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이 정해지다(5) >
현진물산 발 속보가 뜨자마자 포털사이트가 뒤집어졌고 이후 2보 3보를 쏟아내며 관심을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인수 불가가 맞는 것인지 오보가 아닌지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잠시 후 오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정확한 후속 기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후속 기사를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아봤어?”
정호균 회장의 물음에 문태범 사장이 즉시 대답했다·
“일단 계속 연락을 취하고는 있지만 몰려오는 기자들 전화 때문인지 통화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연락을 못 해? 우리가 무슨 식당에 껌 팔러 왔어?”
“가격에 대한 이야기는 신영은행과 직접 대화를 나누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정 회장이 급기야 욕설을 내뱉자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얼른 나섰다·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그냥 없던 일로 해버리시죠·”
정 회장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팔고 싶어서 파는 거였냐? 팔기 싫은데 나만 눈치 보면서 파는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건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도 발을 뺄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명분이 될지 함정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다· 문 사장·”
“네!”
“현진물산이 진짜 발을 뺄 것 같아?”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이번 조선소 인수는 기업과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 아니게 돼 버렸습니다· 이 총리를 비롯해서 거물급 정치인까지 한 발 보탠 인수였습니다· 그냥 물러난다는 건 현진물산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게다가 현진건설이 정부와 척을 져서 좋을 수 없잖아?”
“여기서 이렇게 틀어지면 분명 흠이 남을 겁니다·”
“그럼 현진건설이 일단 튕겼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런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튕기는 방식이 조금····”
“뺨부터 때리고 보네 그치?”
“맞습니다· 얼씬도 하지 말라는 건지 여지를 주는 건지 헷갈리게끔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영은행에서는 뭐래?”
문태범 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이형준 상무 쪽도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쪽도 현진물산과 계속 대화 중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8300억은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너무 평온합니다· 이 상황이면 중간에서 가장 난처한 지경이 신영은행일 텐데 일단 지켜보자는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만 호들갑 떠는 형국이라 이거지?”
“맞습니다·”
이때 비서실장이 들어오며 정호균 회장에게 말했다·
“후속 기사 떴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태블릿을 조작해 최신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현진물산 군산조선소 인수 불가 통보(종합)]
[현진물산이 매각주관사인 신영은행의 군산조선소 결정가격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인수 불가를 통보했다· 신영은행에서 무진중공업과의 장기간 협상 끝에 결정된 8300억은 현진물산이 기존 고려했던 금액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이번 군산조선소 인수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군산조선소의 앞날은 불투명해졌으며····]
“이게 뭐야? 원점으로 돌아가? 이거 기자의 일방적인 논조라고 봐야 해? 이 정도면 뺨을 때린 게 아니라 턱을 돌려버린 거 아니야?”
“속보를 낸 기자와 동일합니다· 현진물산의 언론창구 기자인 셈인데 현진물산의 의중이 백프로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영은행 연결해· 진짜 엎을 건지 아니면 가격을 깎으려고 이 지랄을 떠는 건지 확인부터 해!”
“네 알겠습니다·”
문태범 사장은 즉시 일어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호균 회장은 정근호 사장에게 말했다·
“넌 현진물산으로 가·”
“네? 제가요?”
“그럼 내가 며느리뻘 되는 애한테 굽신거리면서 뺨을 때린 건지 턱을 돌린 건지 확인해야겠냐?”
“아 아닙니다· 제가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가서 송 사장 직접 만나고 와· 송 사장 직접 만나기 전에는 회사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알겠어?”
“알겠습니다·”
정근호 사장도 부리나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나머지는 언론사와 정치권 동향 체크하고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해· 정근호 사장 말대로 이게 명분이 될 수 있다면 지킬 수 있는 건 지켜야지· 안 그래?”
“네 회장님·”
마치 군대처럼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정 회장은 답답한 마음이 영 가라앉지 않았다·
*
“이게 뭐냐? 너 현진물산하고 커뮤니케이션 제대로 되고 있는 거 맞아?”
저녁 8시가 가까울 무렵 신영금융지주 본사·
이세준 부회장은 다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아들인 형준을 불러 앉혔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진짜야? 협상장에 앉지도 않고 인수 불가부터 때렸어· 이건 무슨 의도야?”
아마 형준도 영훈의 연락을 미리 받지 않았다면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어리버리 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그리고 지금도 영훈의 의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맞았다·
‘신영은행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일은 조재민 의원과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커미션은 그대로 받게 될 테니 그 부분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언론에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 흘리시면 안 됩니다· 저 믿으시죠?’
이게 영훈이 한 말이었다·
저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 못 믿겠는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알겠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은행 내부를 단속해야 하는데 가장 난적이 하필 자신의 상관이라는데 있었다·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협상장에 앉아서 조정해야지·”
“협상장에 앉아봤자 답이 안 나올 거라고 예상한 듯합니다·”
“그 ‘같습니다’ ‘예상한 듯합니다’는 네 생각이냐? 아니면 현진물산 측 생각이냐?”
“죄송합니다· 현진물산 측 생각입니다· 협상장에 앉아봤자 답이 안 나올 거라고 합니다·”
“확실해?”
“네·”
“그럼 지네들이 어쩌려고?”
