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이 정해지다(2) >
[(속보) 군산조선소 8700억 매각 결정!]
내용도 없는 실시간 속보가 포털에 떴고 그 이후로 후속 기사가 연달아 포털 메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정호균 회장의 결단 과연 조선소를 살릴 수 있을까?]
[피눈물 흘리며 내린 대국적인 결정에 찬사를 보내다·]
[신영은행과 무진조선소 간의 협상 막전막후 24시]
[군산조선소 매각 해주조선해양 매각을 재촉하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처음에는 대국적인 결정을 내린 무진중공업에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당장 조선회사 하나 없이 군산조선소를 인수하게 된 현진물산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확정된 이후 군산조선소를 인수한다는 방침이지만 일단 가격이 결정되었고 해주조선해양 매각에 걸림돌이 될 것도 많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과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지불할 것인지였다·
“8700억은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언제나 만나던 블루문에서 마주 앉은 영훈은 형준을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초 7천억 수준이라고 얘기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비싸게 결정났기 때문이다·
형준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영훈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그치 비싸다고 생각하지? 나도 깎아보려고 했어· 일단 앉아· 왜 서 있어? 목 아파 자자···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 보라고· 자 한잔 들이키고·”
영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니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곤란했어· 이길수 총리가 군산조선소에 방문한 날 연락도 없이 정호균 회장이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헐값에는 팔 수 없다고 큰소리부터 치는 거야· 이길수 총리가 방문하면서 적당히 기자들 구워삶아 여론을 바꾸려는 수작으로는 택도 없다고 판단한 거지· 확실히 판단이 빨랐어·”
“그런데요?”
“만약 마지막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와서 억지로 테이블에 앉았다면 우리가 거래를 주도했을 수 있었을 텐데 정 회장이 직접 테이블에 앉았어· 그리고 헐값에 팔 수 없다면서 이후에 한 첫 마디가 아직 자신에게는 시간이 많다는 거였단 말이야·”
형준은 자신의 잔을 쥐고 단번에 들이키고는 파인애플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축구 좀 보나? 이적시장에서 말이야 선수에게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그 선수 몸값은 엄청나게 떨어져· 곧 있으면 자유계약으로 풀리니까 비싼 돈을 들여가며 선수를 사지 않으려고 하고 구단에서는 공짜로 내보내기보다는 얼마라도 건지려고 한단 말이야· 마찬가지로 협상에서도 시간이 중요해·
정 회장이 미리 판을 깔아 놓은 건 최대한 가치를 높게 받으려는 수작이었고 그게 일리가 없지는 않다는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야당 정치인을 물고 개싸움이라도 할 모양이었어· 전에 뉴스 나오는 거 봤지? 군산조선소를 매각할 거라는 조재민 의원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야당에서 얼마나 물어뜯었어? 정치인까지 움직여서 조선소 매각과 관련해서 부정이나 불법의 요소가 있는 게 아닌지 특검까지 가야 한다는 둥 지랄을 해대면 좋을
게 뭐가 있냐 이거야·”
형준의 이야기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건 일리가 있네요·”
“저들이 그렇게까지 한다고 한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는 없겠지만 이 상황 자체를 진흙탕으로 끌어 내리면 나중에 무슨 변수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가격대를 높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어· 뭐··· 당연히 우리가 가져갈 커미션을 포함한 가격대라 조금 부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얼마나 받으시려고요?”
형준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크흠··· 한 15%는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
“15%요? 그럼 얼마야?”
“1300억 정도?”
“후아··· 많이 가져가시네?”
“그 정도는 돼야 내가 회사에 체면이 선다· 솔직히 내가 가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가 먹는 건데 내가 죽자고 달려들고 싶겠냐? 근데 저 정도 커미션 아니면 뭔가 임팩트가 줄어든단 말이야· 알지? 무슨 말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마 절벽 앞에 선 기분일 거다·
“커미션 포함 8700억입니까?”
“아니 제외지·”
“헐··· 그럼 도합 1조짜리네요? 이거 뭐····”
영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형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알아· 비싼 거 알지· 그래서 일단 우리가 최대한 저리로 대출을 지원할 생각이야· 이건 잘만 되면 완전히 레버리지 효과로 남의 돈 빌려서 돈 벌어먹는 일이 될 거라고·”
“잘 된다면 말이죠·”
“우리 최 과장 손에 닿은 일 치고 어디 실패한 일이 있던가?”
“고작 몇 개 손댔다고 그러십니까? 흠··· 좋습니다· 가져가세요·”
“하하하! 역시 우리 최 과장 화통해!”
형준은 호탕하게 웃으며 영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심 영훈이 커미션을 조정하자고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하고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영훈은 안도의 웃음을 흘리며 술을 마시는 형준에게 말했다·
“일단 기사 수정해서 다시 내라고 하세요· 매각금액 8700억이 아니라 1조라고· 그 정도면 무진중공업 뿐만 아니라 현진물산도 대국적으로 결정한 셈 아닙니까?”
“그 그렇지· 원래 커미션 금액도 포함해서 보도자료를 돌렸는데 기사에서는 그 금액을 쏙 뺐더라고· 아무래도 조선소 건설비용 대비 매각금액을 적게 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좀 하고 싶었나 봐·”
“그런 것 같네요· 금액은 확실히 해야죠·”
“그럼 그럼~”
“그리고 추가로 대출 하나만 더 해주세요·”
“대출? 해주조선해양? 그래 안 그래도 8천억 정도는 잡고 있었어· 게다가 내가 듣기로 삼분의 일은 산업은행이 대출 지원하고 8천억 제외한 나머지는 올해 말부터 분할납부 하는 걸로 들었는데 맞지?”
“맞습니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8천억 정도만 더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형준은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물었다·
“뭐에 쓰려고? 아니 담보는 있는 거고?”
