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마살이 꼈나?(4) >
“약혼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저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요· 들어갈까요?”
양티엔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밀고는 팔짱을 낀 채로 문을 열었다·
네다섯 명이 앉으면 꽉 차는 룸을 생각했던지라 스무 명이 둘러앉아도 될 듯한 넓은 룸은 영훈도 내심 놀랄 정도였다·
특히 그 넓은 룸 중앙에 있는 커다랗고 둥근 탁자는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 대단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주췬 대표와 예전에 도박판에서 봤었던 허바이바이 그리고 환갑은 되어 보이는 어느 남자였다·
“이제 왔군· 반갑네·”
주췬이 호탕하게 웃으며 영훈을 반겼다·
갑자기 친한 척을 하자 영훈도 본래 그와 굉장히 친했던 사이였던 양 악수를 하며 웃었다·
“하하하 뵙고 싶었습니다·”
“앉게·”
영훈의 옆에 양티엔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러면서도 연신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 이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예요·”
“한국에서 유학하더니 결국 한국남자를 사귀는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영훈 씨 인사드려요·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인 황레이예요·”
영훈이 일단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최영훈입니다·”
“중국어를 못하는구나?”
영훈이 한국말로 인사하자 황레이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양티엔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면 중국에서 잠시 살면서 배운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벌써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어?”
“그럼요· 요즘 결혼하려면 최소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요· 호텔 결혼식 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여기 호텔만 해도 거의 1년 치 예약이 다 잡혀 있을걸요?”
“정신이 없구나 정신이 없어· 그래 이 친구는 한국에서 뭘 한다고 하더냐?”
“회사원이에요·”
“회사원?”
“능력이 대단해요· 입사한 지 1년 만에 과장을 달 만큼요· 그것도 작은 회사가 아니라 현진물산이라는 대기업이에요· 아 잘 모르시죠? 1년 매출이 500억 위안이 넘는 큰 회사예요·”
아마 영훈이 그녀의 중국어를 알아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거다·
직급이 과장이라는 거야 비밀이 아니지만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 됐다는 건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 회사는 중국에도 많이 있다·”
이때 주췬이 나섰다·
“저 친구 능력은 저도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현진물산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요·”
“흐음··· 자네가 인정한다면야····”
양티엔은 주췬의 말에 못내 인정하는 그를 보고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말아요· 대부님이 소개해주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에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잘 생겼지 집안 괜찮지· 뭐가 문제였어?”
“매력이 없었거든요· 그나저나 대부님은 제 생일 때 뭐 해주실 거예요?”
“신혼집을 어디로 정할 건데?”
“우와! 아파트 사주시게요?”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결혼하는데 그 정도 못 해주랴?”
“꺄약! 좋았어! 영훈 씨 대부님이 우리 결혼하는데 아파트 해주신대요· 분명 엄청 좋은 곳일 거예요· 우리 대부님 엄청 부자거든요·”
영훈은 솔직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기인 건지 저 대부라는 사람이 도대체 주췬과 무슨 관계인 건지· 그리고 주췬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어벙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받아도 되는 거야?”
혹시나 한국말을 알아들을까 최대한 정성 들여 연기했다·
“한번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세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이제 우리 신혼집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양티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대부님이랑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정치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거지· 나도 네가 황레이님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하필 네 남자친구가 최영훈 과장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 인연은 소중한 것이지·”
그렇게 말한 주췬은 황레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영훈은 작은 목소리로 양티엔에게 물었다·
“중국인이었습니까?”
“그럼 한국인 같아 보였어요?”
“원어민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말을 무척 잘해서요· 교포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저는 한 번 배우고자 하면 끝을 보려고 죽어라 달려들어요· 한국말이 쉽지는 않았지만 2년 동안 죽어라 배웠죠·”
“어디서 배웠습니까?”
“그건 왜요?”
“궁금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영훈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고려대 어학당이요·”
“거기서 거의 수재였겠습니다?”
“뭐··· 그랬죠·”
“그런데 오늘 이 자리 도대체 뭡니까? 아니 일단 이 자리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맞습니까?”
“맞아요·”
일단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고 하니 조금 긴장이 풀렸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양티엔은 영훈의 옷에 묻은 털 따위를 털어주며 싱긋 웃었다·
“표정 너무 굳었어요· 긴장하면 들킨단 말이에요· 우리 대부님 삼합회 간부예요· 눈치 없는 흐리멍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갑자기 여기서 삼합회는 또 뭔가?
어쨌든 영훈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연기에 최선을 다할 테니 이제 말해주시죠?”
“한국의 조직폭력은 그저 술집이나 털어먹고 사는 정도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아요· 정치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요?”
양티엔은 여기서 대답을 멈추고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름 모를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영훈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왜 필요했을까? 주췬 인민대표님은 당신이 꼭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나도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연기를 하고 있고요·”
결국 그녀도 주췬의 의도를 모른다는 말이었다·
도박판에서 주췬을 속이려고 했던 허바이바이와 삼합회의 간부인 황레이 그리고 갑자기 끼어든 의문의 여자인 양티엔·
“지금 저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은 별거 아니에요· 후원하고 싶은 사람과 돈이 필요한 사람 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뻔하지·”
“음····”
“성급 인민대표라고는 하지만 아직 중앙에서 보면 발이 넓지 않고 뒷배가 약한 주췬님이 삼합회 간부를 통해 인맥을 넓히려 하는··· 이런 로비는 너무 흔한 상황인데 갑자기 한국 직장인이 여기에 왜 참여해야 할까? 나는 그게 더 궁금해요·”
영훈은 음식을 씹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이 맛있다는 듯 젓가락을 움직였다·
슬쩍슬쩍 황레이와 주췬을 번갈아 보았는데 그 둘은 서로 대화를 하느라 주변에는 무신경했다·
특히 신기한 건 허바이바이였는데 그녀는 마치 술 시중을 들러 온 종업원 마냥 황레이의 잔이 비워질 때마다 잔을 채웠다·
입 한번 열지 않고 묵묵히 잔을 채우는데 술 따르는 기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영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여기에 왜 끼게 된 겁니까?”
