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이 정해지다(4) >
이경호 회장은 요즘 가만히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화기를 들 때마다 또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손자 자랑을 하면 은근히 부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어도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놈이라 그저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용하게 회사를 다니더니 결국 사람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떠벌리기를 좋아하던 놈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고 겉멋에 치중하던 놈의 법인카드는 언제부터인가 쇼핑 내역이 사라져 버렸다·
단순히 마음과 행동을 바꾼 것만이었으면 이렇게 흡족하지 않았을 거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찾아내 회사에 큰 이익을 남겨오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든 아니든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마인드가 바로 직원의 마인드지만 스스로 일을 찾아 이익을 창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오너의 마인드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면서도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니 어찌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님 요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며느리의 물음에 이 회장이 말했다·
“늙은이가 뭐 기분 좋을 게 있겠어· 자식새끼 사고 안 치고 잘 자라는 거 보면 그게 인생의 즐거움이지·”
“형준이 때문에 그러시구나· 우리 혜원이 영은이도 좀 생각해주세요·”
형준의 여동생인 혜원과 영은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놀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이경호 회장은 두 손녀딸이 예쁘기는 해도 손자인 형준만큼은 아니었다·
“혜원이나 영은이는 왜 선을 안 봐?”
“아버님도 참···· 요즘 애들이 어디 예전 저희 같나요? 선보라고 하면 바로 핸드폰으로 상대 얼굴부터 본다고요·”
“그래서? 안 시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때 되면 가겠죠·”
이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다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이세준 부회장에게 말했다·
“애비도 애들 선 자리 신경 써라· 언제까지 놀게 할 셈이냐·”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형준이 전무로 올려도 되겠다·”
이세준 부회장이 흠칫 놀란다·
“네? 아버지 전무는 부행장급이나 마찬가지인데 형준이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빠릅니다·”
“안다· 지금 형준이 나이에 전무 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하지만 넓게 생각해· 한국 기업들은 너무 늙었다· 나이가 들어야 높은 직급을 주니 오너의 생각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투자는 결국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실패하는 거다· 나이가 젊다는 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
이 될 수도 있음이야·”
“그래도 아버지····”
“씁····”
이경호 회장은 쇳소리를 내며 고래를 쳐들었다·
그 서슬에 감히 반박하지 못한 이세준 부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이번에 형준이가 무진중공업 정 회장하고 담판 짓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 고약한 늙은이 앞에서 기죽지 않고 결과를 냈어·”
“생각했던 가격에 비하면 과하게 비싸게 결정됐습니다· 현진물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와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굉장히 곤란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게야· 그 애가 정 회장이랑 급이 맞아야 제대로 목소리를 낼 거 아니냐? 어디 큰소리나 제대로 냈겠어? 본인이 원하는 가격을 고수할 수 있었겠냐고· 열심히 하려는 녀석 좀 밀어줘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끄음····”
이경호 회장은 곧 죽어도 고려해보겠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이세준 부회장이 탐탁지 않았지만 불편한 기색만 내비쳤을 뿐 더는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부회장의 권위를 깎는 행위가 그리 좋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다시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준이는 만나는 여자가 있대?”
그녀는 시아버지의 물음이 단순히 가볍게 만나는 여자가 아니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 것인지 묻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 없을걸요? 형준이도 선 자리 알아볼까요?”
“이번에 현진물산에 군산조선소를 넘겼잖니· 현진건설에 현진관광에 해주조선해양까지··· 거기 사장 딸이 외동이라며?”
“연희요? 유명하죠· 그런데 아버님 걔는 안 돼요·”
“어째서?”
“전에 잠시 만나다가 둘이 잘 안 됐는지 헤어졌거든요·”
“그거 안 됐구나·”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네가 신경 써서 제대로 골라라· 집안에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평안하고 남자 일이 잘 되는 거다· 널 봐봐라· 네가 들어오고 우리 은행이 얼마나 잘 됐어?”
“호호호~ 아유 아버님도 참··· 저보다 이이가 잘해서 그런 거죠·”
“당연히 그렇지만 네 도움도 무시 못 하는 거다·”
이경호 회장은 며느리와 웃느라 미처 이세준 부회장의 굳은 얼굴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흔들렸던 태도를 고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신의 밥을 전부 해치웠다·
마치 남기면 큰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군산의 오후·
조재민 의원은 우산을 쓴 채 적막한 조선소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좋습니다· 표정 구도 전부 완벽합니다·”
전문 촬영기사의 말에 조재민 의원이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이게 다 군산을 사랑하시는 의원님의 마음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 기사 나오는 거 보면서 군산 시민들이 정말 조선소가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희망 섞인 말들을 하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네· 기대하십시오·”
사진 촬영을 마친 조재민 의원은 다시 움직였다·
“오후 일정은?”
“벽란도에서 1시간 이내에 미팅을 끝내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빨리 움직이자고·”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벽란도 횟집에 도착해 조용한 방으로 들어서니 영훈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새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이거 반갑네· 어째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바쁜 게 좋은 거니까요· 앉으시죠·”
“미리 주문했는데 오후 일정이 있어서 술은 안 될 것 같네· 괜찮지?”