“회사를 인수하려고 쓰는 돈이니까요·”
“지금 현진물산에 우리 대출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고는 있는 거지?”
“계산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 이거 배짱이 큰 거야? 아니면 너무 큰 돈이라 현실성이 없는 거야? 8천억을 추가 대출해달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오는 거 아니야? 어느 회사 인수하려고?”
“아직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형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이건 나라도 힘들어· 나간 대출이 너무 많아· 부채율이 너무 올라간 상태라고· 여기서 추가 대출? 위험해· 기업여신 쪽에서 당장 반대하고 나설걸?”
“지금 당장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일단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완료되고 총선 끝난 이후에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한 석달 남았네?”
“네· 그러니까 그때까지 자리 잡으시고 우리 뒤 좀 팍팍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씨발 그러니까 결국 하라는 말이네·”
“할 수 있잖아요· 전 상무님 믿습니다·”
영훈이 빙그레 웃자 형준은 썩은 표정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이래서 조선소 가격이 3천억이나 올랐다는 데도 별말을 안 했던 거구만· 여우 같은 놈 같으니라고· 조선소 가격 안 올랐으면 어쩌려고 했냐?”
“그럼 더 애절한 표정으로 부탁했겠죠·”
“씨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리고 네가 말한 그 비서· 아버지가 보낸 쁘락치였어·”
영훈이 휘둥그레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아 진짜요?”
“뭘 진짜요야? 네가 못 믿을 여자처럼 보인다며?”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쁘락치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회사에 여자를 쁘락치로 넣습니까?”
화면에 뜬 그 비서의 얼굴은 이마가 좁고 윤택하지 못해 초년운이 좋지 못하고 코끝과 귀 윗부분인 이각이 날카로워 복이 없으며 남에게 정을 주는 성격도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그녀에게 복이 있다면 재벌인 형준과 결혼할 테지만 그런 복을 타고난 여자가 아니라는 거였고 남에게 쉽게 정을 주는 여자도 아니니 형준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사이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 여자니 형준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것인데 설마 이세준 부회장이 그녀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여튼 그때 충격이 심했다· 설마 아버지가 벌써 나를 노리고 그랬을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회사 기밀을 다른 곳으로 보낸 정황이 있어서 그걸로 일단 감찰부서에 넘겼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모른 척하시지· 아마 물어보면 그런 여자가 있었냐고 되물으실걸? 감찰부서에 넘기고 나서는 모른 척하고 있을 걸 그랬나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아마 걔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못 참았을 거야·”
“·······”
영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주는 나쁘지 않은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그건 그렇고 산업은행장이랑 언제 만나기로 했어?”
“모레 회동입니다·”
“가서 빨리 결정지어라·”
“결정은 빨리 지어도 세부조건 조율하고 현재 해주조선해양 노조랑도 어느 정도 협의해야 하니까 완전히 인수되는 건 아마 총선이 지나야 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결정이 나는 게 중요한 거지·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결정돼야 우리 쪽에서 돈을 집행하니까·”
“현진건설이 가진 용인 사업부지가 있는데 마침 거기 땅값이 좀 올라서 2천억 정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그거랑 회사가 가진 자금 털어서 넣겠습니다·”
“흐흐··· 그래· 나도 이제 들어가서 어깨 좀 펼 수 있겠다·”
영훈은 웃음을 보이는 형준을 보며 괜히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눌렀다·
현상은 어렵지만 분명 그의 운은 나쁘지 않으니까·
적어도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그는 돌파구를 마련할 게 분명했다·
*
우명그룹 김태현 회장은 두 아들인 도훈과 창훈을 불러놓고 말했다·
“송은채 사장이 자리에 앉고 나서 현진물산이 참 많이 변했다· 증권회사가 가진 지분을 회수하고 혜성기업을 인수한 다음에 봉선동 부지 시공권을 따낸 알짜 건설사로 만들었어· 그리고 가지고만 있으면 따박따박 현금 들어오는 알짜 사업인 호텔도 인수했지· 그리고 이번 해주조선해양 인수··· 애비는 참 놀라
웠다· 너희도 그렇지?”
창훈은 아버지인 김태현 회장의 말이 그저 감탄하는 게 아님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일 때 형인 도훈이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회사 경영 쪽에는 경험이 전무하던 송은채 사장이 직접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은 없고 아마 송 사장을 서포트하는 걸출한 인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떨떠름한 반응·
도훈은 주먹을 쥐며 강하게 말했다·
“대신 반대로 보면 지금 현진그룹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건 확실합니다· 차입금의 규모가 엄청나고 현진중공업은 현진물산과 거의 계열사 분리가 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 3월 주총에서 우리와 헤지펀드가 흔들기 시작하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입니다·”
“으음····”
그래도 김태현 회장의 떨떠름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본래 김태현 회장은 이번 3월 주총에서 혼란에 빠진 현진중공업으로 쏠쏠하게 이득이나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현진물산이 파격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거대 회사를 먹어치우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고작 몇 천억 이익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았던 거다·
아들인 도훈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조선업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그래?”
“전략실을 움직여서 현진중공업과 조선업 동향에 관한 보고서를 곧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제야 김태현 회장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그래 그거 궁금하구나· 만약 한다면 얼마나 들까?”
우명그룹은 현진중공업을 흔들어 주가 차익을 얻는다는 계획에 현진중공업 인수라는 가능성을 하나 추가했다·
“최대한 우호지분을 많이 확보한다고 계산해도 최소 3조 원 이상은 필요할 겁니다· 돈 싸움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부회장 취임을 노리는 김태민의 삼촌이 현진중공업을 탐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길 파고들면 의외로 쉽게 결판이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이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준비 많이 했구나·”
< 주인이 정해지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