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마살이 꼈나?(5) >
영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여자가 뭐라고 유연탄까지 빠르게 소비시켜주며 자신을 불렀단 말인가?
“저 여자가 저를 불러야 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까?”
“중요하지·”
“양쯔엉의 딸이라서요?”
“들었나? 그 짧은 사이에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군·”
“같은 양씨라고 생각해서 떠올렸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군· 하나 물어보겠어· 어떻게 내가 양티엔을 궁금해 할지 알았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주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영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정색하면서 말했다·
“전 당신을 도와주러 왔지만 사실 당신이 유연탄을 처리해준 건 우리가 부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날 필요로 해서 불러냈다면 먼저 오늘처럼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됐습니다·”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주췬 인민대표가 이 흑룡강성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와서 이렇게 면전에다 비난을 해대고 있었다·
사실 황대출은 본사에서 나온 최영훈 과장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들은 건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과장 자리에 앉은 낙하산이라는 정도?
어느 라인을 타고 내려온 낙하산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기조실에서 최영훈 과장을 서포트 하라고 했을 땐 뭣도 모르는 낙하산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니 대화 내용이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당돌함이라니···
역시나 주췬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지금 나를 가르치려는 건가?”
“경우가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유연탄 소비를 도와주기 보다 먼저 저에게 도움을 달라고 요청해서 미리 사정을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지금 대표님의 태도는 저를 시험하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주췬 인민대표님의 직원인가요?”
“···”
황대출은 등에 식은땀을 흘려가며 통역을 했고 주췬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와 대표님의 관계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전 대표님을 도와드리러 온 겁니다· 그러니 도움을 받고 싶으면 최대한 저에게 협조 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 지금 일어나겠습니다·”
황대출은 정말 이렇게 통역해도 되는 건지 영훈의 눈치까지 보았지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통역하라고 지시했다·
역시나 주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더이상 중국에서 사업하기 싫은가 보지?”
영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되물었다·
“그 협박이 통하시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서 더 날뛸 것 같았던 주췬은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자네는 자네 때문에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서로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힘 빼지 말자는 겁니다· 대표님이 우리를 거부하면 우리는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다른 사람을 찾을 겁니다·”
“···”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빙빙 돌리지 마십시오·”
주췬은 잠시 술을 마시며 생각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했네· 사과하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췬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레이와 끈이 닿았던 건 순전히 운이었어· 자네 말대로 허바이바이는 재주가 많은 여자였던 거지· 그 짧은 시간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을 곁에 뒀으니 말이야· 처음에는 역시 자네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요?”
“나중에 알게 됐어· 양쯔엉과 황레이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말이야·”
황대출이 통역을 제대로 한 게 맞다면 지금 양쯔엉과 황레이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주췬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양쯔엉이 6년을 쫓아다녀서 얻은 아내가 바로 양티엔의 어머니네· 그리고 지금 그 아내는 황레이의 첩이 되어 있지·”
“네?”
“대부? 웃기지도 않지· 아마 양쯔엉이 산채로 갈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황레이 일 거야·”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통역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할 정도였고 영훈은 황대출의 통역을 들으며 주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까 양티엔의 행동을 보면 굉장히 친한 큰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지 않은가?
주췬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레이는 양쯔엉이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삼합회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야· 양쯔엉? 고작 흑룡강성 내에서나 목소리에 힘을 주는 정도지·”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친한 친구라기 보다는 부하에 가깝다는 거군요?”
“맞아·”
“이야기를 계속해주시죠·”
주췬은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고 입을 열었다·
“양쯔엉과 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네· 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지· 그래서 양쯔엉의 그런 사정도 모를 수 없었어· 문제는 양티엔이 황레이에게 접근하는 걸 알았다는 거야· 난 누가 내 앞길을 방해하는 걸 원치 않아·”
“전 관심법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마 이 사람이 내가 사주를 보는 걸 알고 저렇게 디테일하게 물어보는 건가 싶을 정도다·
“알고 있네· 그냥 양티엔이 어떤 사람인지 그게 궁금해· 겉으로 보이는 데로 내 사업체를 이용해서 한 몫 챙기려는 마음이 다라면 얼마든지 이용 당해줄 수 있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게 다인가요?”
여기서 주췬은 망설였다·
그러다 영훈이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자 마지못해 말했다·
“양티엔··· 가지고 싶네·”
순간 황대출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멈칫했다가 영훈에게 통역했다·
하지만 영훈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자네는 속일 수 없는 사람이군·”
“아마 마지막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대로 한국에 갔을 겁니다·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영훈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길었지만 결국 양티엔이라는 어린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유혹하는데 이 여자의 속셈을 모르니 알려달라는 거였다·
고작 그걸 알려달라고 사람을 움직여 유연탄을 팔아주었으니 이걸 통이 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딸 같은 여자에 미쳤다고 해야 할까?
“이제 자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겠나?”
“시간을 주시죠·”
“얼마나?”
