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을 타려는 사람들(3) >
그 시각 군산 앞바다에 위치한 횟집 벽란도에는 조재민 의원과 이형준 상무가 회를 곁들이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선거운동 시작하셨는데 술 드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조재민 의원이 입은 주황색 점퍼에는 여당을 뜻하는 기호 1번과 이름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괜찮아요· 딱 두 잔만 마실 거니까·”
“왜 하필 두 잔입니까?”
“이번 협상에 큰 공헌을 세운 이형준 상무가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한 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한 잔만 마시면 사람이 정이 없잖아· 세 잔을 마시면 얼굴이 달라지니까 딱 두 잔이 적당해요·”
“그래도 두 잔이라도 같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군산은 요즘 어떻습니까?”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지요·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마무리되면 이제 곧 조선소가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니 부동산이 벌써부터 들썩거립니다·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했던 기술자들이 기존에 유지되고 있던 노조에 가입하려고 엄청나게 전화를 한다고 해요·”
“다행입니다·”
“다행이긴 한데··· 요게 잘 다뤄야지 안 그러면 말썽이 될 수도 있어요· 기존에 일했던 인원 전부 고용하기는 쉽지 않을 테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많을 테니 또 여러 가지 소리가 나올 텐데 이게 참 어렵단 말이지요·”
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선거보다 그게 더 어려우시겠습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실 난 지금 선거운동 한다고 나가서 시민들과 악수하고 뭐 이럴 필요가 없어요· 이제 군산 유권자들 중에서 내 얼굴 모르는 사람 몇 없으니까· 시장이나 시내 돌아다니면서 악수하면 다들 그래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군산조선소 제대로 해결하라고· 인수가 결정되고 나서도
그럽니다· 여기 시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군요·”
“그래요· 조선소는 돌아갈 테지만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에 인수되고 나서도 난 여기서 계속 현진물산 해주조선해양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용률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게··· 아주 골치가 아파요·”
“그래도 잘 해내셨지 않습니까· 솔직히 전 의원님께서 무진중공업 정 회장을 설득한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양반이 공짜로 양보했겠어요? 내가 전북대병원 건설 맡긴다고 하니까 억지로 양보하는 척한 게지·”
이 이야기는 형준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눈을 크게 떴다·
“그랬습니까? 공사 규모가···?”
“대략 1800억 정도가 되는 걸로 알아요· 그러니 계산이 섰겠지· 무진중공업에서 손해본 거 무진건설이 만회할 걸 생각하면서 위안 삼지 않았다면 그 양반이 쉽게 양보했을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쉽게 협상장에 나타나서 저도 놀랐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많이 뛰었지만 신영은행도 고생했어요·”
“우리가 무슨 한 일이 있겠습니까· 전부 의원님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풀어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나 혼자서 다 하려고 했으면 여론이 쉽게 움직였겠어요? 국내 손꼽히는 대형은행에서 협상을 이끌어 내려고 했으니까 일이 수월했지·”
형준은 계속 얼굴에 금칠을 해대는 조 의원을 보며 뭔가 바라는 게 있음을 알아챘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아까도 말했지만 군산조선소 인수가 확정되긴 했어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였어요· 그중에 가장 급한 게 바로 우리 시민들 경제사정이지·”
“그렇겠죠·”
“장사해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재벌 3세 장자로 태어났는데 장사를 해봤을 리가·
“우리 어머니가 우리 삼형제를 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키우셨어요· 음식 만드는 재주가 있으셨는지 곰탕을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됐지요· 그때 어머니는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싶어 돈을 모아 좁은 가게를 넘기고 큰 곳으로 옮기셨지· 그런데 웃기게도 큰 곳으로 옮겨서 장사를 하니 희한하게 손님이 줄어들
기 시작했던 말이오· 참 이상도 하지·”
“···”
“매달 들어와야 할 돈이 줄어들고 빚은 늘어만 갔지요· 그렇게 한 삼 년에서 사 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그만 병으로 누우셨어요· 하루하루가 고통이셨던 게지·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형님께서 어머니에게 음식을 배우고 가게를 다시 일으키셨어요· 형님이 가게를 일으켜서 내 학비를 대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요·”
“그렇군요·”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하다가 지금까지 일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가정은 굉장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지요·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해요·”
긴 썰을 풀어대는 걸 보면서 대략 무슨 부탁을 할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도와드리고 싶지만···”
“무조건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적어도 군산조선소에 다시 근무하게 될 사람들은 기존 대출이 있어도 추가로 저리 대출을 지원해줬으면 좋겠어요·”
기존에 대출이 없는 사람이라면야 취직을 한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는 게 뭐가 문제일까·
물론 신용대출이라는 것도 1금융권에서는 그 벽이 상당히 높긴 하지만 이런 특수상황에서는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문제는 기존에 대출이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추가 대출을 해주는 거였다·
아마 담보도 없을 테고 그저 군산조선소에 입사한 것으로 추가 대출이 나가야 한다는 것일 텐데 그렇게 되면 은행에서 상당한 부담을 져야 한다·
만약 군산조선소를 운영하게 될 해주조선해양이 무진중공업처럼 큰 위기를 겪어 직원들을 감축하게 된다거나 다시 조선소 가동을 중단하게 되면 그 엄청난 추가 대출이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올 거다·
형준은 고심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말이군요?”
“현진물산 측의 이번 인수 때문에 우리가 지원해야 할 금액이 조 단위입니다· 기업금융도 아니고 이 정도 규모의 가계대출이 나가게 되면 위험부담이 엄청납니다·”
조 의원은 두 번째 술을 잔을 따르고는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당신들 은행가라는 사람들은 말이야·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경향이 있어·”
말투가 달라졌다·
형준은 긴장했고 조 의원은 말을 이었다·
“한때 카드사태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신용불량자 때문에 겁먹고 있는 건 아는데 그 때 이후 지금은 가계대출에 대한 연체율이 극히 낮은 걸로 알아· 맞나?”
