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판을 바꾸다(3) >
영훈이 형준과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민희는 기획조정실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부서들은 그렇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기조실에는 여직원이 없어서 그런지 민희는 마치 여학생이 몇 없는 공대에 입학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특히 오늘은 연희가 마케팅 관련 업무 교육에 참석한다고 종일 부서를 비우는 날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오늘 주인공은 민희 씨니까 메뉴는 민희 씨가 고르세요·”
“김 과장은 파스타 같은 것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기조실의 넘버 2나 다름없는 박병호 부장의 말에 민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 한식 매니아예요 부장님·”
“그럼 좋지· 그럼 무난하게 김치전골 어때?”
“완전 좋아해요· 혹시 고향마루?”
“어? 그 집 알아?”
“그럼요~ 저 완전 좋아해요·”
“오케이! 가자고·”
호탕한 박 부장이 직원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박 부장과 민희가 붙어 걸어가고 나머지 직원들은 조금 떨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상무님은 어디 가셨나?”
영훈이 나갈 때 인사까지 했으면서도 물어보는 건 그 ‘어디’가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네·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나가셨어요·”
“급한 일?”
“네· 저도 어떤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구요· 오늘 점심 같이 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많이 미안해 하셨어요·”
“에이~ 상무님이 뭐 놀러 나가셨을까· 그런 사족 붙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어·”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정말 아쉬워 하셨어요·”
“그럼 고맙고· 그런데 상무님이 요새 어떤 일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어?”
“네? 아니요 저도 잘···”
“우리 부서가 좀 그래· 일을 막 찾아서 한다기보다 경영자의 의중이 담긴 일을 맡아서 진행하는 경우가 있거든· 그게 아니라면 회사의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키가 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무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하거든·”
“네··· 맞는 말씀이세요·”
“나중에 상무님께서 따로 말씀해주시겠지만 그래도 상무님이 요새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좀 편하지 았겠어?”
“그렇긴 한데 정말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아!”
민희가 뭔가 떠올린듯하자 박병호 부장이 걸음을 멈춘다·
“뭔데?”
“영업팀이 가져왔던 Nodri Clare 브랜드 아시죠?”
“그럼 알지· 그것 때문에 민희 씨가 영업팀 노 과장 밟았던 걸로 한동안 회사가 떠들썩 했거든·”
“어머 그랬어요?”
“아 뭐 밟았다는 게 꼭 나쁜 뜻이 아니라 그 만큼 비서실에서 힘을 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지· 그런데 그걸 계속 신경쓰시고 있다고?”
“그런 것 같아요·”
“그걸 왜?”
박병호 부장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영훈이 어떻게 기획조정실 상무로 오게 됐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영투자증권으로부터 주식을 가져온 것부터 현진건설과 현진관광은 물론이고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의 인수를 주도한 사람이라는 것에 처음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만약 강노식 전 실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회사에서 투자한 반도체 회사 역시 최영훈 상무의 결정이었다고 하니 지금 회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런 최 상무가 회사 인수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이 아니라 고작 연매출 몇 백억 따위의 명품 브랜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와 업무 내용에 대해 협의를 하시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고마워· 좋은 이야기 해줘서 내가 한결 마음이 가볍네·”
박 부장이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업무지시가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나마 최 상무 머리에 뭐가 주요 아이템으로 들어가 있는지 알았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린 것이리라·
점심에는 젊은 직원들이 민희 옆에 앉아 이번에 새로 온 최영훈 상무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업무 스타일이 어떤지 대화 스타일이나 보고서에서는 어떤 점을 중시하는지 등등 끊임 없이 질문을 해와 민희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입을 열어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민희는 그게 귀찮다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회사 내 최고 엘리트들이 모이는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고 계속 호기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직원들은 종종 민희에게 도와줄 일이 있냐며 다가왔을 정도였다·
너무 한가해서 문제일 정도였기에 민희는 영훈이 없을 때 각종 업무를 배워가며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잘 했어요?”
영훈은 2시가 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
“네· 다녀오신 일은 잘 되셨구요?”
“네· 일단 회의실에서 박병호 부장님 좀 뵙자고 해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오전에 직원들과 정식으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긴 하지만 아직 업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강노식 실장이 업무적으로 인수인계할 내용이 없었고 앞으로 모든 업무를 새로 시작할 것이기에 직원들은 현재 전부 일에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훈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박 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영훈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상무님이 안 계셔서 아쉬웠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앞으로 같이 하게 될 일이 많을 겁니다· 강 실장님이랑 일하실 때 어떠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자리에 이렇게 빨리 앉게 될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사한지 1년도 안 된 어린 놈이 상무자리에 떡하니 날아왔으니 적어도 심기가 불편하기는 할 텐데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사내정치에 익숙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일만 잘하고 사고만 안 치면 뒤에서 욕을 백 번 천 번 한들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네요· 음··· 총선이 끝나고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되면 많은게 바뀌게 될 겁니다· 회사 이름부터 현진물산을 중심으로 한 그룹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지분이동도 있어야 할 거구요·”
“맞습니다·”
“우리는 그룹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담당합니까?”