“무진중공업을 갑이 아니라 을의 위치로 격하시켜 협상장에 앉히려는 의도입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허··· 넌 그 말을 어떻게 그렇게 맹신하고 있냐? 저러다 이 딜이 깨지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처럼 느껴졌다·
형준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세웠다·
“딜은 깨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두고 보지 않을 거고요· 지금 제가 중간에 끼면 커미션을 가지고 조정하려고 들 겁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는 나서지 않을 겁니다· 가격 조정은 오로지 커미션을 제외한 순수 매각금액에서 움직이게 하겠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깨지면?”
함정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딜을 받지 않으면 당장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짐도 알고 있었다·
이건 안 받을 수 없었다·
“자리 내놓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세준 부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이구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아무렴·”
그는 형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고 형준은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이었다·
형준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하게 될 마석대 부행장이 바로 그였다·
“아이고 왔구만·”
마석대 부행장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이세준 부회장은 형준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앉아· 뭘 그렇게 오래 고심을 해?”
“원래 월급쟁이는 이런저런 고민을 해야 할 게 많습니다· 부회장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하하하 나도 고민 많아· 오늘 뉴스 봤지?”
“네· 나라가 그것 때문에 떠들썩하니까요· 그런데 이분은···?”
“어 인사해· 여기는 내 아들이자 이번 군산조선소 딜을 담당하고 있는 이형준이야·”
“오~ 반가워요· 나 마석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전략기획팀 이형준 상무입니다· 오늘부터 근무하시는 겁니까?”
이세준 부회장이 대신 답했다·
“내일 인사공고 날 거고 모레부터 출근할 거야·”
“아··· 그렇군요·”
마석대 부행장은 형준을 보면서 감탄한 듯 말했다·
“아주 훤칠하시군요· 회장님의 손자 사랑이 그렇게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우리 아버지가 형준이를 많이 아끼긴 합니다·”
“잘 생기기만 했다면 모르겠는데 능력도 대단하니 회장님이 아주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이번 군산조선소 매각 프로젝트는 외부에서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 취임은 안 했지만 곧 출근할 예정이니까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맞지요?”
형준은 곤란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담담히 말했다·
“원만하게 처리될 예정입니다· 저 자세한 사항은 아직 외부인 신분이시기 때문에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형준의 말에 마석대 부행장이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아··· 궁금한데 이거 참···· 하루 일찍 출근할 수도 없고····”
“하하하! 이 녀석 봐· 내 아들이지만 이런 면이 있다니까·”
“은행원이라면 이렇게 철저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아들 두셨습니다·”
“이뿐인가? 조금 전에는 이번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전략기획팀 상무직까지 내려놓겠다고 하지 뭐야· 대단한 놈이지?”
“아··· 정말 그랬습니까?”
마석대 부행장이 놀란 표정으로 형준을 본다·
어차피 마석대 부행장이 이 자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형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허···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전 솔직히 1시간 전만 해도 사태가 꽤 복잡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아 지금쯤 한창 뉴스가 나올 때인데····”
“형준아 TV 좀 틀어 봐라·”
형준은 벽면에 설치된 TV를 틀어 8시 뉴스로 채널을 바꾸었다·
마침 군산조선소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리포터가 묻자 군산 시민이 대답했다·
“이제 좀 나아질까 싶었는디 갑자기 요래 되부러서 너~무 실망스럽고 아쉽습니다·”
“보시다시피 군산 시민들은 참담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멈춰져 있던 조선소가 가동될 날만 꿈꿔 왔는데 다시 그 희망이 사그라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MBS뉴스 박종찬입니다·”
화면이 넘어가고 아나운서가 다음 꼭지를 이어갔다·
“이번에 현진물산이 인수 불가를 통보하면서 가장 실망한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조재민 의원이었습니다·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군산조선소 매각에 가장 앞장섰던 조 의원을 만나봤습니다· 김원중 기자?”
조재민 의원이 아무도 없는 조선소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적막한 조선소를 바라보는 조재민 의원 그는 지금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 화면은 인수 불가 사건이 터지기 전 촬영한 것이었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화면이 바뀌고 의원실에서 조재민 의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시민들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상황은 아닙니다·”
“현진물산이 다시 협상장에 앉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가격이 문제라면 제가 직접 중재하겠습니다· 제가 중재해서 무진중공업과 현진물산 둘 다 협상장에 앉혀 놓도록 할 것입니다· 국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이세준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영웅놀이 하는 건가?”
마석대 부행장이 웃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황이 재밌게 됐네요· 어지간한 정치인이면 감히 겁나서 저런 소리를 못할 텐데···· 아무래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저런 무식한 짓을 하려고· 형준아 넌 아니?”
“협상이 마무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준은 이미 알고 있는 척 대답했지만 사실 그도 속으로는 당황하는 중이었다·
조재민 의원과 현진물산이 알아서 할 거라고 했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저렇게 무식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재민 의원에게 이 상황은 어쩌면 천재일우의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다·
이건 애초부터 기획된 것이니 결과는 정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영훈이 처음부터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말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뭘 알고 있는 거야?”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지켜보고 있으면 됩니다· 딜이 깨지면 제가 책임질 겁니다·”
형준은 그제야 마음 편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주인이 정해지다(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