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이 정해지다(3)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산업은행 해주조선해양 매각에 현진물산과 원칙적 합의]
[본격적 인수절차 돌입한 해주조선해양의 운명은?]
재계가 뒤집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계열사 분리를 성공적으로 마친 현진물산이 현진건설과 현진관광을 인수하고 세계적인 조선업체인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면서 현진물산을 중심으로 한 재벌구조를 갖추었다·
이름만 현진이라는 간판을 쓰고 있을 뿐이지 명실상부한 새로운 그룹의 탄생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이야 당연히 많은 기사를 접하며 쉽게 잊어버리겠지만 재계에는 이번 일련의 사태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연희의 기분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랜드 백화점에 입점한 Nodri Clare의 오픈 행사를 핑계로 간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나왔는데 썩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언니~ 안녕하세요?”
연희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GK그룹 한주연은 연희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모델 같은 그녀를 보며 연희는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도 몇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좋은 기억이 없었던 연희였다·
특히 김태민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걸 알고 난 이후 그녀가 더욱 싫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축하드려요·”
“뭘?”
한주연은 빙그레 웃음 짓고는 뭘 모르는 척하냐는 눈빛으로 말했다·
“해주조선해양 말이에요· 놀랐어요· 이래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하는가 봐요·”
연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가? 하긴··· 놀랍긴 하겠다· 넌 온전한 현진그룹을 보고 태민이를 만났을 텐데· 오죽 놀랐을까 싶네·”
“으음~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전 언니네 회사 전혀 탐나지 않아요·”
“넌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진심처럼 하니?”
“안 믿으시는구나?”
주연은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난 사람 보고 만나는 거예요·”
순간 연희는 ‘풉’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요즘 연기 준비하니? 그 정도 실력이면 오디션 봐도 되겠는데?”
“이 정도 사이즈면 오디션 정도야 뭐····”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태민이 어디를 보고 사람 보고 만난다고 하니? 차라리 네 예전 남친이면 모를까· 참 그 사람은 잘 지낸다니? 마스크 진짜 죽였는데·”
주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남의 사랑 이야기는 참 잘 기억하시네요?”
“모를 수가 있니· 네가 소식 전해주지 않아도 요즘 TV만 틀면 그 사람 얼굴이 나오는데· 영화 대박 난 거 축하해주고 싶은데 너랑 헤어져서 축하한다는 말을 못 전해주겠네· 그건 아쉽다·”
“결혼할 사람을 어디 얼굴만 보고 만날 수 있나요?”
“그래서 궁금해· 태민이가 똑똑하기는 하지· 그런데 걔 만큼 똑똑한 사람이 없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거든? 인성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 욕심 많은 건 너랑 닮아서 그건 좀 맞겠다·”
“사촌오빠를 그렇게 비꼬고 싶어요?”
연희는 잠시 주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예전과는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져서였다·
그때 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합니까? 전화도 안 받고 한참 찾았네· 이분은 누구고요?”
영훈이었다·
노형석 과장이 송은진 실장과의 만남에 영훈을 데리고 갔었는데 벌써 이야기가 끝났나 보다·
연희는 송은진 실장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백화점을 둘러보고 있다가 주연과 만난 것이었다·
“아 전화했어요? 미안해요· 무음으로 되어있어서 몰랐나 봐요· 여기는 한주연· 현진중공업 김태민 상무랑 만나는 여자예요·”
김태민 상무의 여자라는 말에 순간 영훈은 잠시 헷갈렸다가 이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현진물산 비서실의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주연은 바로 손을 내밀지 않고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희는 바로 덧붙였다·
“참고로 내 남자이기도 해·”
영훈은 무슨 그런 노골적인 표현을 쓰는가 싶어 움찔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주연은 놀란 눈빛으로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악수 안 할 거니? 영훈 씨 손 떨어지겠다·”
“어? 어··· 반가워요· 한주연이에요·”
한주연이 영훈의 손을 잡자 연희가 바로 말했다·
“GK그룹 한재원 회장의 딸이에요· 나이 쉰에 낳은 막둥이인 데다가 보다시피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 편이라 그룹에서 애지중지한다고 해야 하나? 나 이 정도면 설명 잘했니?”
