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판을 바꾸다(4) >
이형준 상무는 너무 놀라 눈이 벌게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미친새끼!’라는 고함을 억지로 삼키며 가까스로 침묵을 지켰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
무슨 연유로 저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손발은 맞춰야 한다·
“이형준 상무가 마침 우연찮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페이퍼 컴퍼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걸 만들 이유가 없으니 누군가 몰래 그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형준이 애비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저도 이상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과정을 역추적해보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세준 부회장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개인정보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이경호 회장은 손바닥으로 식탁을 때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몇 안되는 사람 중에 다른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게 당연한 논리 아닌가? 내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영훈은 그의 말을 끊었다·
“마석대 부행장이 은밀히 부회장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형준 상무의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서요· 그런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어찌 된 것이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죠·”
“···”
이경호 회장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으로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은밀하게 이 상황을 알아보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아들에게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는 아버지가 있을까 싶거든요·”
“그게 가장 논리적인 가정 아닌가?”
“맞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공교롭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계좌가 하필 이형준 상무가 자리를 비운 2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홍콩에서 열렸고 그때 홍콩에 있었던 직원들을 전수 추적한 결과 이세준 부회장의 개인비서가 홍콩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거든요·”
이 회장이 형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게 맞는 이야기냐?”
“네··· 어제 확인한 내용입니다·”
어제 알아낸 사실을 영훈에게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분노에 떨었던가?
그럼에도 그게 완벽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홍콩에는 그 외에도 상당수 직원들이 업무차 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경호 회장은 영훈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부족한 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검찰에 고발이라도 해야 할까요?”
“···”
이 내용을 검찰에 흘리는 순간 신영금융그룹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언론에서는 온갖 의혹을 제기할 테고 검찰은 압수수색을 명목으로 온갖 자료를 다 빼갈 게 분명했다·
그 자료중에 뭐 하나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나온다면 그 파급은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세준 부회장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이형준 상무는 혹시 정말로 아버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난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지만 그래도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했기에 그 선택지는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더러 대신 물어봐달라는 말인가?”
“맞습니다·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서로 간에 오해가 있다면 회장님께서 풀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이형준 상무가 이세준 부회장을 오해했다면 무릎 꿇고 빌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회장은 굳은 얼굴로 영훈을 노려보다가 옆에 앉은 형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다 네가 준비한 거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솔직히 전 여기 최 상무가 할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믿어주세요·”
“정말이야? 그럼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약속을 잡은 거냐?”
“말 그대로 최 상무가 제 고민을 듣고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겁니다·”
이 회장이 다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 확실한 증거도 아니고 그저 정황만 가지고 형준이 애비를 의심하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지? 만약 아니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형준 상무는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와 회장님은 사실 오늘 보고 내일부터 안 본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잊은 거는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금융그룹의 회장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저는 회장님한테 그저 실없는 놈이 될 뿐이지만 이형준 상무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나선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현진물산에 얼간이 하나가 있다고 여겨주십시오·”
“그 정도로 우리 형준이와 가까운 사이였나?”
“하핫 솔직히 엄청나게 친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들으셨던 것처럼 이형준 상무와 만난지는 오래되지도 않았으니까요· 굳이 정하자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네 그 정도 같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기업인 사이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인 사이 아닌가요? 이형준 상무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니 그의 위험을 피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한 번쯤은 얼간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경호 회장은 전복죽을 밀어내고 따뜻한 차로 입을 헹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형준이를 살려주려고 얼간이 소리를 듣겠다는데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알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를 받을지 사과를 받을지는 정황이 밝혀지면 그때 받도록 하겠네· 식사 마저 하게· 난 먼저 일어나야겠어·”
이 회장이 일어나자 영훈과 형준이 따라 일어섰다·
“식사는 하고 가시지 그러십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억지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아닌가? 심장도 아니고 혈압이나 당뇨도 아닌데 배탈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형준에게 말했다·
“넌 남아서 식사 마저 하고 오거라·”
“같이 가겠습니다·”
“됐다· 나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지· 파트너 하나는 잘 둔 것 같구나·”
이 회장은 형준의 어깨를 툭 치고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형준은 영훈이 다시 자리에 앉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너 미친 거야? 이거 뒷감당 가능할 것 같아?”
“아마 가능할 겁니다·”
“가능하다고? 어떻게?”
