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마살이 꼈나?(6) >
샤워하고 나온 황대출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꺼내놓고 앉아 있는 영훈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
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바빠서 서로 제대로 인사도 나눌 시간이 없었지만 그 짧은 사이에 영훈을 보면서 느낀 점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일 거라는 거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각자 대충 시간을 보내다 잘 거라 생각했는데 맥주를 가져다 놓고 자신을 기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다·
“기다렸습니까?”
“네· 오늘 정신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호텔 들어와서는 본사에 연락한다 어쩐다 하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는데 그대로 잘 수는 없잖습니까· 며칠 같이 지낼 건데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이라도 해야죠·”
황대출은 조금은 뻘쭘한 표정으로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하하 그럽시다· 실례지만 나이가···?”
“서른 초반입니다·”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고 서른 초반이라고만 하자 황대출은 최영훈이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았지만 더 물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았다·
“그렇군요· 재작년부터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황대출입니다·”
간단히 악수하고 난 뒤 영훈이 맥주 한 캔을 건넸다·
서로 한 모금씩 목을 축인 후 영훈이 말했다·
“최영훈입니다· 작년 공채로 입사해서 비서실 과장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기에 말했는데 황대출은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습니다· 기조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바로 확인해보았거든요· 회사 내에도 소문은 빠릅니다·”
“하하 그랬군요· 낙하산이라고 들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영훈은 낙하산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럼 어느 라인을 타고···?”
“신영은행 쪽과 가깝습니다·”
“아··· 그래서 그 대출이····”
황대출은 이제야 신영은행이 대출을 해줬던 이유를 알게 됐다며 무릎을 쳤다·
낙하산이 아닌 척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렇게 하니 굳이 더 변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석해서 굳이 보탤 이야기가 없었다·
“갑자기 임무가 내려와서 당황스러우셨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유연탄 광산 쪽에 문제가 생길 때도 정신없었지만요· 그땐 갑자기 일이 해결되어서 조금 편해지려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급하게 일이 내려올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상해에 있다가 바로 하얼빈까지 비행기 타고 왔는데도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그저 비서실에서 오신 과장님
을 도와 일을 해결해주었으면 한다는 거였죠·”
“대리님이 여기에 안 계셨으면 무척 곤란했을 겁니다·”
“그럼 저 궁금한 것 좀 물어보겠습니다· 양티엔이라는 여자와는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영훈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곤 말했다·
“양티엔이 주췬 인민대표의 호감을 끌어냈다는 건 아시죠?”
“그거야····”
“제가 그녀와 들어갔을 때는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명은 황레이라는 삼합회 간부와 그의 여자였죠· 황레이는 양티엔의 대부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 알았던 것처럼 굴더군요· 그리고 난 황레이 앞에서 양티엔의 약혼자처럼 행세했습니다·”
“약혼자요? 허··· 그러니까 이게 무슨 관계입니까? 주췬은 양티엔을 탐내고 있었고 양티엔은····”
“양티엔과 황레이· 그 둘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주췬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본래 그 둘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 없어야 하는데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어느 친척 관계보다 가까워 보였거든요· 마치 아빠와 딸 같았습니다·”
“허 참····”
“뭐 복잡하긴 하지만 대리님은 이 건에 대해서 굳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황대출이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영훈이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신바이 백화점이라고 하얼빈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있습니다· 매출 규모로 보면 국내 여느 대형 백화점의 매출을 압도할 만큼 대단한 곳인데 이곳에 우리 Nodri Clare를 넣으려고 합니다·”
“가능할까요? 백화점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명품 쪽은 쉽게 라인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주췬이 도와줄 겁니다·”
“그걸 조건으로 걸 생각이군요·”
“맞습니다· 대리님은 이걸 진행하는 데 주력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본사에서 실무인력을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건 처리해서 계약서에 도장만 찍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목표입니다·”
“주췬 인민대표가 도와만 준다면야 그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안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통역이 필요할 텐데요?”
“한 사흘 정도는 양티엔 외에는 따로 만날 사람이 없습니다· 양티엔은 한국말을 잘하니까 당연히 대리님이 같이 안 계셔도 되지요· 사흘 후에 주췬을 만날 때 그때 잠깐 도와주시면 되는데 어쩌면 그때도 안 도와주셔도 될지 모릅니다·”
“양티엔 때문에요?”
“아니요· 보아하니 주췬은 오늘 그 자리에 따로 통역을 불러온 듯했습니다· 대리님이 계시니 굳이 부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통역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요?”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주췬과 나는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죠· 주췬은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주췬의 도움이 필요하니 서로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황대출은 주재원으로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중국인들과의 비즈니스는 한순간에 틀어질 가능성이 항시 있으며 계약서조차 뒤집는 경우가 많아 한 장의 서류를 봐도 최소 세 번 네 번은 검토하지 않으면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국인 그것도 정치인을 이렇게 쉽게 믿는다고 하니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모로 편하잖아요· Nodri Clare의 경우처럼··· 반대로 그는 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보다 기조실에서 양티엔에 대해 더 특별히 알아낸 내용은 없다고 하던가요?”
“네· 아무래도 한국 사람도 아닌 중국인에 대한 정보를 고작 회사가 알아내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특별히 알아야 할 내용이라도 있습니까?”
