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이 정해지다(6) >
아버지 앞에서는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사실 형준은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조재민 의원과 영훈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이지만 혹시 뭐 하나라도 잘못되면 자신은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준은 저녁도 거르고 곧장 블루문부터 찾았다·
“술은 그냥 깔아두고 일단 라면이나 두 개 좀 끓여와· 고춧가루 팍팍 넣어서·”
“알겠습니다·”
배부터 채우려는 생각에 술은 따지도 않고 라면부터 후루룩 해치우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강주현 전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식사했어요? 여기 라면 괜찮은데·”
“전 괜찮습니다·”
“하긴 나이도 있으신데 좋은 거 드셔야지·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했어요?”
강주현 전무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석대 부행장은 주로 쉴 때 골프를 즐겨 한다고 합니다· 출장을 가도 항상 골프채를 놓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골프광이군·”
“맞습니다· 그래서 마석대 부행장이 취임한 뒤 몇 번 골프모임을 가져볼까 합니다· 여자는 우연히 만나는 걸로 해서···· 일단 만나 보시겠습니까?”
“불러와요· 아 사진만 보내줘요· 여기에 부르지는 말고·”
형준은 괜히 여자를 불렀다가 혹시나 영훈과 맞닥뜨릴까 싶어 얼른 말을 취소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엮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관계를 진행 시킨 다음 증거를 잡아서····”
“으음····”
강 전무는 말을 하다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의 형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식상해요· 너무 뻔하잖아· 솔직히 젊은 여자가 갑자기 접근하면 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그 나이라면 더 그러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지만 젊은 여자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너무 뻔해요·”
형준은 자신에게 얼마 전 벌어졌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로 접근시켜 자신을 감시하게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한데 너무 비슷한 상황이라 이번 계획이 꼭 걸릴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 여자··· 그냥 용돈벌이 하는 거래요? 아니면 집이 좀 어렵나?”
“들어보니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빠졌다고 합니다· 빚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럼 아예 대놓고 밀어줍시다·”
“네?”
“가족은 미국에 있고 혼자 외로울 거 아니야· 그냥 룸싸롱에 데리고 와서 붙여줘요· 어설프게 수작 부리느니 차라리 대놓고 술집 여자라고 하면 의심할 게 뭐 있겠어?”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니 사진을 찍거나 해서 망신을 줄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둡시다· 아예 정분나도록·”
강 전무는 형준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 그냥 옆에 계속 두자는 거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언제고 계속 써먹을 날이 올 테니까요· 대신 돈은 꽤 많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여자 돈 필요하다니까 오히려 잘 됐지· 그냥 용돈벌이나 하려는 여자는 중간에····”
여기까지 말했을 때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영훈을 안내하며 들어왔다·
“어? 이분은···?”
“어~ 인사해· 여기는 우리 회사 강주현 전무· 내가 최고로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여기는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 요즘에 거의 뭐 내 소울메이트나 다름없지·”
강주현 전무가 일어나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주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영훈입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아니야 아니야· 강 전무랑 할 이야기 다 했어· 이제 그만 가봐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그렇게 강 전무가 나가자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웬일입니까? 술도 안 따고 여자도 없고?”
“인마 상황이 이런데 내가 지금 술이 넘어가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오늘 내내 심장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무슨 엄살을 그렇게 떠십니까?”
“엄살이 아니라 다 된 계약을 엎겠다는데 내가 안 놀라겠냐고·”
“그래서 미리 연락드렸잖아요· 깨질 거니까 놀라지 말라고·”
“네 전화 받고 이미 놀랐어·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오늘 뉴스 보니까 아주 가관이던데· 진짜 조재민 의원 때문이야?”
“조 의원 때문이기도 하고 돈 때문이기도 합니다·”
“삼천억?”
“네·”
“하··· 그게 아까워서? 여기서 더 깎아도 기껏해야 천억에서 이천억인데?”
“이천억 마련하려면 현진건설이 가지고 있는 하남 땅을 팔아야 합니다· 지금이야 큰 가치가 없지만 언제고 개발이 들어갈 땅이에요· 지금 팔면 헐값에 처분해야 합니다·”
“그게 아까웠다? 그래서 저렇게까지 했다고?”
“그럼 커미션 깎아줄 생각 있습니까?”
“그건····”
역시나 형준이 말을 흐린다·
“상무님 생각해서 일을 키운 거예요· 저한테 고마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면 일단 협상장에 앉아서 커미션부터 칼을 댔을 걸요?”
“그건 알지····”
“그거 안 하려고 조재민 의원을 움직이게 한 겁니다· 뭐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뭔데?”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누구 하나는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이 완전히 틀어지면 차기 총선을 생각해야 하는 여당도 불리해지죠· 그럼 결국 해결될 일인데 조재민 의원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해봤다는 거네?”
“시험이라고 하기는 그런데····”
“그게 시험이지·”
“뭐 그렇다고 치죠·”
조재민 의원의 사주를 알고 있기에 그가 앞으로 얼마나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으며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막말로 그가 그렇게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가 자신과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자신의 사주를 봐야 하는데 그건 이미 예전에 잊어버렸다·
더 정확히는 억지로 기억에서 지웠다고 하는 게 맞았다·
어쨌든 그렇기에 조 의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진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잘할 것 같아?”
“뉴스 보니까 생각보다 열심히 하던데요?”