“요 며칠 동안 이경호 회장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보았습니다· 설마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하실 건 아니죠?”
“잡소리 말고 본론을 말해·”
“뒷조사를 했다기 보단 주변 사람들과 그동안의 행적들을 바탕으로 이경호 회장님의 성향이나 위기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등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결론이 뭔데?”
“회장님이 상무님을 그렇게 아낀다고 하더군요·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옆에 꼭 붙여 놓고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고 하던데 좋으셨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며 단숨에 전복죽을 해치우고 입을 닦고는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은 알고 있을 겁니다· 상무님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치부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 회장님의 관심이 부회장님의 동생분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이건 단순히 내 손자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견고한 성의 무너짐을 말하는 겁니다·”
이형준 상무의 불만스럽던 표정이 풀어진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버지가 말하지 못할 거라는 거야?”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죠· 물론 아닐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말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게 내 말이야·”
“제 결론은 이겁니다· 만약 회장님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아마 못 들은 걸로 할 겁니다·”
“확신해?”
“네· 자신이 일궈놓은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일 겁니다· 단순히 혼자만의 기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외적으로 놀림거리가 될 거예요· 회장님의 성정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영훈이 이경호 회장이 만나려고 했던건 과연 그가 혈연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그걸 알아보려는 마음이었다·
이세준 부회장이 폭탄을 터뜨렸을 때 아들의 편을 들어 손자로 위장(?)한 이형준 상무를 내칠 것인지 아니면 이세준 부회장의 무능(?)을 더 문제 삼을지가 궁금했던 거다·
생년월일은 당연히 미리 알고 왔으니 이 회장과 악수한 후 사주를 계산하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일궈놓은 성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성의 차기 성주가 될 손자가 너무도 자랑스러워 대외적으로 자랑하느걸 삶의 낙으로 삶고 있는 인물이었다·
혈육에 대한 자랑은 곧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했던 그 자랑들이 전부 헛소리가 되고 스스로가 병신으로 전락하는 걸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후··· 좋아· 대외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쳐· 아버지처럼 외부에는 알리지 않고 날 말려 죽이시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도 있겠죠·”
“야 너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전 신이 아닙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어요· 다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탐구해서 미래를 예측할 뿐입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뭐?”
“그냥 죽으라고 죽으실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회장님이 씨 없고 30년 넘게 아버지를 속인 이세준 부회장에게 회사를 넘기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뭐 하나 뚜렷한 사업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둘째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비록 자신의 혈육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손자에게 자리를 넘기겠습니까?”
“···”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이 가득하고 온갖 함정이 가득할 겁니다· 피튀기는 싸움을 거듭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싸움을 이기는 승자가 모든 걸 가지리라는 겁니다·”
그제야 형준은 영훈의 말을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회사에서 손을 뗄 거라는 말이군·”
“맞습니다· 셋 중에 누가 되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지게 할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 크지 않을 테니 누가 가지든 무슨 상관을 하겠습니까?”
“씨발···”
이때 직원이 들어와 전복죽 그릇을 회수하고 떡갈비와 잡채를 내놓았다·
영훈은 직원이 내온 음식을 맛보면서 말했다·
“그러니 당장 목이 날아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목은 안 날아가겠지· 그런데 이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숨 막히는 생활을 하게 될 거야·”
형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영훈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네요· 정 못 버티겠으면 나오십쇼·”
“나오라고?”
“적과의 동침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연기가 뛰어나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게 연기만으로 될 것 같아? 이라크에서 폭탄 해체 전담했던 군인들 정도의 간덩이를 가지지 않으면 밥 먹을 때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거라고· 난 숨 막혀서 못 살 것 같아·”
“그럼 나오시든지요·”
“네 일 아니라고 졸라 쉽게 말한다·”
“이 정도 했으면 전 꽤 힘을 써드린 겁니다· 같이 울어드리는 것까지 바라지는 마세요· 아 그리고 이건 계산에 추가할 겁니다· 솔직히 조금 어려웠거든요·”
“와··· 씨발 정 없는 놈 같으니라고·”
“어차피 달아날 목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아날 구멍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려드렸으니까 계산서에 메뉴 하나 올리는 정도는 쳐줄 만 하지 않습니까?”
“그래 너 다 처먹어라·”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떡갈비에 다시 젓가락을 가져갔다·
< 간판을 바꾸다(4) > 끝