“칭찬만 해줘서 오히려 당황스러운데요?”
“걱정하지 마· 뒷담화는 너 없는 데서 할 거니까·”
어차피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주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사람은 영훈이었다·
“둘이 싸웠습니까?”
“보다시피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왜요?”
대답은 주연이 했다·
“같은 대학을 나왔거든요· 언니는 그때 내가 교수님한테 잘 보여서 내가 학점을 뺏은 줄 알아요·”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아니었다니까? 뭐 믿지는 않겠지만·”
“됐다· 다 지난 일인데·”
연희가 고개를 돌리자 주연이 영훈에게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느 집 사람이에요?”
“말해도 모를 겁니다· 그대들처럼 재벌 가문은 아니거든요·”
“어머 그래요? 언니가 일반인하고 만난다고요? 이럴 수가··· 하하 연희 언니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연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너와는 다르게 사람 보고 만나거든·”
“방금 그거 내가 했던 얘기 같은데요? 그리고 나 태민 씨 사람 보고 만난다니까요?”
“알았어· 잘 만나· 이번에 주총 끝나고 나서도 그 사랑 오래 유지되는지 한번 지켜볼게·”
연희의 말에 주연이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설마 주총에서 태민 씨가 미끄러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금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 뭐더라? CPI 펀드였나? 거기서 이미 상당 부분 주식을 사들였다며? 거기에 우명그룹도 들어갔다고 하던데 괜찮겠어?”
연희는 주연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연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런 위기도 못 넘길 사람을 내가 만날 것 같아요? 그리고 내 걱정보다 언니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수많은 재벌 자제들이 언니 잡겠다고 모여들 텐데 그 사랑 잘 지킬 수 있을까? 부디 그 사랑 영원하길 바랄게요~”
한주연은 그렇게 웃으면서 사라졌다·
연희는 멀어져가는 주연을 보며 투덜댔다·
“흥! 영악한 게 누굴 속이려고··· 쟤 현진중공업 계열 다 먹어치우려는 속셈이에요·”
“어차피 둘이 결혼하면 김태민 상무도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모르죠· 무슨 수작을 부려서 태민이 쫓아내고 자기가 회장 자리에 앉으려고 할지·”
“너무 멀리 가시는데····”
“내가 오버해서 생각한다는 거죠?”
“아니 뭐··· 보니까 똑똑하고 냉정한 사람이긴 한데 그렇다고 가족까지 잡아먹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사주를 보지 않았지만 보여지는 상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것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변 사람을 다 파괴시키는 그런 유형의 여자는 아니었다·
“칫··· 하여튼 재수 없어· 쟤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꼬리를 치고 다녔냐 하면 단 한 번도 자기가 직접 과제를 해본 적이 없었다니까요? 참고로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했다고요· 차이가 딱 느껴지죠?”
“아유 뭐 대단하시네· 엄지 척입니다·”
“어째 기분이 더 나빠지려고 하네요·”
“크흠··· 노 과장님이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갑시다·”
“그래요·”
입을 삐쭉거리는 연희를 데리고 입점 행사장에 들어서니 전속모델인 서가은과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송은진 실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형석 과장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송은진 실장이 연희를 보고 다가왔다·
“왔어?”