“그렇긴 하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늦어도 일주일 안 갑니다· 그 전에 여론 뒤집을 테니까 가만히 지켜보세요·”
“그래야 해· 오늘 마석대 부행장이 왔어· 모레부터 출근한다고 하더라고· 씨발··· 이제는 날 보는 눈빛이 달라지셨어·”
“아버지요?”
“그래· 눈빛에서 적대감이 느껴져· 위기감이 드시는 것 같아· 저러다 진짜 어디 암살자라도 보내는 거 아닌가 싶다니까·”
“걱정이 과하십니다·”
과하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영훈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세준 부회장은 불타는 여름에 하늘 끝까지 치솟은 나무와 같은 사주를 타고났다·
그와 같은 사람이 일단 경쟁자라고 느끼면 다른 나무의 영양분을 혼자 다 섭취하듯 빨아들여 주변을 죽여 버린다·
물론 이건 이형준의 사주와도 비슷했다·
그 둘이 만났으니 불꽃이 튀지 않을 수 없다·
누구 하나는 한국을 떠야 이 싸움이 마무리될 게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어느 정도면 만족할 거야?”
“절반· 삼천억에서 서로 공평하게 절반씩만 양보하면 협상장에 앉을 수 있습니다·”
“뭘 다 정해놓고 협상장에 올라·”
“원래 이런 거 할 때는 미리 다 정해놓고 형식적으로만 하는 거 아닙니까?”
“누가 그래?”
영훈은 속으로 드라마랑 소설에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입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보통 다 그러던데요?”
“이건 다르지· 어쨌든 현진물산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겠어· 알고 나니까 나도 좀 마음이 놓이네· 술 한잔 하고 갈래?”
“약속 있습니다·”
“또 데이트? 이럴 거면 그냥 결혼해서 귀가를 해·”
형준의 미간이 확 찌푸려지자 영훈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
하루가 지나고 무진중공업 본사 사옥 앞으로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정문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찰칵! 찰칵!
“의원님 한 말씀만 해주시죠·”
“정호균 회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신가요?”
세단에서 내린 조재민 의원은 달려드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저 ‘진심을 다해 설득해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전부 생중계가 되는 황당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응은 어때?”
둘만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 의원이 김시원 보좌관에게 물었다·
“어제 기사 댓글이 벌써 1만 개가 넘게 달렸습니다· 다들 의원님께서 이번 인수 협상을 다시 돌려놓기를 바란다는 댓글이었습니다·”
“후··· 정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무작정 뻗댈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르지· 이 정도 기업의 총수면 남들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아·”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조 의원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나 정호균입니다·”
“아이고 회장님· 이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정 회장이 살짝 당황할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의원님께서도 곤란하시겠지요· 일단 앉으시죠·”
조 의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저도 그렇지만 회장님도 곤란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졌지 않습니까· 서로 양보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 조선소는 우리 무진중공업의 미래였습니다· 사실상 눈 뜨고 빼앗기는 형국인데 그것도 헐값으로 팔라고 하면 우린 억울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그 미래를 지금까지 사실상 방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가격이 나올 수 없었겠지요· 그러니 조금 더 양보하시지요·”
정호균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3백억은 우리가 양보하겠습니다· 8천억· 그 이하는 안 됩니다·”
현진물산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다·
조 의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회장님 이 딜이 어그러지면 난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합니다·”
“의원님의 공약이라서 신경을 쓰시는 건 알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선거에 큰 영향은 없을 텐데요?”
고작 군산시장이 골인 지점이라면 그게 맞겠지만 조 의원이 바라보는 곳은 군산시장이 아니었다·
군산시장은 그저 경유지에 불과했다·
“일을 어렵게 만들고 계시는군요·”
정 회장은 잠시 조 의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로 빙빙 돌리지 맙시다· 이봐요 조 의원님· 나 아버지 밑에서 30년을 넘게 굴러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오· 살아남기 위해 형제들끼리 치열하게 싸워서 가진 게 바로 이 무진중공업인데 누가 내 걸 헐값으로 가져가려고 한단 말이오· 좋아· 회사를 경영하다가 선택을 잘못해 상황이 이
렇게 됐으니 내 잘못이 큰 건 인정 못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헐값에서 또 후려치려고 들면 내 자존심이 인정 못 하지· 설사 빤스 바람으로 쫓겨난다고 해도 이대로는 물러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소?”
조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리를 꼬면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전북대병원 건립사업이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토지보상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인데····”
정 회장의 눈빛이 흔들린다·
조 의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곤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왠지 이번 인수협상이 잘 되면 전북대병원 건립도 탄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단 말이에요· 건립예산이 대략 1800억 정도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그냥 후려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거절하지 말아요· 이건 내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입니다· 이거 거절하면 당신네들 지금 나랑 한번 싸워보자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기업인이 정치인이랑 싸워서 득 될 거 있겠어요?”
“음····”
“사흘 드립니다· 사흘이면 자존심 충분히 세웠을 테니까 협상장에 나오도록 하세요·”
조재민 의원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호균 회장이 따라 일어서자 그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말했다·
“바둑 좋아해요?”
“좀 둡니다·”
“궁하면 적에게 기대라 했습니다· 외로울 때는 같이 가야 살 수 있어요· 독불장군처럼 홀로 싸우면 언제고 쓰러집니다·”
“허허··· 잘 알겠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그렇게 웃으며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 주인이 정해지다(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