“음··· 아닙니다·”
사실 그녀의 사주를 보고 바로 떠오른 궁금증이 있었다·
그녀는 본래 부모 복이 없는 사주를 타고났다·
단순히 부모가 재물복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을 운명이었던 거다·
보통 아버지와 친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친하다거나 어머니와 친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친해야 하는데 그녀의 사주는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이런 사주를 타고나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
반면 사주에 도화와 화개가 만개해 재주도 많고 인기도 많을 터이니 어떻게 보면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에게 받을 팔자이기는 했다·
아마 옛날에는 이런 삶을 사는 여자를 팔자가 센 여자라고 했을 거다·
궁금했던 건 그녀가 유학을 오게 된 계기였다·
단순히 공부하러 온 것일지 아니면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을지 그게 궁금했다·
그게 부모였다면 생각보다 초년의 악운이 오래가는 셈이었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제 흩어졌던 부모와의 인연이 이어져간다고 보았다·
물어보았자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으니 그냥 접었다·
“그럼 이제 내일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전 양티엔을 만나면서 장단을 맞춰줘야죠· 아 생각하지 못했는데 혹시 황레이에 대해서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뭐 대단한 것까지는 힘들 것 같고 가족관계나 생년월일 따위의 것들로····”
영훈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공안 쪽에 아는 라인이 있어서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 정보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까요·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될 겁니다·”
황대출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켜며 웃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둘은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양티엔과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주췬을 만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영훈의 계획이었다·
전에는 급한 마음에 바로 허바이바이에 대해 이야기했었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시간을 끌며 나름 신중하게 알아보았다는 인상을 주려 했었던 거다·
그런데 양티엔은 아침부터 찾아와 닦달해대고는 바로 데리고 간 곳이 전날 주췬과 만났던 호텔이었다·
그리고 전날 똑같은 곳에는 주췬도 허바이바이도 없이 황레이 혼자만 자리하고 있었다·
주췬과 만난 이후에나 만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영훈은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그나마 황대출이 그의 정보를 알아 온 게 다행이라는 정도?
“대부님이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냐고 하세요· 얼른 앉아요·”
양티엔이 팔을 잡아끌어 영훈이 일단 황레이의 맞은편에 앉으니 양티엔이 또 종알거렸다·
“대부님이 제가 예의가 없으니 이해하래요· 칫 이제 이런 건 통역 안 해야지·”
그녀가 가벼운 말로 무거운 분위기를 띄울 때 황레이가 말했다·
“주췬은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전에 유연탄 광산 건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가 양쯔엉님을 잘 이해시켜줘서 다행스럽게도 문제가 있었던 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로 입을 헹군 후 말했다·
“그럼 양티엔은 언제부터 알았지?”
양티엔은 영훈에게 통역하지 않고 대신 대답했다·
“어제 저한테 다 들어놓고선 또 그걸 물어보고 그래요?”
“저 친구한테 듣고 싶어서 그런다·”
“어차피 내가 통역해서 듣게 될 텐데 거짓말을 한다고 한들 대부님이 알 수 있겠어요?”
“고얀 녀석····”
황레이는 인상을 썼지만 양티엔은 가슴을 척 내밀며 어쩔 거냐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버릇이 없어 버릇이····”
그때 양티엔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녀는 전화기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곤 영훈에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미쳐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가 훅 나가버리는 순간 영훈은 보았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음식을 먹고 있던 입가를 쓱 닦아내는 황레이가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더니 방 뒤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고 키가 180 정도 되는 단신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황레이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황레이의 옆에 섰다·
“시끄러워서 잠깐 내보냈네· 아마 제 아버지가 부른 줄 알고 정신이 없을 거야· 이제 연극은 그만하고 진짜 이야기를 해보지·”
알고 보니 그는 통역사였다·
영훈은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에 담담한 얼굴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한국 현진물산이라는 무역회사 비서실에서 나온 최영훈입니다·”
황레이는 영훈이 내민 손을 쓱 보더니 앉은 채로 대충 손을 잡아주었다·
영훈은 다시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하실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당연히 거짓말을 해서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영훈의 모습에 오히려 황레이가 황당해했다·
“내 앞에서 거짓 연극을 해놓고 지금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냐고 물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왜 연극을 다 지켜보고 있으셨던 겁니까?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
“사실 어제 만남 이후로 계속 궁금하긴 했습니다· 도대체 어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거든요·”
“그게 무슨 이야기지?”
“양티엔은 주췬 대표가 가진 모바일 플랫폼을 이용해서 화장품 회사를 일으켜보고자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중앙에 연줄을 원하는 주췬 대표가 당신과의 자리를 원하는 거야 당연하고··· 그런데 황레이 당신은 모르겠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모르겠다는 말이지?”
“대부라고는 하지만 가족도 아닌데 굳이 양티엔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궁금했다면 언제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면 될 일 아닙니까? 있을 수는 있는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가 않더군요·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일인지··· 도무
지 이해가 안 가더란 말입니다·”
황레이는 담담하게 영훈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주췬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익히 짐작하고 있을 내용이었죠·”
“그게 다인가?”
영훈은 차마 주췬의 본심을 꺼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황레이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게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난 정치인을 믿지 않아·”
“한국에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건넌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게 떠오르네요· 왜 돌다리를 두드리고 계십니까? 흑룡강성은 당신의 본거지가 아니니 그냥 돌아가시면 될 일 아닙니까?”
황레이는 순간 대답을 못 했다·
영훈은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흑룡강성이 탐나는 겁니까?”
순간 황레이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서 영훈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혹시··· 양쯔엉을 처리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주췬 대표의 힘이 필요한 겁니까?”
< 역마살이 꼈나?(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