“네· 가장 먼저 들어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두 번째로 들어오게 됐네요·”
“너 나 책망하는 거니? 그래 솔직히 Nodri Clare가 이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을지 그때는 몰랐잖아· 그건 인정·”
“그래도 조건 좋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너희 직원 능력 있더라· 사람 속 살살 긁으면서 약 올리는데 욕이 나올 뻔했잖아·”
“아~ 민희 씨? 그분 능력 있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좀 있나 봐요· 그래도 나중에 만나더라도 욕은 하지 마세요· 우리 직원이 욕먹으면 나 화낼 거예요·”
“무섭네? 해주조선해양까지 먹었다고 우리가 아래로 보이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도 나랑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백화점이 여긴데·”
“구라치지 마· 뉴월드를 제일 많이 가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사실 엄마가 뉴월드를 쪼~끔 더 좋아하긴 해요· 아휴 난 거기 주차가 별로라서 잘 안 가게 되던데····”
연희는 어차피 어느 백화점을 가나 VIP 전용입구에서 발렛요원이 주차해주는데도 괜히 너스레를 떨어댔다·
이때 노형석 과장이 다가와 영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연희 씨도 잠시만요·”
“네? 네·”
노 과장은 영훈과 연희를 데리고 조용한 비상구 계단으로 나와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봤어?”
“네? 뭘 말입니까?”
“방금 현진중공업이 갑작스레 빅베스 날렸던데?”
영훈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네? 빅베스요?”
노형석 과장은 ‘아차’ 하는 마음에 다시 설명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임창호 회장님이 계실 때 플랜트 사업 손실 부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당기 순손실을 1조 원으로 잡았다· 지금 주가 폭락하고 있어·”
“어디 봐봐요·”
연희도 놀라서 핸드폰에 뜬 주식차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주가는 그 사이에 무려 마이너스 13%가 넘게 빠지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얼마나 더 떨어질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주연 씨가 자신만만해 하던 이유가 있었네요·”
“아니 그럼 자기도 손해일 텐데?”
“주가가 빠지는 것보다 회사를 노리고 들어온 자들에게는 치명타가 되겠죠· 머리 잘 썼네·”
역시 사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
“얼마나 들어갔어?”
김태현 회장의 굳은 표정에 도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7천억 정도밖에····”
“벌써 7천억이나 들어가?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게 많이 샀어?”
“사채시장과 일본에 있는 큰손 중에 현진중공업 주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접 컨택해서 매수한 거라····”
사실 도훈도 억울하기는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식차익으로 이득을 보건 아니면 인수를 노리건 간에 최대한 빠르게 주식을 매입하라고 지시했던 게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계획을 같이 발전시킨 건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혼자 욕을 들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추가 매입은 중지시켜·”
“그렇게 되면 들어간 7천억이 완전히 공중에 떠 버립니다·”
투자회사도 아니고 그저 사내 보유금으로 투자한 돈인데 그걸 날리는 형국이 됐다·
차라리 현진중공업을 인수하기 위한 목적성을 가진 자금이라면 모르겠지만 단순 투자자금이 이처럼 거대한 손해를 보게 되면 대외적으로도 개망신이었다·
“그럼 어쩌려고? 추가 투입해? 1조 원이 될지 2조 원이 될지 모르는데? 헤지펀드 쪽 상황은 어떤데?”
“그쪽도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는 거의 1조 넘는 자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주총에서 진짜 경영권을 요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헤지펀드가 주식을 매입하느라 주가가 계속 오르면서 추가 매입에 대한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렇게 내려주면····”
김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냐?”
“네? 그럼····”
“그거 숨기려고 하면 못 숨겼을 것 같아? 패 하나 꺼내 본 것일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대외 이미지 때문에 숨겨두었던 손실 난 것 다 꺼내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 네 말처럼 기회일 수도 있지만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더 들어갔다가 만약 경영권도 못 가지게 된 상태로 물리면 어쩔 거냐?”
도훈은 입을 열지 못했다·
현진중공업에 대한 경영권 욕심은 주식상승에 대한 이익을 전제로 한 거였다·
경영권을 못 가진다고 해도 주가 차익을 얻고 나온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던 건데 이제는 그 가정이 쓸모없게 된 거다·
“중지해· 개망신은 이걸로 충분하다·”
도훈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참담한 실패에 입술을 깨물었다·
< 주인이 정해지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