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마살이 꼈나?(1) >
서가은은 민희와 노형석 과장을 이끌고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은은 오늘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남자친구 회사에 투자를 결정한 연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생각 정도밖에 없었다·
오히려 연희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생각에 오늘 컬렉션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몇 개 득템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희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자친구 회사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이제 자신은 현진물산의 고객이 아니라 협력업체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바뀐 신분에도 컬렉션 아이템 몇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협력업체 직원 신분으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먼저임은 인지하고 있었다·
“도현 씨 여기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강도현은 오늘 컬렉션에 참석한 사람 중 유일하게 서가은과 비견될 만한 톱스타였다·
본래 가수 출신인 그는 연기와 노래 두 방면에서 걸출한 실력을 뽐내고 있으며 스타일도 독특하고 개성 있어 각종 명품 브랜드에서 초청할 정도로 패션계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
180센티의 훤칠한 키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그는 가만히 입 다물고 서 있기만 해도 한 장의 화보와 같았지만 민희는 지금 그런 그의 멋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현진물산에서 나왔습니다· 김민희예요·”
민희가 악수를 청하니 그가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현진물산은 입사할 때 외모를 보고 뽑나 보네요? 연예인인 줄 알았습니다·”
물론 입에 발린 말이지만 사실 민희는 객관적으로 상당한 미인이 맞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컬렉션 참가해주신 거 감사합니다· 아 과장님 명함 드리세요·”
“아 네· 현진물산 노형석 과장입니다·”
노형석 과장이 얼른 명함을 꺼내 준다·
누가 봐도 노 과장보다 민희가 더 높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모습이었는데 이는 민희가 일부러 노린 거였다·
최대한 노형석 과장을 내세우지 않되 일을 주도하는 사람은 노형석 과장임을 각인시키려는 방법이었다·
“Nodri Clare 브랜드를 총괄하시는 분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평소 강도현 씨를 생각할 때 우리 브랜드와 잘 맞는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여기에 참석해주실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혹시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현은 조금 당황했다·
딱히 Nodri Clare에 관심이 있어서 참석했다기보다 소속사에서 잡아준 일정이었고 참석하면 명품 몇 개 얻어다가 몇몇 여자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별 생각 없었는데요?’라고 말할 정도로 도현은 경우가 없지 않았다·
“솔직히 기존 브랜드보다 조금 평범하지 않은가 싶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계속 눈이 간다고 해야 하나? 평범한 듯한데 애정이 가는 그런 브랜드 같아서 왠지 모르게 기존에 계속 쓰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Nodri Clare 컬렉션을 간다고 하니 주변 지인이 해준 이야기였다·
도현은 그래도 그거라도 들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큰일 났을 뻔했다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 그러셨구나· 저희 브랜드를 정말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너무 고맙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강도현 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더욱 힘을 내야겠어요· 혹시 저희가 도현 씨 회사에 연락 드려도 실례는 아니죠?”
“그 그럼요·”
“다행이에요· 오늘 컬렉션 잘 즐겨주시고 사진 많이 찍어서 SNS에도 올려주세요· 도현 씨 인스타는 제가 매일 찾아가 보고 있었는데 내일 인스타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하하 네· 뭐····”
민희는 웃으며 노형석 과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장님· 우리 도현 씨한테 몇 개 챙겨주실 수 있죠?”
노형석 과장은 순식간에 도현을 어르고 달래는 민희를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노블레스 라인으로 준비해야겠네요·”
“와! 정말요? 도현 씨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우리 과장님이 어지간해서는 노블레스 라인은 협찬 아닌 이상 공짜로는 잘 주시지 않거든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거 사진 잘 찍어야겠네요·”
“호호호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한번 또 뵐게요·”
민희는 도현이 있는 곳에서 멀어지며 가은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도현 씨 평판이 어떤가요?”
“평판이요?”