그는 그룹 지배구조에 관한 전략을 짜는 것이야 말로 기획조정실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부사업부 고승현 상무님이 전담해서 처리할 겁니다· 부사장님도 그 부분에 도움을 주실 테구요· 우리가 왜 그 일에서 빠져야 하는지 궁금하실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납니다· 전 그런 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 관심도 없거든요·”
“이 일에서 빠진다는 건 사내 권력의 핵심 업무에서 빠진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건 곧 사내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꿈보다 해몽이 너무 좋은 편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일을 준비하면 될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남의 일이 되었다·
안 그래도 한가한 상황인데 월급은 월급대로 받아가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만은 없다·
“Nodri Clare라고 아시죠?”
오늘 민희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된 거지만 설마 이 아이템을 정말 꺼내들지는 몰랐다·
그래도 영훈이 오기 몇 시간 동안 파악한 것이 있기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네· 영업팀 노형석 과장의 주도로 영국에서 들여온 명품 브랜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장력이 상당하고 브랜드 이미지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견고한 매니아 층을 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장기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많이 아시네요?”
“우리 회사 상품이니까요·”
박병호 부장은 속으로 김민희 과장에게 나중에 커피라도 한잔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Nodri Clare의 매출이 인상적이던가요?”
박 부장은 영훈이 질문한 의도를 바로 파악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실되게 밝히는 게 좋다고 여겼다·
“미래는 긍정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매출은 미미합니다· 이번에 그랜드 백화점과 입점계약을 맺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연 매출이 백억 단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백억만 넘겨도 선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매출이 그 정도면 마진은 더 볼게 없습니다· 최소한 3 4년
이상은 꾸준히 밀어줘야 의미있는 매출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 의미있는 매출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요?”
“최소 천억 단위를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 4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한국입니다· 한국이 가장 먼저 들여왔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죠? 영국에서 발생한 브래드지만 아직 영국 매출도 3천억을 조금 넘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생브랜드 치고는 괜찮은 편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봅니다·”
영훈은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박 부장이 마음에 들었다·
“중국에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요?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되기는 할 겁니다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고급 브랜드라서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형태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지··· 그리고 본사에서 우리한테 중국 입점에 대한 전권을 다 내줄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Nodri Clare 본사가 챙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다면 상당한 매출 상승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분간 우리 직원들은 Nodri Clare 인수에 주력합니다·”
“네? Nodri Clare를 인수하겠다구요?”
“맞습니다·”
“어··· 금액이 싸지는 않을 겁니다·”
현진관광을 인수한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고 고작 몇 주 전에 군산조선소를 인수했다·
해주조선해양은 아직 도장도 찍지 않았고 한창 인수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회사를 인수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알고 있습니다·”
“부채비율도 높구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실위험 때문에 대출이 힘들 겁니다·”
“대출은 가능할 겁니다· 그게 안 된다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박 부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인수 가능여부와 적정가격 그리고 저쪽에서 얼마를 원하는지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요·”
“고맙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요· 그런데··· 중국 진출에 확신이 있으셔서 인수를 결정하신 것 맞습니까?”
“맞아요· 인수를 확정짓는 동시에 우리는 중국으로 들어갈 겁니다· 인수 과정에서 부족한 자금이 있다면 중국 자금을 공동투자 형식으로 받아 진출할 수도 있어요· 물론 이 비율은 최대한 낮춰볼 생각이지만 그건 인수가격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박병호 부장은 강노식 실장이 부사장으로 영전하며 앞으로 회사 생활이 재밌어질 거라는 말을 남긴 것이 떠올랐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기조실 직원들과의 회식이 끝나고 사흘 뒤 영훈은 형준이 알려준 주소를 찾아 움직였다·
신영금융지주 이경호 회장과의 만남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급했는지 빨리도 약속을 잡았다·
을지로의 한 고급 한정식집에서 만난 이경호 회장은 상이 참 좋았다·
“자네가 그 친구군· 만나서 반갑네·”
눈썹이 가지런하고 진하며 전체적으로 살집이 많아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초년 중년 말년의 구분 없이 대체적으로 별다른 큰 근심 걱정이 없을 팔자라고 할까?
그 가운데 둥글고 큰 콧망울에 콧구멍이 보이지 않아 한번 들어온 돈은 꽉 움켜잡을 상이었다·
“최영훈입니다· 현진물산에서 기획조정실 상무를 맡고 있습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이 회장이 감탄했다·
“기조실 상무? 우리 애한테 듣자니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던데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우리 형준이가 자네를 만나면서 생각을 많이 바꿨다고 했네· 참 고마우이·”
이 회장이 옆에서 그저 미소만 머금은 채 가만히 있는 형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필사적으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했나보다·
그렇게 서로간에 기본적인 대화가 오가고 난 뒤 에피타이저로 나온 전복죽을 한 숟갈 음미한 이경호 회장이 말했다·
“그래 나와 한번 만나고 싶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나를 만나고자 했는가?”
“다름 아니라 이형준 상무가 고민이 깊은 것 같은데 많이 예민한 문제라 혼자서 속을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회장님을 뵙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응? 우리 형준이가 홀로 속을 끓인다고? 왜? 뭐 때문에?”
“아무래도 부회장님께서 이형준 상무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준이가? 세준이가 무슨 오해를 해?”
“오해를 하지 않고서야 이형준 상무 몰래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이형준 상무 이름으로···”
“그게 무슨···”
이경호 회장이 놀란 것 만큼이나 이형준 상무도 놀랐다·
이걸 설마 이경호 회장 앞에서 터뜨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간판을 바꾸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