“후훗 내 역할은 무엇일 것 같으세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혹시 양쯔엉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녀는 눈을 끄게 뜨며 손을 튕겼다·
“오호~ 맞췄어요· 양쯔엉은 우리 아빠예요· 우리 아빠와 황레이님은 의형제죠·”
그렇다는 건 결국 양쯔엉이 삼합회 간부라는 뜻도 되었다·
그제야 매달 현금을 갖다 바쳐야 광산개발이 수월했단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양쯔엉이 단순히 지방에서 힘 좀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요?”
“주췬 대표님은 이곳 흑룡강성에서는 힘이 있으시지만 크게 전국으로 보면 그리 주목받는 정치인은 아니세요· 하지만 딱 하나 주췬님이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중국 모바일 공동구매 플랫폼인 메이홍이 바로 주췬님의 것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지분구조가 복잡하지만 하여튼 그래요·”
“그럼 혹시···?”
“맞아요· 난 메이홍의 도움을 받아서 내 화장품 회사를 키워 보려고 해요· 마침 주췬 아저씨도 굉장히 가까운 분이시고 황레이 대부님이야 거의 큰아버지 같은 분이시거든요·”
“그러니까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주는 자리를 만들면서 두 사람을 이어줬다?”
“두 분은 본래 아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약속을 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리고 주췬 대표님은 인민대표인데 대놓고 삼합회 인물들을 만나기는 조금 그렇잖아요?”
“아····”
한 명은 정치인 한 명은 조직폭력배 간부인 둘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그녀라는 매개체가 필요했다는 거다·
이때 황레이가 양티엔에게 말했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냐?”
“신혼집을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거였어요· 중국에서 살게 된다면 이 사람 직장도 구해야 하는데 어느 회사에 다녀야 할지도 고민이고요·”
“별것이 다 고민이구나· 그 정도 능력이 있다면 어디든 못 들어갈까· 난 이제 들어가 보련다· 자네는 언제 시간 내서 나 좀 보지·”
황레이가 영훈을 콕 찍어 말했다·
양티엔에 통역해주자 영훈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연락을····”
“저 아이를 통해서 전달하겠네·”
황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췬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허바이바이와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이 나가자 주췬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영훈을 보며 말했다·
“통역을 데리고 왔다고?”
“네· 밖에 있습니다·”
“그렇군· 가짜긴 하지만 그래도 양티엔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 아이는 자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양티엔은 주췬의 말을 통역하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미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양티엔이 통역해주자 주췬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아쉽군· 아마 전에 같이 왔던 여자겠지? 그 정도 미모에 배경이라면 이해가 되는군·”
양티엔은 말을 통역하다가 자신의 궁금한 걸 덧붙였다·
“그 여자는 누군가요? 얼마나 예쁘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날 왜 부른 겁니까?”
주췬은 양티엔에게 말했다·
“그만 내려가 있다가 내가 다시 부르면 올라오도록 해·”
“제가요? 통역은요?”
“둘이 알아서 대화하도록 하지·”
“날 못 믿나요?”
“네가 들을 이유가 없는 이야기다· 너와 상관없는 이야기야·”
주췬의 단호한 어조에 양티엔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주췬은 영훈에게 같이 왔던 통역을 부르라고 말했다·
영훈은 얼른 전화로 황대출을 호출했고 황대출은 음식을 먹다 말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앉으세요· 여기는 주췬 인민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진물산····”
“앉게·”
주췬은 황대출의 인사 따위는 다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끊고 자리에 앉혔다·
“네····”
“황레이는 중국의 연예기획사와 다수의 매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재벌이라고 할 수 있네· 물론 그 혼자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고 삼합회가 소유하고 있다고 봐야지· 당연하게도 그 연예기획사들을 가지고 정치인들과 수많은 커넥션을 이루고 있어·”
황대출은 빠르게 통역했다·
영훈은 대략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자네가 그때 말했지? 쓰임새가 많은 여자라고· 어지간한 여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건지 황레이의 곁에 앉을 정도가 됐어·”
그때 한 말을 기억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 얘긴데··· 진정 놀라운 실행력이었다·
고작 그 한마디로 그녀를 삼합회에 던져넣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어쨌거나 허바이바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요?”
“어떤가? 황레이라는 인간 말이야·”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주췬이 영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주췬은 재촉하지 않고 자작하며 그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영훈의 입이 열렸다·
“황레이라는 사람이 궁금하십니까?”
“맞네·”
“그렇지 않을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황레이가 아니라 양티엔이 궁금한 게 아니었습니까?”
주췬은 눈을 크게 뜨다가 술을 들이키고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맞아· 맞았네· 한국에서 자네를 부르길 잘했어· 내가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정말 기가 막히는군·”
< 역마살이 꼈나?(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