“네· 기존 행실이라든가····”
서가은은 민희가 그냥 연예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님을 알았다·
“정확히는 몰라요· 저도 친한 편은 아니니까·”
“그래도 같은 배우면 코디나 주변 회사 관계자들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걱정하지 마요· 가은 씨한테 들은 말은 회사 외부로 나가지 않을 테니까· 수억 주고 계약한 모델이 갑자기 도박을 한다든가 음주운전을 할 수도 있고 또는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곤란하니까 묻는 거예요·”
“술은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술 좋아하는 남자 스타 치고 여자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여자도 많겠죠? 그런데 도박이나 음주운전을 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요· 그리고 저 정도 급이 되면 어지간한 매체에서 뒤를 캘 텐데 지금까지 뭐가 터졌다는 소리도 들은 바 없고····”
“여자가 있어도 알아서 깔끔히 정리한다는 말이네요? 알겠어요·”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은은 그렇게 민희와 노형석 과장을 끌고 투어를 다녔다·
“고생하셨어요· 이거 오늘 컬렉션 중에 가장 예쁜 건데 어때요?”
민희는 드넓은 저택 곳곳에 포진해있던 연예인들을 다 만나고 난 후 가은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노 과장은 목걸이의 가격을 생각하며 속으로 뜨악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무려 비서실에서 내려온 사람인 데다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기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너무 예쁜데 이거 받아도 되려나 모르겠어요·”
“받으세요· 오늘 고생하셨으니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누구는 선물을 주고 누구는 선물을 안 주던데 그 기준이 궁금해서요·”
민희는 웃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냥 제 나름대로 기준을 세운 거였어요·”
“어떤 기준이요?”
“브랜드 가치가 있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옷을 줘도 그게 입고 어울려야 주는 사람도 마음이 좋지 않겠어요? 그래서 가은 씨에게 목걸이를 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가은 씨 목에 걸리면 그만큼 우리 목걸이가 가치있어 보일 테니까요·”
가은은 민희의 말에 진심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리 에스코트해준다고 시간 뺏었죠?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어쩌면 조금 냉정하다 싶은 말이지만 가은은 원래 민희의 성격이 그런 건가 하며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자 민희가 미안한 얼굴로 노 과장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오늘 너무 나댔죠?”
“아닙니다· 저였으면 오늘 연예인들 구경하는 것만 찍고 보도자료 냈을 겁니다·”
노 과장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마 그랜드 백화점과 뉴월드 백화점 입점 계약이 주고 다른 건 그저 부차적인 일로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김민희는 오히려 연예인들과 소통하는 걸 주로 생각하고 다른 백화점 입점 계약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직 그게 의문이었지만 그녀의 의중이 바로 윗선의 의중이라고 생각했기에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죄송해요· 노 과장님이 실권자인데 낙하산처럼 뚝 떨어져서 이래라저래라 했으니까·”
“진짜 괜찮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까 협찬 물품 주는 것도 어울리는 사람에게 골라서 줬다는 이야기 듣고 감탄했습니다· 전 나름대로 명품을 볼 줄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그런 정도의 안목은 없거든요·”
노형석 과장은 나름 명품을 볼 줄 아는 눈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이번 Nodri Clare를 론칭하면서 그 자부심이 더욱 올라가 있었는데 마치 진짜 패션을 잘 아는 전문가처럼 사람을 판별해가며 협찬을 결정했다는 말에 감탄했던 거다·
그런데 민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아까 그거 뻥이었어요·”
“네? 진짜로요?”
“네·”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겁니까?”