“저도 운전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잘 됐구만· 서울은 어때?”
조재민 의원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강렬한 열망이 가득했다·
이제 전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보궐선거 지역이 됐고 경제기사마다 조재민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 좋습니다· 조선소 가격이 조금 비싼 것 말고는 말이죠·”
“거참··· 무진중공업 정 회장이 그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그것 때문에 어찌나 화가 나던지· 전라도 쪽 기자들 다 불러놓고 내가 한바탕 연설을 했다니까! 군산 경제를 파탄 내놓고 저렇게 비싸게 팔려고 한다고 말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열변을 토하니 일단 믿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일 이백억도 아니고 삼천억이나 뛰어올라서 내부적으로 조금 말이 많은 상황이거든요·”
실제 조선소 가격이 1조 원에 해당한다고 하자 굳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냐는 말이 회사 내부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현진물산과 조재민 의원과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로지 경제적인 부분만 해석해서 발언한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의미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허허··· 그렇긴 하지· 다 이해하네·”
조재민 의원은 기업인으로서 충분히 할 만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대충 우는 소리 좀 하다가 지나갈 일일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좀 버겁습니다·”
“응? 뭐라고?”
“삼천억··· 의원님께서는 어차피 정치인이시니 크게 생각하시지 않겠지만 삼전그룹 정도 되는 거대 그룹도 아니고 현금 삼천억을 추가 지출해야 하는 상황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매각주관사인 신영은행을 더 압박하지 그러는가?”
그럴 수가 있었다면 당연히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대외적으로 절대 형준을 흔들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 신영은행은 최대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 상당한 커미션을 얻게 된 능력 있는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얻어야 했다·
“은행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그쪽과 저희와의 거래 조건입니다·”
“끄응··· 그래서?”
“의원님께서 손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소리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마 이 딜을 깨려고 저러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서로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
그래도 일단 상대의 의중을 확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만약 움직이지 못한다면?”
“못하는 것입니까? 안하는 것입니까?”
“까탈스럽군· 좋아 안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어쩔 수 없이 삼천억 더 주고 사야겠죠·”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조 의원은 그렇기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닥쳤다고 느꼈다·
“해봤는데 안 되면 어쩌는가?”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있습니까· 다만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가 문제겠죠·”
“내가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 삼천억 때문에?”
“그깟 삼천억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업의 자금이라고 해도 회사 직원들이 밤낮으로 고생하며 벌어들인 돈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게 써야 하고요·”
“그래서?”
“의원님께서 내 일처럼 뛰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이게 의원님께 손해도 아닐 거고요·”
지금까지 결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던 영훈이었기에 조 의원도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금 기사들을 보면 의원님에 대한 내용이 올라오고 있지만 솔직히 주인공이 의원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둘 다 인수하려는 현진물산에 대한 각종 기사가 넘쳐나는 상황이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당연한 게 의원님께서는 마음에 드십니까?”
주인공 역할이 싫은 정치인이 어디 있을까?
“그럼?”
“딜을 한번 깨보는 게 어떻습니까?”
“깨자고?”
“다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의 품에 안기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작 삼천억 때문에 딜이 깨지게 생겼습니다· 조선소의 부활을 기대하던 군산 시민들은 낙담하겠죠·”
“군산 시민들뿐일까? 전국의 국민이 분노할걸세·”
“그걸 의원님께서 되살리면 어떨까요?”
조재민 의원은 탁자 밑에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3조가 넘게 걸린 이 딜이 깨진다·
그걸 한 정치인이 기어코 되살려 군산 경제를 일으켜 세운다·
이것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을 수 있을까?
다만 이게 어디 말이나 될 스토리인가 말이다·
“그게 되리라고 보는가?”
“삼천억 전부 까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그 절반 정도는 줄이면서 양쪽에 협조를 구하는 식으로 나가면 우리는 그것에 적극 협조할 생각이 있습니다·”
“자네들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무진중공업도 그럴까?”
“의원님과 국민들이 압박한다면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뭐 못하시겠다면 저희도 포기하고 삼천억 더 주겠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러신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조재민 의원은 느꼈다·
영훈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그릇을 증명하라고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 정도 판이 깔렸다면 한 번 더 레이스를 질러봐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해보지·”
영훈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이 생각을 떠올릴 때부터 조 의원이 거절할 거라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이걸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을지가 걱정일 뿐·
“좋은 선택입니다·”
“자네는 이 기상천외한 도박판을 깔아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했나? 고작 삼천억 때문에?”
“말씀드렸지만 고작 삼천억이 아닙니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회사에 현금이 많이 부족하게 생겼거든요· 이면지까지 아껴야 할 판입니다· 천오백억이라면 이 정도 쇼는 벌이고도 남죠·”
영훈은 웃으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이날 오후 기사 하나가 전국을 강타했다·
[(속보) 현진물산 군산조선소 인수 불가 통보]
[내용 없음·]
< 주인이 정해지다(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