“그렇기는 하지만···”
“1금융이 그렇게 벽을 세우니까 사람들이 케이블 광고에 나오는 러쉬 산와 따위의 사금융을 쓰는 거지· 그 사람들이라고 이자율이 높은 거 모르겠나? 한번 쓰면 신용등급 떨어지는 거 모르겠어? 인생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효율적으로 살아지던가? 잘 다니던 회사에서 짤렸는데 큰돈이 들어가야 하면? 집주인
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면? 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생기면? 그리고 그게 하필 가장이면?”
“···”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네는 인생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드라마라고 생각하겠지만 자네 주변의 엑스트라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야· 그 고통을 가지고 숫자로 판단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이지?”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만약 일반적인 정치인의 부탁이었으면 거절하는 게 맞다·
문제는 하필 조재민 의원의 부탁이라는 데 있었다·
조재민 의원은 최영훈 과장의 픽이다·
최영훈 과장이 찍은 정치인과 척을 진다?
페널티 박스까지 공을 잘 끌고 와 놓고 골문 앞에서 헛발질을 하는 격이다·
적어도 최 과장과 전화 찬스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여기서 물러나서 전화 좀 하겠다고 하는 순간 자신은 신영은행에서 전권을 가지지 못한 일개 직원으로 격이 떨어질 거다·
그럴 수는 없다·
“후··· 알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결국 레이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패를 까지도 못하고 죽으면 도박판이 끝나기도 전에 교체당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해주조선해양 거래 은행을 신영은행으로 바꿔 달라고 최 과장에게 요청하면 그나마 부담은 조금 줄어들 수 있을 거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의 거제조선소 이 두 군데서 일하는 직원만 수천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사람들의 급여통장과 연금 등 재테크 관리를 신영금융그룹이 관리하는 건 결코 적지 않는 가치다·
“조건? 음··· 들어보지·”
“들어보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이건 거래입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주셔야 하지요·”
“훗 그래· 조건 말해보게·”
“조건은 하납니다· 제가 의원님을 도와드린 것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끝인가?”
“맞습니다·”
조 의원은 고개를 치켜들고 형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모로 꼬면서 물었다·
“언제고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내가 만약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최영훈 과장이 믿은 정치인이 바로 의원님입니다· 저 역시 최 과장을 믿고 최 과장도 저를 믿습니다·”
“허허··· 그러니까 서로 어깨동무하고 있으니 같이 가자 이 말이지?”
“맞습니다·”
“흐음··· 알겠네·”
조재민 의원은 형준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뭐 후달리는 거라도 있나?”
“모르지요·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렇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라네·”
조재민 의원은 흡족하게 웃었다·
*
6시가 되자마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한 영훈과 연희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해운대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노석춘 병원장에게 만나자고 전화하고 싶었지만 급할 게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치킨과 맥주로 배를 채웠다·
좋은 호텔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치킨과 맥주를 먹고 있지만 그저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만약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시나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걱정돼요?”
연희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물었다·
그녀는 부산으로 내려오는 내내 말없이 영훈의 옆을 지켰다·
그녀 성격상 많이 궁금했을 텐데 눈치나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이 가긴 했다·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냥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요· 나도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를 정도로요·”
“원망하지는 않아요?”
“엄마요? 아니요· 전혀··· 난 내 운명을 알고 있어요· 엄마도 알았겠죠· 내가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아마 내가 엄마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혼자서 많이 힘들었잖아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걸 보고 연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어요?”
“조금 웃겨서요· 사실 당신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모르지 않아요?”
그녀에게 산속에서 어떤 고통을 겪어 왔는지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산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고 했을 뿐·
신을 받지 않기 위한 그 기나긴 몸부림을 설명한다는 게 사실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긴지 당시에 정신착란을 겪었던 게 아니었는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다·
더군다나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뭐··· 당신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아니에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고통보다는 더 심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난 원망하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내면에서는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러워
요·”
연희는 영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나? 그쯤일 거예요·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울 때였죠· 날 외국으로 쫓아낸 할아버지와 아빠· 또 그런 상황을 막아주지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런 원인을 자초한 나까지··· 그냥 다 미웠어요· 사는 게 너무 짜증나고 싫었어요· 그때 어떻게 버텼는지 알아요?”
“어떻게 버텼는데요?”
“잤어요· 억지로 자려고 노력했고 잠이 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졸린 책을 찾아서 읽으며 잠에 빠졌어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저녁에 했던 오만가지 나쁜 생각들이 괜히 유치한 생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후후···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자라는 겁니까?”
“맞아요· 오늘은 조금 일찍 자요·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첫날밤의 극적인 긴장을 위해 자리를 비켜줄게요· 뭐··· 원하면 옆에 있구요·”
“아닙니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누워야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잘 자요·”
연희는 영훈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곤 방을 나갔다·
영훈은 그녀가 나간 뒤 한참 동안 깜깜해져 보이지 않는 창밖 밤바다를 바라보다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조식을 먹고 연희와 백병원으로 출발한 둘은 곧바로 노석춘 병원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전에 만났을 때처럼 노스님을 보는 것처럼 정중하게 영훈을 맞이하고는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명을 쓰지도 않았고 주소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이 맞다면 주소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가정집이 아니었습니다·”
“네? 그럼요?”
“연화당이라고···”
“연화당이요?”
< 줄을 타려는 사람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