“그래야 서가은이 감동할 테니까요·”
노형석 과장은 잠깐 벙찐 얼굴을 하다가 재차 물었다·
“그럼 진짜 사람을 가려가며 협찬한 이유는 뭔가요? 아까 보니까 누구는 급이 낮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협찬을 주고 누구는 주연급 배우라고 해도 안 주던데·”
민희는 새침한 얼굴로 쿠키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SNS 안 하는 사람한테는 안 줬어요· 받고 나서 효과도 없을 텐데 뭐하러 줘요? 아깝게····”
“아····”
“협찬 안 나가고 아낀 거 있으면 노 과장님이 쓰세요· 위에서도 별말 안 할 거예요· 노 과장님이 가지고 온 Nodri Clare 매출이 너무 예상 밖이라 다들 노 과장님 칭찬이 자자 하거든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위에서 노 과장님을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재로 키우겠다고 말씀하시더라니까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민희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 영훈도 오늘 컬렉션의 계약 여부보다 노형석 과장이 스카우트 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으니까·
진심을 담아 말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미인의 말은 잘 믿는 건지 노 과장은 쑥스러운 얼굴로 괜히 시선을 돌린다·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었어요· 그리고 진짜 가방 몇 개····”
민희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말을 멈췄다·
노 과장은 민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급할 게 없는데 저쪽은 확실히 급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네요·”
걸어오는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을 바라보며 민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
인도 대사관저에 도착한 송은채 사장 일행은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과 그 아내인 쿠잠의 환대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송은채 사장은 가장 먼저 자신의 옛 친구를 연희와 영훈에게 소개했다·
“인사드려· 여기는 내 어릴 적 친구인 정문숙· 여기는 내 딸 어릴 때 봤었지?”
송은채 사장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데 정문숙이라는 여자 역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그럼· 연희가 열네 살 때였나? 열다섯 살 때였나? 미국에서 한번 봤었는데 아줌마 기억나니?”
“그럼요· 그때랑 똑같으세요·”
“어머 고맙다 얘~ 호호호· 여기는 연희 남자친구?”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입니다·”
“훤칠하네· 그렇게 능력이 있다며? 은채 부럽네·”
“아들 잘 둬놓고 뭐가 부럽니?”
송 사장이 눈을 흘기자 정문숙은 웃으며 대사 일행을 소개했다·
정문숙은 영어로 능숙하게 소개했고 송 사장이나 연희는 역시나 능숙하게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인도 사람이 영어를 잘 한다더니 역시나 그런 듯싶었다·
영훈은 연희가 소개하며 영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하니 그때 정문숙이 살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영어를 못하는 인재라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은 비록 영어를 못하기는 해도 이 자리에 자신을 제외한 남자가 영훈 하나라 그런지 영훈과 악수도 하고 옆에 앉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사실 영훈은 그와 만나기 전에 포털 사이트를 통해 그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이었다·
사주라는 게 중국에서 온 학문이고 바로 옆 나라였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과연 인도 사람의 사주가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치킨 커리를 비롯한 인도 가정식으로 화기애애한 식사자리를 마친 후 쿠잠과 정문숙 그리고 송 사장 이렇게 셋이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아미르 밧찬 인도 대사가 연희를 통해 영훈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 여기 한국은 신분의 차별은 없지만 기업 재벌들은 재력을 상당히 많이 본다고 알고 있어요· 그걸 뛰어넘을 만큼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여기 아가씨와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습니까?”
연희는 통역하면서 괜히 얼굴이 빨개진다·
“맞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별거 없습니다· 그냥 사람을 잘 보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잘 본다고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사람을 잘 보는 걸 특기로 내세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한국 사람이 허풍을 잘 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으니 참 새롭군요·”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할 겁니다·”
“혹시 점쟁이 같은 건가요?”
“하하 아닙니다·”
영훈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어떻게 잘 보는 겁니까?”
“그냥 대화를 나눠보고 일을 같이하면서 상대방을 잘 읽어내는 겁니다·”
인도 대사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 같습니까?”
영훈은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알아낸 사주가 인도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결과일지·
그래서 본래라면 그냥 둘러대고 말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호기심 때문에 툭 던졌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보이지만 급하고 남의 실수를 그냥 못 넘어가는 그런 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미르 밧찬 인도 대사는 짙은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혹시 나에 대해 미리 알아보았나요?”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풀었으니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농담으로 들으시죠·”
영훈은 손을 내저으며 가식적인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미르 밧찬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 역마살이 꼈나?(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