“사흘이면 될 듯 싶습니다· 그동안 양티엔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가져보면서 파악해보겠습니다·”
“알겠네· 호텔 번호를 놓고 가게·”
“그런데··· 계산을 잘못 하신 것 같습니다·”
“응? 무슨 계산 말인가?”
“말씀드렸듯이 그 유연탄의 처리는 굳이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족하다는 거군·”
“맞습니다·”
“무얼 원하는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알겠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알겠습니다· 식사 잘했습니다·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영훈의 미소에 주췬도 따라 웃었다·
“솔직히··· 자네가 오니까 마음이 놓이는군·”
“그럼 최대한 빨리 연락 드리겠습니다·”
영훈이 황대출과 함께 바로 룸을 나오니 식당 앞에 양티엔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영훈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황대출에게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방금 전의 대화 내용은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됩니다·”
“나도 눈치는 있습니다·”
황대출은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중이었다·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빨리 나왔네요? 안에서 무슨 이야기했는지 물어보면 혹시 가르쳐줄 건가요?”
확 다가와 팔짱을 끼는 그녀의 물음에 영훈이 빙그레 웃었다·
“미안하지만 회사 기밀입니다· 체크인했던 호텔로 가시죠·”
영훈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슬며시 피했다·
“칫··· 대부는 당신이 미심쩍은가 봐요· 한번 시간 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괜찮아요?”
“일단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습니다· 가면서 이야기하죠· 보는 사람이 많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자 그녀의 수다가 시작됐다·
“아무리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님 앞에서는 그 연극 제대로 해줘야 해요· 아 주 대표님이 그건 이야기 안 하시던가요?”
확실히 그녀는 황레이한테는 대부라고 하면서 주췬에게는 대표님이라고 깍듯하게 말한다·
이런 모습만 보면 그녀는 황레이에게 더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맞는 것일 텐데···
그런데 고작 중국까지 와서 다 늙은 아저씨에게 접근하는 여자와 그런 나이 어린 여자를 꼬시려는 늙은 아저씨를 도와줘야 하는 건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했던 일은 산에서 사주와 관상을 공부했던 게 쓸모 없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게 했는데 오늘 일은 정말···
그냥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밀려오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닙니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니까 좀 조용히 갑시다·”
양티엔은 입을 삐죽거리곤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메리어트 호텔에 내린 영훈은 일단 방에 들어오자마자 황대출에게 말했다·
“저 양티엔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조사해주세요· 양쯔엉도 같이요· 가족관계부터 성적 교우관계 등등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다요·”
“알겠습니다·”
“고대 어학당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진짜 거기 다녔는지도 확인해주세요·”
“오··· 그거면 빠르게 확인 가능하겠습니다·”
영훈은 잠깐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중국에서 잘하고 있어? 주췬이 부탁하는 게 뭐야?]
고승현 상무였다·
“별거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사적인 걸 부탁하는 바람에 더 짜증나는 상황이네요·”
[사적인 거? 사적인 거 어떤 건데?]
“자세한 건 서울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고작 유연탄만 받고 도와주기는 그래서 말인데 뭐 얻어낼 거 없습니까?”
[사적인 거라며? 사적인 일 도와주는데 더 요구해도 되는 일이야?]
“사적인 일이라서 더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작 유연탄 좀 팔아준 거 가지고 이런 일 해주면 버릇 나빠져요·”
[하하! 그 정도야? 글쎄···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건지 알아야 견적이라도 내 보지·]
“어지간한 거면 들어줄 겁니다·”
[그래? 어지간한 거? 음··· 알겠어 일단 확인해보고 연락줄게·]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영훈은 전화를 끊은 뒤 씻고 나왔다·
황대출은 본사와 계속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중이었는데 영훈이 나온 걸 보자 전화를 끊고 말했다·
“고대 어학원에서 공부했었던 게 맞았어요· 여기 인적사항입니다·”
그가 빠르게 휘갈겨 쓴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있네요?”
“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는데 아마 주췬의 말이 맞다면 이후에 양쯔엉이 재혼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쯔엉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답니까?”
“주로 부동산과 대부업에 손을 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거부는 아닌데 워낙 발이 넓고 사교 관계가 좋아서 우리도 유연탄 광산을 진행할 때 양쯔엉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음···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지에 적힌 그녀의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주를 계산하는 와중에 고승현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벌써 계산 나왔습니까?”
[주췬이 흑룡강성 유통 업계를 꽉 잡고 있다는데?]
“그래요?”
[그 모드린가 노드린가 하는 브랜드 있지? 그거 우리가 중국에 넣어보자·]
영훈은 주췬을 처음 만난 장소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어떤 백화점이었던 걸 기억했다·
“아··· 그거 괜찮겠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넣어도 되는 겁니까?”
[방금 영업팀 노형석이한테 전화했는데 우리가 넣어도 계약상에 문제는 없다고 확답받았어· 야 이거 중국에서 대박 터지면 현진물산이 아니라 현진패션으로 간판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고승현 상무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노형석 과장의 운빨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이쯤 되면 걸어 다니는 로또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 역마살이 꼈나?(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