자분이세요· 어··· 최민희 씨였나?”
“김민희입니다·”
“아! 김민희 씨· 미안해요· 내가 이름을 잘 기억 못 외워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현진물산 노형석 과장님· 이름 틀리지 않았죠?”
“아휴 기억 잘 하시네요· 하하하!”
노형석 과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민희는 눈웃음을 짓는 와중에도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반가워요· 난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이에요·”
“노형석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노형석 과장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숙이는데 송은진 실장은 고개만 까닥거렸다·
사실 송은진은 현진물산에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혼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연희였는데 연희가 회사에 자신의 이혼 사실을 다 퍼뜨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거다·
송은진은 노 과장에게 말했다·
“전에 서로 간의 오해로 우리 백화점에 입점이 안 됐잖아요· 마침 기존 브랜드 하나가 나가게 생겼어요· 아마··· 3월쯤? 그때 자리가 빌 것 같은데 수수료는 1층 명품 매장 중에 최저급으로 맞춰 드릴게요· 어때요?”
노형석 과장은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냉큼 수락했다·
“그거 좋습니다·”
이때 민희가 끼어들었다·
“자세한 계약사항을 메일로 보내주세요· 보고 검토하겠습니다·”
사실 민희도 저 정도 좋은 조건이면 어차피 계약 내용 이야기는 나중에 진행할 건데 굳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초를 쳐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선 이유는 영훈의 마지막 지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노 과장을 전면에 돋보이지 않게끔 하라는 지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지만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 과장은 당황했고 송은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담당자가 이분이 아니었던가요?”
“담당자는 맞는데 계약 협의는 회사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노 과장은 민희의 단호한 선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곧 비서실의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송은진은 입술을 깨물다가 서가은에게 말했다·
“가은 씨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벤자민 청이라고 에르메스 아시아 담당자· 가은 씨도 에르메스 좋아하지?”
“네? 네····”
엄연히 기존 브랜드 담당자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리기에도 뭐한 그런 상황인데 민희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가은 씨 연희 씨가 오늘 행사에 가면 가은 씨가 동료 연예인분들 많이 소개해줄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Nodri Clare가 여성에게만 특화된 브랜드라고 할 순 없잖아요? 남성용 슈즈도 있고· 이번에 남성용 향수 브랜드 런칭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네? 아··· 그런가요?”
가은이 당황하는데 민희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에르메스 담당자 만나고 오셔도 됩니다· 연희 씨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서운해하겠지만 제가 비밀 지켜드릴게요·”
민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었지만 가은은 그게 자신을 향한 경고임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물론 소개해 드려야죠· 실장님 죄송한데 그분들은 다음에 만나도록 할게요·”
서가은의 거절에 송은진 실장은 대답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민희를 노려보았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